가장 오래된 사찰! 강화 전등사의 비밀 [문화를 품은 사찰기행]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로 떠나봅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아도화상이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교를 전파하기 전, 이곳 강화 전등사의 개산조가 되었다는 유서 깊은 설이 있습니다. 당시의 절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고 합니다. #전등사 #사찰기행 #불교 전등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 원종 5년(1264) 5월 삼랑성 가궁궐에 불정도량과 오성도량을 4개월간 시설케 하고 법회를 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이지만, 이때까지도 '전등사'라는 절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가궁궐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왕실과 매우 가까운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사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인천 강화 전등사는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많은 문화재가 있는 사찰입니다. 저와 함께 아름다운 전등사에 가 보시겠습니까?
[김유식의 펜화로 찾아가는 사찰기행] <8> 강화 전등사
불법의 등불을 전한 지붕 없는 박물관
유서 깊은 항몽의 근거지로
곳곳마다 숨은 이야기 '가득'
약사전 바라보며 암투병하는
친구의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가느다란 펜에 공력 담았다
강화 전등사 전경. Pen drawing on paper. 54x36cm.
전등사는 강화대교나 초지대교를 건너 표지판을 따라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유명한 곳이다. 삼랑산성 안에 자리잡은 전등사 경내로 가는 길은 특이하게도 산문이나 일주문 그리고 천왕문이 없다. 주차장에서 10여 분 흙길을 밟고 오르면 삼랑산성 남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문이 일주문을 대신한다고 한다. 남문 통과 후 만나는 아담한 2층 건물 대조루. 이곳을 지나려면 자세를 매우 낮추어야 경내로 들어갈 수 있다.
여기 오르면 서해바다의 조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서 다른 사찰과 글자가 조금 다른 대조루(對潮樓)라 한다. 대조루를 들어가기 전에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리게 되어 있는 윤장대를 볼 수 있다. 경전 한권을 다 읽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부처님을 찬탄하는 마음으로 나도 돌려 보았다.
전등사는 강화에서 제일 큰 사찰로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사찰이다. 이 절은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곳이라고 한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 라 불리었으며 고려 고종 때 몽고와 항쟁하며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하면서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지금의 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의 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의미로 옥등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니 실로 유서깊은 사찰이 아닐 수 없다. 대웅전에 불을 밝혔던 옥등이 값진 유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남향을 하고 있는 대웅전과 대웅전 왼편에 대웅전과 같은 형식이지만 조금 더 작은 규모로 지은 약사전이 있다. 자비로운 약사불의 보살핌으로 암투병을 하고 있는 친구의 쾌유를 비는 마음에서 가느다란 펜에 공력을 담아 그려 보았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약사전을 장엄하는 의미에서 5월의 꽃인 작약을 그려 넣었다. 목조건물인 약사전이 오래되어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해체보수가 되기 이전의 작품으로 남긴다면 역사 기록물이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곳의 전각들을 둘러보면 전체적으로 석축을 쌓아 높은 기단위에 건물을 올려 불법의 위엄이 서려있는 듯하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중기 광해군 때 다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배흘림 모서리 기둥 높이를 약간 추켜세워 처마끝이 날아갈듯 들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곡선이 심한 지붕도 매우 안전감이 있고 우아하게 느껴진다.
현대의 과학적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마치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적용한 듯 지붕 모서리가 하늘로 치솟는 지붕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데, 이는 처마를 높여 빗물이 빨리 떨어지도록 함으로써 습기에 취약한 목조건물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대웅전은 조각기법도 매우 수려하지만 공포 위로는 동물조각, 귀면, 연꽃봉오리 등 다양한 소재를 보여준다. 전등사에 가게 되면 대웅전 처마를 올려다보시라. 사각 모서리에 벌가벗은 여인이 쭈그리고 앉아 힘겹게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매우 해학적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사랑에 배신당한 도편수의 증오가 지붕을 이고 있도록 형벌을 준 것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여인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끝없는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네 마리 원숭이들이 처마를 받들어 지붕을 들고 있게 배치했다는 설도 있다. 도편수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부처님의 넓은 도량에서 예술로 승화되면서 전등사만의 특별한 양식이 되었으니 사찰기행에서 얻는 독특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펜화를 그리기 전 구도를 고민하면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이곳 전등사를 잘 나타내는 구도는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명부전 방향에서 약사전, 최근 향로전에서 관음전으로 바뀐 전각과 대웅전을 두고 마당 오른편에 묵묵히 200년 이상을 견뎌온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섬세한 펜촉으로 수없이 선을 그어 여러 전각과 숲 그리고 느티나무를 그리며 긴 시간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림에는 빠졌으나 느티나무 옆에 종루가 있는데 북송시대 중국에서 들여온 독특한 철종이 있다. 일제의 징발로 빼앗긴 종이 해방 후 부평의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졌다 하니 이는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까 싶었다.
작약이 만발한 약사전. Pen drawing on paper. 54x38cm.
전등사는 경내에 정족산 사고(史庫)를 설치하고 찬란한 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면서 조선 후기의 4대 실록 보관소가 되었다 한다. '취향당'이라는 편액은 영조가 직접 전등사를 방문했을 때 썼다고 하니 왕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명찰임에 틀림없다.
경내를 둘러본 후 샛문으로 나가보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삼랑산성을 둘러볼 수 있다. 평지라서 쉽게 일주할 수 있는 이 곳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전해진다. 삼랑산성은 병인양요 때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이 부처님의 가피로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웅전 기둥, 보개, 용 등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하는데 그래서인지 총 500여명 군사 중에 단 네 명만 전사했다고 하며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렇듯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목숨을 건 사투에서 승전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자랑스럽게 전등사와 사고를 지켜냈다. 그러한 역사적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단청을 새로 하는 것도 보류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전등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국사찰과 왕실의 사찰로서, 역사를 지키고 보존, 계승하는 사고의 역할까지 해내며 무려 1600여년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그 뜨거운 숨결은 부처님에 대한 환희심과 더불어 가슴 깊은 곳에 울림을 주었고 나는 그 호흡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작품으로 승화시키려고 바삐 손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절집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스케치하며 느낀 감흥이 워낙 커서인지 자취를 감추기 직전의 햇빛이 찰나에 온 세상을 화려하면서도 붉게 물들인 줄도 몰랐었다. 이곳 강화도는 서해 3대 낙조 중 한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사찰에서 바라 본 낙조는 뭉클하면서 벅차도록 아름다웠다.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도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고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고 어디를 가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지붕 없는 박물관'라 불리우는 전등사. 몇 달 뒤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올 때가 되면 마음 맞는 도반들과 어울려 템플스테이 체험으로 다시금 찾으리라 결심하며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왔다.
[불교신문 3716호/2022년5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