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역사의 산 증인이란 이런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오슨 웰스 아카이브의 디렉터 질리언 그레이브는 살아 있는 아카이브다.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그로부터 우리가 몰랐던 웰스의 생애를 들었다.
7년 만의 일이다. 2000년에 처음 열린 회고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오슨 웰스 회고전'에 맞춰 웰스의 후기 작품 촬영을 전담했던 게리 그레이버를 대신해 미망인 질리언 그레이버가 서울을 찾았다. 게리 그레이버는 지난해 11월 오랜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질리언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있었던 관객과의 만남을 마치고 서울을 다시 찾은 것에 살짝 들떠 있었다. 이번 한국 방문에는 게리 그레이버의 50년 지기 친구인 글렌 제이콥슨도 함께했다. 글렌 또한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 말하며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25년 전에 처음 서울을 방문했다. <인천>이란 영화를 기억하는가? 테렌스 영이 감독하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영화로, 나는 그 영화에서 단역인 미국인 장교로 출연했다. 소품으로 준비된 장교복을 입고는 서울의 이태원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많은 미군 병사들이 내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했었다.” 이처럼 오슨 웰스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기억으로 시작해 웰스의 마지막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웰스의 거짓과 진실
어떻게 오슨 웰스 필름 아카이브를 시작하게 됐나? 남편 게리 그레이버는 웰스의 마지막 15년의 삶을 함께한 촬영감독이었다. 웰스가 사망한 후에 웰스가 직접 기증한 프린트들과 웰스가 제작하고 출연한 영화들, 클립들을 보관하는 ‘오슨 웰스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했다. 지난 20여 년간 국제영화제들과 시네마테크를 돌아다니며 웰스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당신이 기억하는 오슨 웰스는 어떤 감독이었나? 웰스는 강박적인 감독이었다. 그는 재미있고 재담이 넘치는 멋진 사람이었다. 또한 실험가였고 워커홀릭이었다. 그는 한 번에 두세 개의 영화를 같이 작업했으며 좋은 음식과 아름다운 여성,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했다. 아주 말이 많았고, 아무도 그 앞에서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단히 친절한 감독이었다. 알다시피 웰스의 영화 대부분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스타라는 존재감을 이용해 수많은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찍으면서 돈을 모아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다. 웰스는 영화를 만들 때 모두가 만능이 되기를 원했다. 모든 사람이 운전, 촬영, 조명, 분장, 사운드, 심지어 요리사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주곤 했다. 완벽한 기술자였고, 스탭들에게 신기술을 설명해주곤 했다. 만약 그가 디지털 기술을 알았다면 아마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어떤 것을 시도할 때, 소위 말하는 표준, 전통, 이런 것들은 별 의미가 없었다.
말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고,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왈가닥 루시>에 출연한 오슨 웰스를 본 적이 있나? NBC의 ‘투나잇 쇼’ ‘매직 쇼’라는 프로그램을 게리 그레이버와 함께했었다. 게리 그레이버가 만든 <오슨 웰스와 일하며>(1994)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웰스는 마술을 정말 좋아했다. 장난, 속임수, 마술을 사랑했다. 그는 정말 뛰어난 마술사였다. <거짓과 진실>(1974)은 그런 웰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천재적인 그림 위조범의 이야기, ‘거짓’이라는 책을 쓰고 하워드 휴즈의 가짜 자서전을 쓴 클리포드 어빙의 이야기, 그리고 H.G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을 라디오극으로 만들어 미국인들을 속인 웰스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웰스에게 마술과 환상은 아주 친밀한 것이었고 그는 <시민 케인>과 <상하이에서 온 여인>에서 그런 속임수를 사용했다.
<거짓과 진실>에서 웰스는 피카소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사기꾼은 사실 진실을 추구합니다. 이걸 건방지게 표현하면 예술이라 할 수 있죠. 피카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영화 초반부의 한 시간 동안 웰스는 진실만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이어 나머지는 거짓말이다. 웰스는 세상을 속이는 사람이 역사에서 결국 위대한 인물로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건 사람들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가 촬영할 때 화면 안에 ‘정지’라는 교통안내 표지판을 놓으라고 스탭에게 주문했는데, 다들 왜 그걸 놓아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그러자 웰스는 ‘별 의미는 없어. 하지만 아마 저 교통표지판의 의미에 대해 이후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할 거야’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웰스의 이미지는 대부분 <시민 케인>에서 <상하이에서 온 여인> 정도에 이르는 초기 영화에 한정된다. 이후 그는 20년간 유럽을 떠돌았다. 당신과 게리 그레이버는 그의 영화적 삶의 나머지 1/3인 1970년에서 1985년까지 15년을 함께했다. 웰스는 말년에 나태하고 고집불통에, 영화제작보다는 유명세를 이용해 와인 광고나 방송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안이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웰스의 후기 경력은 지극히 생산적이고 창조적이었다. 웰스는 게리 그레이버와 함께한 15년의 작업기간 동안 대단히 창조적이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작업을 했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들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웰스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매일 두 시에 잠들어, 새벽 네 시쯤 깨서는 스탭들을 갑자기 소집해 좋은 영감이 떠올랐다며 촬영하곤 했다. 그는 매일 촬영을 했고 영화를 만들었다.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도 그는 <줄리어스 시저>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웰스는 너무 창조적이었기에 오히려 스튜디오와 관객들이 그를 외면했다. 웰스는 영화야말로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다. 한번은 웰스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웰스인 척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왜냐하면 매번 영화를 만들 때마다 모두들 또 하나의 웰스표 영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웰스는 또 이렇게 말했다. 영화감독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정부를 사귀는 것과 같다고.
창조적이었던 말년에 대해 더 말한다면. 웰스가 말년에 영화를 만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웰스표 영화를 원했지만 웰스 자신은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했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할리우드는 히치콕,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로만 폴란스키의 아름다운 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우화, 비유, 동화 같은 것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웰스의 비타협에 대해 축하하는 것은 사실 별의미가 없다. 웰스 자신도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액션을 외칠 때마다 천한 현실을 시로 변화시켰다. 웰스는 우연한 사고를 즐겼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것을 영화에 사용하려 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좋은 감독은 사고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사건사고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것을 활용해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웰스에게 영화는 '나'의 영화가 아니라 '우리'의 영화였다. 우리는 웰스보다 어렸지만 도리어 우리가 항상 그에게 호흡을 맞춰야 했다. 우리가 준비해놓은 조명에 대해 그는 항상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조명은 당장 집어치워라'고 호통을 쳤다. 웰스는 비순응자, 매버릭maverick이었다. 그는 독립적이었고, 미국영화연구소(AFI)가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줄때 썼던 '매버릭'이라는 호칭은 그의 고유명사가 됐다.
너무 늦어버린 꿈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올해 출간된 조나단 로젠봄의 ‘오슨 웰스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보여줬고, 질리언은 그 책의 서문에 실린 ‘많은 웰즈니언들에게, 그리고 특히 게리 그레이버와의 애정 어린 기억에 이 책을 바친다. 그는 모든 웰스의 촉진자들 중에 가장 헌신적이었고 가장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웰스의 마지막 1/3의 작품을 가능케 했고, 이 책이 출간되기 직전에 사망했다’라는 글귀에 ‘사랑스럽고 고마운 로젠봄’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지난해 출간된 조셉 맥브라이드의 ‘오슨 웰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라는 책과 함께 로젠봄의 이 책은 웰스의 후기 작품들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당신과 게리는 웰스의 마지막 영화이자 미완의 작품인 <바람 저편에>를 만들었다. <바람 저편에>는 어떤 영화인가? <바람 저편에>는 상당히 자전적인 이야기로, 허용된 예산과 웰스 자신의 기분, 새롭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그때그때 차용하면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웰스는 아주 논쟁적인 사람이었지만 그와 같이 작업했던 우리들은 미국 영화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독립영화 감독과 일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 영화는 당시 비순응자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한 영화감독을 모델로 씌어진 각본을 바탕으로 촬영됐다. 영화 속에서 감독 역은 존 휴스턴이 맡았는데, 각본도 없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스튜디오의 분노를 사게 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휴스턴이 맡은 역할은 영화감독이긴 하지만 헤밍웨이의 캐릭터를 많이 차용한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사람은 두 시간이 넘는 러프 컷을 본 적이 있다고 했고 어떤 이는 40분 분량의 필름이 남아 있을 뿐이라 말한다. 사실은 어떤가? 1971년에 촬영을 시작해 L.A.와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스페인, 파리를 오가며 촬영했다. 웰스는 정확히 이 영화를 완성했다. 영화에는 존 휴스턴 외에도 피터 보그다노비치, 데니스 호퍼, 클로드 샤브롤, 폴 마줄스키, 커티스 해링턴, 리처드 윌슨, 조셉 맥브라이드 등이 출연했다. 우리는 현재 웰스가 직접 편집한 40분 분량의 필름을 갖고 있다.
지난해 게리 그레이버가 사망했다. 대단히 슬픈 일이었을 텐데 게리 그레이버와 오슨 웰스의 작업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웰스와 게리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이였다. 웰스는 그의 가족들보다 게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게리는 <거짓과 진실> <바람 저편에> <오셀로 촬영기> <심판 촬영기> 등의 영화와 웰스가 죽기 직전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함께했다. 웰스에 대한 게리의 정성은 대단했다. 예산이 늘 부족했기에 게리는 웰스에게 더 정성을 다했다. 게리는 더 많은 웰스의 영화가 나오기를 원했다. 게리는 실력이 좋은 촬영감독이었다. <바람 저편에>를 촬영할 때 웰스는 <시민 케인>의 각본상으로 받은 오스카 트로피를 소품으로 사용했는데, 갑자기 게리에게 그걸 선물로 줬다. 게리는 너무 놀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웰스는 자기가 줄 수 있는 선물이라며 게리가 거절할 수 없게 했다. 웰스와 게리는 서로 장난삼아 호칭을 바꿔 부르기도 했는데 게리는 웰스를 그리피스를 따서 DW라 불렀고, 웰스는 게리를 렘브란트라 불렀다.
지난해 당신과 게리 그레이버는 <바람 저편에>의 상영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케이블 채널 ‘쇼타임’에서 영화를 상영할 계획이라 했는데, 이 프로젝트는 여전히 유효한가? 이 영화의 완성과 관련해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웰스는 1975년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수여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면서 이 영화의 완성에 필요한 돈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1975년 AFI는 웰스에게 평생공로상을 헌정했다. 웰스는 처음 수상을 거절했지만 <바람 저편에>의 일부분 상영을 요구했고, 그것이 허락되자 수상식에 참여했다. 물론 그는 이 기회를 빌려 투자자를 찾을 수 있기를 염원했다. 시상식에서 웰스는 ‘이 영광을 모든 매버릭을 대신해 받겠습니다. 매버릭은 자신만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유일한 혹은 최고의 길이라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자신을 위해 길을 걸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날은 웰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날이었다. 웰스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를 도우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바람 저편에>의 후반작업을 끝낼 수 있는 예산을 마련하려고 한다. 가끔씩 좋은 소식을 듣기도 한다. 이제는 게리를 비롯해 <바람 저편에>에서 일했던 스탭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바람 저편에>를 끝내는 것이 게리와 나의 꿈이었다. 하지만 이제 너무 늦어버린 꿈이 돼버렸다.
웰스의 영화에 영향받은 많은 감독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나? 스필버그는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라는 이름이 적힌 썰매를 고가로 구매했지만 정작 웰스의 마지막 작품을 위해 돈을 내지는 않았다. 한 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락해 <바람 저편에>를 보고 싶다고 해서 그의 제작사인 말파소를 찾아갔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사실 이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그는 <추악한 사냥꾼>(1990)을 만들 계획이었고, 존 휴스턴의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추악한 사냥꾼>에서 이 영화의 대사 몇 개를 빌려갔다. 하지만 그 또한 <바람 저편에>의 개봉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지난해 게리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웰스의 딸 베아트리체 웰스와의 분쟁이나 웰스의 여인 오야 코다와의 문제도 해결됐다. ‘쇼타임’의 결정만을 기다릴 뿐이다.
사진 김수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