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역에서 7호선에 몸을 실었다. 무엇 때문인지 조용히 잠자코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두리번 거리며 빈 신문을 찾는다. 허둥지둥 나오느라, 버릇처럼 가지고 다니던 소책자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이윽고, 객실 한 쪽 구석에서 운 좋게 신문 뭉치를 발견한다. 힐금, 소화기의 위치며, 비상문 레버를 확인하는 민첩함. 굿데이 신문이다. 이런, 어제 신문...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기에, 이곳 저곳을 뒤져기며 어제 읽은 기사들을 다시 음미해본다. 하지만 머리 속에는 여러 상상들로 가득하다. 어떻게들 변해 있을까?
적어도, 근주 형을 본 것이 4년 전, 진철이는 대전에서 올 해 보았다. 대형이도...4년전. 세현이가 나온다면 10년 만인가. 주연이가 나온다고 했으니... 역시 10년은 넘었다. 후리지아인가? 누군가 더 나올 것 같은데, 후리지아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소연이도 어투로 보아서는 온다는 것인지, 안 온다는 것 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소연이를 본 지도 10년을 넘었다. 오 마이 갓!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늘 내 신앙의 고향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후평동 성당이고, 또 그 곳을 떠올릴 때면,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곤 하던 이들인데. 어쩌다 족히 10년은 되도록 인사조차 나누질 못했으니. 이제는 어제의 모든 기억들을 껴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참, 난 유난히도 부끄러움을 많이 탓던 것 같다....
아침에는 잠시 고민을 했다. 뭘 입고 나가지? 청바지도 입고 조금 터프하게 보이게 할까? 아니야. 이 나이에 무슨...어떤 셔츠를 입을까? 이럴 땐 차라리 수도복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암튼, 면도는 깨긋하게 해야지. 그렇잖아도, 얼굴이 까매서 불량스러워 보인다고들 하는데...애이, 그냥 입던데로 입자. 편한게 제일이지. (나중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고백한 것이지만, 청량리까지 가는 중에 난 두 번의 검문을 받았다. 내 참, 드러워서..나같이 인상 좋은 사람을 왜 잡냐고? 아침에 면도도 했는데!)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지하 청량리 역에서 역 광장 쪽으로 올라섰다. 5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아직 아무도 나올 시간이 아니건만, 가슴이 콩닥거림을 어쩔 수 없었다. 심장이 밖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3시 반. 진철이는 1시 차로 대전에서 올라오는 중이라, 빨라도 4시 쯤 에야 도착할 것 같고, 대형이는 조금 일찍 만나서 식사를 할 장소를 미리 예약하기로 했다. 다행히 헌혈차가 없었다. 만나면, 아직 2달 안되었는데요, 하려고 했는데... 광장을 서성이기를 10분여. 이윽고 대형이가 왔다. 시계탑 밑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너무 촌스런 약속인가. 촌스러우면 어때, 하긴, 내가 촌스러운 놈이니. 대형이가 다가오는 것은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짧은 스포츠 머리가 총총 뛰는 것이 인츰 눈에 띄었다. 잠시의 하하거림. 반가움. 그 시절의 깨끗한 미소가 여전히 (약간?)주름진 얼굴에 숨어있었다. 식사 장소는 건널목을 지나서, 먹거리 골목에 있는 조용한 한식당 방으로 했다. 첫 눈에, 우리들 끼리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장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진철이를 만났다. 가방을 하나 메고 있기에, 등산 다녀오냐고 농을 했더니, 카메라 가방이란다. 녀석! 역시 늘 무엇엔가 도움이 되는 놈이다. 나중에 사진을 자료실에 올린다고. 얼마나 기특한 생각이에요?
잠시 후 대형이의 성화에 못이겨, 다움카페에 전화 번호 올라온 것이 있나 알아보러 대합실 쪽으로 올라왔다. 동전을 바꾸어 막 접속하는 순간, 대형이가 헐덕이며 따라왔다. 야 다왔어. 으메. 아까운거. 아직 14분이나 남았는데. 대형이와 돌아서서 내려오는 계단이 왜 이렇게 쑥스럽던지. 멀리 진철이 주변에 female 2, male 1 이 보였다. 아! 까치머리. 근주형은 즉시 알아보았다. 근데... 그 옆에 두 아가씨들은 누구지. 근주형 애인인가? 아니 이런, 소양이와 젬마! 아줌마가 되었으리라 상상했었다. 몸매 관리도 포기하고, 애 하나둘씩 딸린 아줌마. 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이런 쑥스러움과 어색함들이 온통 날아가 버렸다. 글쎄, 서로의 기억 속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은 어제의 일처럼 의미가 없던 것일까. 우리는 그저 고교시절의 우리들이었다.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쉴새없이 찍어대는 우리의 찍사. 그이름 자랑스러운 우리의 띠맨.(후에 안 일이지만 진철이는 대학에서 띠맨으로 통했단다. 자세한 것은 리플 달아주세요. 하하)
조용한 방에 모여 앉은 우리는 고2, 고3때의 그 정겨움 그대로 였다. 해물 전골을 시켰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하긴 그날은 어떤 것을 시켜도 맛이 있었으리라. 서로의 미소가 찬이었으니. 서로에게 얽힌 추억들을 나누었다. 처음으로 선배들을 통해서 소주 먹었던 이야기, 그런데 그 첫 소주가 3병이라 고생했던 일, 캠프가서, 또 교육관 지하실에서 줄## 맞던일.(그 때는 다른 성당도 다 그런 줄 알았슴. 너무 순진했지? 내 참!) 아이들 이야기, 산고가 얼마나 무섭다느니(다른 4명의 총각들은 그저 신기한 듯이 2 유부녀를 쳐다볼 뿐 이었다), 친정이야기, 남편이야기, 직장이야기, 다른 동기, 선배, 후배들 이야기, 신부님, 수녀님들 이야기 이야기... 끝이 없었다. 그사이 여전히 후뢰시를 쉴새없이 터트리는 띠맨. 역시 특이한 놈이다. 누군가의 한 마디에 쏟아지는 폭소. 잠시 후 세현이와 인숙이 누나가 합석을 하였다. 갑자기 건전하던 분위기가 누구때문인지(아마도 S) 18세 청취금지로 넘어갔다. 자리도 잠시 후 호프집으로 옮기고. 거의 소주 한 병씩은 먹고 온 터라, 섞어 넣는 맥주에 이내 기분들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누구는 누구를 좋아했었다, 코너. 이렇게 활기있는 분위기는 증말 오랜만이다. 근주는 Y(이름기준)를 좋아했고(본인은 부인하던 끝에 나중에 S라고 고백), 대형이는 H, 세현이는 속이 쓰려서 말 안한다고 함, 진철이는 능첨스레 후레시 터트리러 일어서고, 그럼 화장실에 있던 ‘인숙’이 이름은 누가 썼냐? 손드는 근주형. 역시 여성 동무들은, 내숭을 떨었다.(조선 여인들의 미덕!) 반대로 남성동무들이 누가 소양이 젬마, 인숙이 누나를 좋아했었던 지를 쉴새없이 떠들었다. 흐뭇한 미소들.(호호호)
그렇게 밤은 깊어 갔다. 대전으로 내려가는 진철이가 막차 시간에 맞추어 먼저 일어서고, 다음은 춘천으로 가는 소양이. 나머지는 주연이가 새벽에 동대문에서 물건을 사야한다고 해서, 동대문 운동장 쪽으로 옮겼다. 세현이 후배가 있는 호프집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나(용섭)와 대형이도 일어섰다. 이미 나에게는 통행금지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으니. 하지만 밤이 새도록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돌아오는 길은 행복함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얼마나 좋은가. 형제들이 오손 도손 함께 사는 일’이라는 시편구절이 생각났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한 동안 웃음이 나와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띠맨, 까치머리가 자꾸 떠올라서. 비록 지하철 막차가 끊겨서 한 참을 헤메다 돌아왔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주님! 늘 저희들의 유대를 지켜주세요. 이곳에 모이지 못한 모든 친구들도 지켜주세요.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형제애를 세상의 모든 이와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유난히 창 밖의 백열등이 부드럽게 얼굴을 덮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