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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론, 페론주의, 포퓰리즘
“하늘에 계신 우리의 작은 어머니여! 천사들 가운데 웃고 있는 착한 요정이여! 에비타! 그대가 원한 대로 저는 하느님을 따르고 나라를 사랑하며 착한 어린이가 되기를 약속할게요. 또한 페론 장군을 돌보며 공부 열심히 하고 당신이 꿈꿨던 어린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가 되도록 할게요.”
아르헨티나의 공립학교 어린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문을 외웁니다. 죽은 에비타를 추모하는 1950년대 아르헨티나 공립학교의 한 풍경입니다. 아르헨티나 어린이들이 성모 마리아를 부르듯이 이름을 불러 주었던 그 에비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Maria Eva Duarte de Peron, 1919-1952)이 오늘, 1952년 7월 26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노동자들의 기수, 민중의 성자로 불렸던 에비타(작은 에바, 에바는 생명이란 뜻), 사후에도 아르헨티나 민중에게 신화이자 종교로 남았던 에비타, 대통령의 부인이었지만 가장 서민적인 애칭이었던 에비타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던 그가 오늘, 겨우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에바 페론은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한 국가에서 짧은 생을 산 여성이지만 현대정치에서 숱한 논쟁의 지점을 남겨 놓았습니다. 지금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정치, 경제, 사회문제로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의 남편 페론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가 태어난 나라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와 그의 남편 페론이 남겨 놓은 유제, 페론주의를 놓고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끝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떤 논쟁이 진행되든, 에바에 대해 어떤 평가가 진행되든,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여전히 에바를 가난한 노동자와 민중의 자애로운 어머니로 기억합니다. 부자들과 에바 이후의 군사정권이 에바의 삶을 애써 평가절하하고 그에 대해 온갖 비난의 화살을 쏟아 놓더라도 아르헨티나의 민중들은 여전히 에바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투사로, 아르헨티나의 잔다르크로 기억합니다. 세계에서 다섯 번 째로 부유했던 아르헨티나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최빈국 중의 하나로 전락한 책임이 바로 그와 그의 남편 페론의 페론주의에 있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져도 에바의 무덤에는 꽃을 든 아르헨티나 민중의 긴 행렬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중에게 영합하는 기회주의 정치’로 규정되는 포퓰리즘의 원조로 에바와 그의 남편 페론이 아무리 거론되어도 아르헨티나 민중은 에바를 가난한 이들과 평생을 함께 한 아르헨티나의 국모로, 성녀로 기억합니다.
오늘 에바 페론의 유언이 된 말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들으며,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에바 페론의 삶의 행적을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에바의 삶의 행적을 쫓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의 남편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 Peron, 1895-1974)을 만나게 되고 에바와 페론의 정치, 페론주의와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포퓰리즘을 만나게 되고 오늘의 한국정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에바가 숨을 거둔 날, 아르헨티나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의 출발로 일컬어지는 페론주의를 들여다 볼 것입니다. 아울러 페론주의에서 그 전형을 찾는, 이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모든 사회적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의 잣대로 쓰이는 포퓰리즘에 대해서도 살펴 보겠습니다. 또한 포퓰리즘이 한국정치에서 어떻게 상대방을 비난하는 전가의 보도로 쓰이고 있으며 실제 한국정치에서 포퓰리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살펴 볼 생각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비옥한 초원 팜파스에 있는 한 소읍이었던 로스톨도스에서 태어난 에바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불우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들이 소유한 큰 농장을 관리하는 관리 책임자였습니다. 고향에 이미 가족이 있었지만 그는 농장의 요리사였던 여인과 또 가정을 꾸렸고 에바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5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들 부부관계는 법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으므로 에바와 그의 형제들은 사실상 사생아였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에바는 이미 주류사회의 뒤편 그늘지고 소외된 거리에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나마 첫 돌이 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에바의 가족을 버리고 고향으로 떠나 버리자 에바가족의 삶은 급격하게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가난의 고통과 사생아라는 조소를 견뎌내며 성장한 에바는 16세가 되던 1935년, 배우가 될 생각으로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올라 왔습니다. 그야말로 60년대 우리 시골누이들의 무작정 상경과 같은 에바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도전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의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에바는 수많은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배우라는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치루어야 하는 여성으로서의 치욕의 과정이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빈곤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었고, 주류사회가 거침없이 휘두르는 편견과 차별, 모욕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유년시절에 겪었던 조소와 가난의 설움,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끝없는 고통의 시간들은 이후 에바의 삶과 가치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바는 자신의 이 유년의 기억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초기 삶에 대해 생애 내내 침묵하였지만 그의 가슴속에 눌러 붙은 그 기억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을 언제나 안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원래부터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팜파스라는 대초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팜파스는 아르헨티나가 세계 최대의 농업생산국이 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제공하였습니다. 1869년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6.9%의 높은 수준이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전체 도시들 가운데 뉴욕 다음의 대도시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의 국민 1인당 GNP는 스페인·이탈리아·스웨덴·스위스보다 높았고, 독일이나 베네룩스 3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실상 세계 5대부국중의 하나였습니다. <엄마찾아 삼만리>의 주인공 마르코의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떠난 곳이 아르헨티나라는 사실은 바로 당시 아르헨티나가 유럽의 빈곤층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의 과실은 대부분 지주와 특권층이 독점했고 일반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결과는 부유층이 정치를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19년, 비밀투표와 공정한 선거제도를 핵심으로 하는 법안이 통과 되면서 지주와 부자들의 정치독점을 비판하며 일반서민의 생활보장을 내세운 급진시민당이 아르헨티나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합니다.
1916년 집권한 급진시민당의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은 최저 임금제 실시·최대 노동시간 제한 등 소외 계층을 위한 복지제도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노동자들은 정부가 좀 더 힘 있는 정책을 통해 사회개혁과 노동자들의 생활고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데 대해 불만이 높아갔습니다. 정부의 개혁정책은 잇달아 실패했고 보수층은 이런 대중의 불만을 등에 업고 정부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죄어 나갔습니다. 마침내 1935년, 보수세력의 연합세력인 콘코르단시아가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콘코르단시아는 그동안의 사회개혁추진을 백지화하고 보수반동의 정치를 전면화하였습니다. 민주주의는 실종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제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모든 권력은 특권층과 지주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런 반동의 철권통치에 무력하게 무너져갔고 정치에 대한 절망과 냉소만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에바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올라 온 1935년은 콘코르단시아가 막 집권했을 때 였습니다. 빈곤층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사회의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유층이 머무는 지역과 빈민가의 판자촌은 천국과 지옥만큼의 차이보다 더 커보였습니다. 에바는 빈민가에 방을 얻고 생활하는 것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어려웠고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생존의 결전장이었습니다. 에바는 이 생존의 과정을 통하여 사회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슴에 담아가고 있었습니다.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 Peron, 1895-1974)은 1930년대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무솔리니와 파시즘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귀국 후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부패한 정치에 대한 분노와 민중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1943년 6월4일 통일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과 함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페론은 군사 정권 아래에서 대통령이 수차례 교체되는 가운데 정부 내 요직을 거치면서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군사정부는 유럽파시즘의 이념적 출발로 기능했던 국가사회주의에 입각한 정책기조를 가지고 아르헨티나의 경제, 사회구조를 재편해 나갔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페론이 주도한 노동정책과 복지정책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페론은 개혁적인 구호와 대중과의 직접접촉, 그리고 단순하고도 감성적인 선동과 호소를 통해 이런 정책들을 시행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페론의 전략은 이후 페론주의의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페론은 노동복지부 장관으로서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고 농업노동자들을 봉건적인 채무상태에 머무르게 하고 있던 농가부채에 대한 전면적인 탕감조치를 단행했습니다. 또한 페론은 노동자들에 대하여 50%의 임금인상, 4주간 휴가, 임의해고 금지, 크리스마스직전에 1개월의 임금을 추가 지급하는 아기날도제도 도입 등의 노동정책을 통해 노동자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들을 시행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조치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가 최고의 성장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는 2차대전 중 중립을 표방하며 전쟁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대초원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농업국으로 세계최대의 농.축산물 생산국인 아르헨티나는 전쟁과정에서 급격하게 늘어난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던 세계 농.축산물 시장에서 가장 큰 손이었습니다. 페론은 한편으로는 밀과 쇠고기 수출의 호조를 통해 부를 축적한 자본을 압박하고 또 한편으로는 정부재정의 지출을 통해 이와 같은 정책들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자본과 부유층이 볼멘 소리를 쏟아 놓았지만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이를 부담할 충분한 경제적 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페론은 또한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을 새롭게 재편하여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힘을 보탤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고자 하였습니다. 페론은 아르헨티나 공산당의 영향력하에 있던 전통적인 아르헨티나 노동조합들을 배제하고 노동조합의 새로운 조직화에 나섰습니다. 직접적인 노동자대중과의 접촉과 친노동 복지 정책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페론의 노동운동 재편은 짧은 기간에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면서 새로운 조직인 노동조합총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통적인 좌파 노동운동은 사실상 소멸되었고 아르헨티나 노동조합은 국가의 통제하에 페론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토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에바가 페론을 만난 시기는 바로 이 즈음이었습니다.
1940년대 초부터 에바는 라디오 방송국의 성우이자 배우로서 자리를 잡아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43년에 들어서는 그 이름이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44년 1월, 그 여름에 한창 인기를 모아가던 에바는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 산후안의 이재민을 돕기 위한 후원행사에서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났습니다. 첫 만남 이후 둘은 곧 바로 연인관계가 되었습니다. 나이차이가 두 배에 달했지만(에바가 25세였고 페론은 49세) 두 사람은 그 때부터 에바가 곧 페론이었고 페론이 곧 에바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을 마음에 갖고 있던 에바와 새로운 노동복지 정책으로 노동자의 친구가 된 페론은 이후 정치적 동반자로서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아르헨티나의 정치와 사회를 꿈꾸어 가고 있었습니다.
에바의 배우로서의 위치와 인기는 페론과 연인이자 정치적 동지가 되면서 더욱 높아졌습니다. 에바는 이즈음 처음으로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배역을 위해 염색한 금발은 에바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에바는 평생 금발의 머리를 하고 다녔습니다. 1944년 5월, 배우조합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에바는 이후 그 지위와 인기를 통해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활동과 사회활동, 그리고 페론에 대한 지지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에바는 매일 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가난한 도시서민의 생활과 굶주리는 농민들의 삶, 그리고 속박의 고통 속에 허덕이는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의 고통들이 페론의 개혁에 의해 어떻게 극복되고 있는지를 또한 목소리를 높여 설명해 나갔습니다. 에바는 이를 혁명이라 불렀습니다.
“혁명이 이루어진 것은...... 이 나라 저 밑바닥의 민중들로부터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증오와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자라났기 때문입니다.......혁명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노동의 존귀함을 되찾아 줄 사람이 있습니다......그가 바로 민중의 혁명을 단호하게 이끌어 나갈 사람입니다.”
도시의 노동자들, 농민들, 그리고 여성들은 에바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마음속에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에바에 대한 이러한 민중의 인기는 당연하게도 페론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페론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마침내 부통령과 국방장관을 겸하는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자본과 상층계급, 그리고 보수적인 정치세력은 점차적으로 에바와 페론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을 비롯한 전통적인 좌파정치세력들 또한 에바와 페론이 형성하는 정치지형과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깊은 우려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페론의 등장은 전통적인 좌파의 입지를 현저히 좁혀 놓았습니다. 에바와 페론의 직접적인 대중접촉과 감성적인 선동은 노동자, 농민 등 사회기층세력을 기반으로 한 좌파의 정치적 기반과 활동을 무력화 시켜 버렸습니다. 노동조합의 다수는 이미 페론의 손에 넘어가 있었고 좌파의 정책적 의제들은 페론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산당과 좌파 노동운동 세력들은 페론이 민중의 눈과 귀를 호도하며 대중영합적인 정치를 통해 아르헨티나를 파시즘화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페론이 히틀러를 흉내 내고 있으며 히틀러와 다름없는 독재자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마다 에바와 페론은 대중을 직접적으로 만나며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와 선동을 통해 이러한 비판들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에바와 페론은 수천 혹은 수만의 노동자 집회, 농민집회, 그리고 다양한 직접접촉의 공간을 만들어 이러한 자신들에 대한 비난이 외세에 조종당하는 부패한 정치인, 아르헨티나 민중의 생존권에 아랑곳하지 않는 부유층, 민중의 아픔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이념에만 골몰하는 좌파들의 무책임한 선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천명하고 민중을 위한 개혁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호소하였습니다. 페론은 어느새 기존의 정치구조 밖에서 새로운 정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소한 정치는 기존의 정치세력이었던 모든 정치세력, 보수세력과 좌파 정치세력 모두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기이하게도 페론과 민중을 놓고 보수세력과 좌파세력이 공동투쟁의 전선을 형성하는 국면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아르헨티나는 페론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단순한 정치구도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군사정권내부에서도 페론에 대한 질시와 우려, 그리고 권력을 놓고 다투는 갈등과 분열의 양상으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더구나 민정이양이라는 정치일정을 눈앞에 두고 있던 군사정권은 차기 권력을 놓고 페론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마침내 군부는 페론에 대한 축출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1945년 10월 8일 페론을 체포, 구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페론의 체포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페론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져 갈 참이었습니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군부 내에 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야 언제나 그렇듯 큰 일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페론의 축출 소식은 에바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갔습니다. 마침 페론이 대통령에게 보낸 석방요구편지가 신문에 공개되면서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분노했습니다. 군부가 생각했듯이 페론은 결코 한 사람의 정부각료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페론은 이미 아르헨티나 전체 노동자, 농민과 운명을 같이하는 아르헨티나 민중의 기수이자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10월 17일,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노동자들은 전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정부 청사인 카사로사다 앞의 광장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20만이 넘는 군중이 요지부동으로 광장앞에서 페론의 석방을 요구하며 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타오르는 불꽃 앞에 군부도 자본도 손을 들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선 시각, 불꺼진 카사로사다에 불이 들어오고 발코니에 페론이 등장했습니다. 민중들의 가슴 벅찬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페론의 이름이 끝없이 불려졌습니다.
“여러분의 투쟁으로, 민중의 투쟁으로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저 페론은 이제 보통 시민으로서 땀 흘리는 여러분, 민중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10월 17일은 우리나라의 광복절만큼이나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날입니다. 페론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페론의 석방투쟁을 승리로 이끈 이 10월 17일은 국경일로 지켜졌습니다. 군사정권이 페론의 자취를 말살하기 위해 이후 국경일에서 삭제했지만 지금도 이날은 아르헨티나 민중들과 에바와 페론을 기억하는 페론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념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에바와 페론은 바로 이 10월에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페론은 곧 바로 이듬해인 1946년 2월 24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에바는 배우라는 직업을 정리하고 이제 페론의 정치적 동지이자 대통령 후보의 부인으로 정치일선에 등장합니다.
페론은 기존 정당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선거에 임합니나. 페론 부부와 그 지지자들은 자신들을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스페인어로 셔츠, 정장을 입지 않은 사람)라고 불렀습니다. 가난하고 기본적인 인권조차 누리지 못하던 민중들이 지주와 중산층 사람들처럼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는 것이 아니라 소매를 걷어 붙인 옷을 입고 일하는 모습을 상징화한 말이었습니다.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악과 선, 적과 동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부패한 정치와 새 정치 등의 선동을 통해 이분화시켜 나갔습니다.
페론은 1946년 2월 24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5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던 에바와 페론은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던 팔레르모 지역에 위치한, 방이 283개나 되는 대통령궁으로 이사했습니다. 페론부부는 그들의 최대의 적이었던 상류계급의 거리 한복판으로 그렇게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들이 적으로, 부패한 집단으로 규정했던 바로 그들과의 한판 싸움이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을 위해 에바와 페론이 쓸 수 있는 무기는 단 하나 민중의 힘이었습니다.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은 2차대전후 맞이한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호황을 기반으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아르헨티나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구조개혁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페론은 자립경제, 공업발전을 통한 산업화, 사회개혁을 통한 사회정의의 실현 등을 새 정부의 핵심 정책방향으로 설정하였습니다. 페론은 농업과 축산업에 의존하던 경제의 체질을 바꿔 공업화의 시동을 걸어 경제자립의 토대를 개척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연장선에서 페론은 외국인 소유의 철도, 전화회사 등을 국유화 하였으며, 1947년에는 모든 외채를 청산하였습니다. 또한 자립경제를 위해 내수진작을 위한 경제, 사회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페론은 노동입법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소득증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공공사업의 확대, 교육개혁,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와 지위 개선, 여성의 공무 담임권 보장, 친권과 혼인권에서의 남녀평등의 헌법제정,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등이 이 때 이루어진 사회개혁의 내용들이었습니다. 이른바 페론주의의 등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페론의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에바 페론이었습니다. 에바 페론은 페론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새로운 아르헨티나를 위한 정치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페론은 단순히 대통령의 부인에 머문 것이 아니라 페론을 보좌하는 최고의 참모역할을 자임하였던 것입니다. 에바 페론의 가장 큰 역할은 페론을 대통령에 오르게 한 가난한 대중, 즉 데스카미사도를 페론의 지지기반으로 공고히 한 일이었습니다.
에바는 페론이 국가원수로서 자본가를 만나고, 정치가를 만나고, 외교업무를 볼 때 페론이 다할 수 없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연대를 위한 사업에 전념하였습니다. 에바는 먼저 페론정부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에바는 자신의 집무실을 노동부 내에 마련하고 노동문제를 직접 챙겨 나갔습니다. 노동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각종 사업들을 추진하였고 노동자의 고충처리를 직접 처리하였습니다. 에바는 수시로 공장을 방문하여 현장 노동자들과 담소하고 집회에 참석하여 선동적인 연설을 쏟아 냈습니다.
“여러분은 노동복지부 장관 시절부터 페론 장군께서 모든 노동계급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투쟁해 왔으며 지금도 매일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페론 장군의 가장 보잘 것 없는 협력자로서 노동계급의 깃발을 높이 드는 투쟁에 참여해 왔습니다......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주권국가로 변모시켰고 노동자들을 행복과 기쁨 속에 살게 했습니다.”
에바는 관료적인 정부의 행정절차를 무시하고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대중의 실질적인 고충들을 즉각적으로 처리해 주었습니다. 누군가 아이가 아프다고 찾아 오면 아이를 즉각 병원에 입원시켜 주었고 어느 가족이 집이 없어 노숙생활을 한다고 하면 즉시 집을 마련해 주는 것과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에바는 크리스마스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이다 한 병과 사탕 몇 개, 그리고 페론부부의 사진이 든 카드를 담은 선물상자를 나누어 주는 것을 연례행사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에바는 수시로 공장을 방문하여 현장 노동자들과 담소하고 집회에 참석하여 선동적인 연설을 쏟아 냈습니다.
에바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보험 제정을 추진했고 병원, 학교, 고아원과 양로원의 건립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1948년에 설립된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사회후원재단은 이런 사업들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기구였습니다. 에바는 종래 사회부유층의 부인들로 구성된 자선단체가 전통적으로 대통령의 부인이 이 단체의 명예회장을 맡았던 전례를 무시하고 자신을 명예회장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격분했습니다. 에바는 기존의 부유층 중심의 자선단체에 대한 정부보조를 중단함으로서 이들 단체들을 사실상 해산시키고 자신이 추진하는 사회복지사업을 책임질 조직으로 이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 재단은 정부의 지원과 노동자들의 지원(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결의에 따라 1년치 임금 중 2일분의 임금을 의무적으로 기부했으므로 순전하게 자발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압력에 못이겨 출연한 기업들의 기부금으로 아르헨티나 최대의 복지재단이 되었습니다. 이 재단이 에바가 살아서 활동하던 4년 동안 설립한 학교는 1,000개에 이르렀고 병원은 62개나 되었습니다(페론 집권전에 아르헨티나 전체 병원숫자는 57개에 불과했으나 에바의 이런 노력으로 병원수는 119개로 늘어났습니다). 또한 에바는 도시 빈민가나 소외된 농촌지역의 진료소에서 일할 간호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간호사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에바 페론은 사회소외계층의 사회적 권리신장과 사회복지를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했습니다. 미혼모와 노인를 위한 주거시설과 휴양시설을 건립했고 자신이 처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올라 왔던 가난의 고통을 기억하며 대도시에 갓 올라온 어린 소녀들을 위한 숙소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병원기차를 운영하면서 전국의 소외계층을 상대로 한 무료진료 사업도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에바의 정치활동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여성에 대한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일이었습니다. “페론 정권에서의 여성의 지위 변화는 인류가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혁명속의 혁명이었다.”고 할 만큼 에바가 이룩한 일들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에바는 여성의 임금을 남성과 동등하게 맞추고 여성의 임금을 인상하는 법안제정을 추진했고 여성의 인권을 획기적으로 신장시킨 가족법을 새로 만드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높이기 위하여 여성에게 제한을 두었던 공직도 전면 문호를 개방하여 공무담임권 보장 입법을 제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에바는 여성이 한 사회의 동등한 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권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여성의 정치참여를 위한 여성 참정권 보장 입법 제정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에바의 이런 노력은 1947년 여성의 투표권을 비롯한 여성 참정권 입법이 제정됨에 따라 결실을 맺게 되었고 이는 아르헨티나 여성의 획기적인 권리신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에바는 이를 바탕으로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당하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의 여성들은 처음으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한 1951년의 선거에서 29명의 국회의원(상원 6, 하원 23)을 비롯해 다수의 지방의회 의원들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에바는 대통령의 부인으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에바는 페론정부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으며 노동자와 빈민, 여성들의 지지기반을 통해 페론주의를 실현해 가는 대중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에바는 페론의 참모들이 우려할 정도의 대중적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자애로운 국모, 거룩한 성녀로 추앙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다른 대통령의 아내들처럼 지낼 수 있었겠지요. 그건 단순하고 기분 좋은 역할이에요. 국가 행사 때 잘 차려 입고 나와서 인사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저 대통령의 배우자만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에바에 대한 수많은 찬사가 이어졌고 대중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냈습니다. 에바는 ‘노동자들의 기수’, ‘페론의 방패’, ‘데스카미사도의 전권대사’로 불리워졌고 ‘페론과 대중을 이어주는 사랑의 교량’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에바는 이 모든 활동을 페론에 대한 지지로 모아 나갔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페론주의의 전도사로 규정했고 그 역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페론과 에바의 전면적인 사회개혁 프로그램은 아르헨티나를 새로운 국가체제로 바꾸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2차대전후 아르헨티나가 누린 경제성장의 기반위에서 가능했고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로 강한 추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페론과 에바가 밀고 간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회, 경제전반에 걸친 개혁프로그램, 즉 페론주의는 자체적으로도 적지 않은 모순과 한계를 안고 있었고 또 자본과 기득권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많은 문제점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페론주의는 세계경제의 여건변화와 아르헨티나 경제의 내부모순에 의해 도전을 받아야 했습니다. 페론이 펼친 공업발전을 통한 자립경제의 달성이라는 과제는 아르헨티나가 집중한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 우선정책으로 인하여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자립경제를 위해 수입대체산업으로 육성한 소비재위주의 경공업은 필연적으로 자본재 수입의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국내의 공업화는 중공업 부문의 취약으로 끊임없이 무역수지의 적자를 초래하는 자본재 수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이는 1947년에 외채의 전면상환을 무색하게 한 채 다시 외환 사정을 악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페론주의의 사회구조 개혁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뚜렷한 전략과 방향을 갖는 이념에 기반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회복지의 확충을 통해 아르헨티나 사회를 한 단계 높은 사회로 진전시키고 노동자, 농민을 배려하는 정책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복지국가의 전형을 창출하고자 했던 페론주의는 그 정책의 즉자성 때문에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재정의 취약은 필연적인 일이었지만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노동자, 민중을 포함하는 사회전체가 고통스러운 개혁을 공유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 보다는 단기적이고 선정적인 시혜적 복지에 익숙해져 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사회전체의 복지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고 당장의 사탕발림에 더 열광하고 더 분노하는 현상을 초래했습니다.
페론과 에바는 이런 구조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자신들이 언제나 민중의 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더욱 선동적인 복지정책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정책의 누적은 사회적 부담을 증가시킴은 물론 아르헨티나의 정치문화와 사회문화를 왜곡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제적인 상황의 변화와 사회현상은 보수층과 자본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고 페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페론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우려를 낳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려를 더욱 심화시킨 데는 페론과 에바의 감성적이고 선동적인 정치적 행동들도 한 몫을 했습니다.
페론은 대중의 지지를 발판으로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습니다. 페론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비판을 기득권세력의 저항이라고 일축하고 자신의 정책수행에 장애가 되는 민주적 질서, 법치에 근거한 정치를 뛰어 넘고자 했습니다. 페론은 일국의 대통령이었지만 한 국가의 제도와 법을 거추장스럽게 여겼습니다. 페론은 언제나 대중에게 호소하고 선동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나 비판을 뛰어 넘고자 했습니다. 에바나 페론은 언제나 라디오라는 미디어를 십분 활용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페론은 대통령이 쓰는 언어가 아니라 민중들의 용어로, 혹은 상소리를 통해 대중과의 친밀감을 높여 갔습니다. 페론은 모든 관계를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가두고 반대자들에 대해서는 체포와 고문 등 폭력적인 정치적 탄압을 행사했습니다. 언론에 대한 통제, 노동운동 지도자에 대한 숙청과 노동운동의 자율성 부정 등이 이어졌습니다. 급기야 페론은 재선을 위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면서 선거방식을 직선으로 바꾸는 헌법을 개정하였습니다. 이는 대중의 정치적 기반을 이용하여 집권연장을 기도하는 정치적 욕심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일 이이었습니다. 정치권과 행정부에는 페론과 에바의 친인척들로 채워졌지만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사치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에바 또한 그의 민중에 대한 끝없는 봉사와 애정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는 행동으로 비판의 도마위에 올랐습니다. 에바의 후원재단의 기금이 사실상 정치적 권력을 통해 강탈된 자금으로 조성되었다는 불만이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자본가들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압력에 의해 출연한 것이었던 것인 만큼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의 2일치 임금도 사실은 강제성을 띤 것이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이 자금이 페론의 정치적 비자금과 에바의 사사로운 소비에 쓰이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000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기금을 보유한 재단이 어떤 회계장부도 구비하지 않았고 오로지 에바에 의해서만 자금이 지출되었으니 분명 재정집행의 투명성을 의심받을 만 했습니다. 더구나 에바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값비싼 보석들도 이런 의심을 부채질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바재단의 놀라운 사회복지 활동에도 불구하고 에바는 부정하고 부패하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에바는 이런 비판을 일축했지만 에바의 공금유용의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습니다.
“자선 활동 비용을 기록하는 것은 우스운 것이에요. 나는 이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뿐이에요. 그걸 세고 앉아 있느라 자선활동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에바의 사치스러운 보석과 옷들은 확실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녀라는 호칭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에바는 유럽순방과정에서 그 화려한 패션과 미모, 값비싼 보석으로 유럽사회를 놀라게 하였고 에바 패션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내의 부자들과 자본가들은 이런 에바의 행보를 보면서 가난한 이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호사와 권력을 향유하는 악녀라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에바는 또한 단순히 사회복지 사업의 책임자로서가 아니라 정부내의 사실상의 2인자로서 행세하면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에바는 자신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거나 자신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각료나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쫓아 내거나 뒷조사를 통해 부패혐의를 씌워 감옥으로 보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에바의 이런 행동은 페론과 페론주의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점차적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행동 때문에 페론정부의 다양한 사회복지 정책이 사실은 정치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활동일 뿐, 진실로 아르헨티나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진정성은 없다는 비판들이 에바와 페론의 반대파로부터 계속되었습니다. 에바와 페론의 페론주의는 사회구조에 대한 본질적 개혁이라는 프로그램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반민주주의적 대중선동을 통해 개인적인 치부와 권력유지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에바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녀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추한 악녀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런 비판 때문에 후에 에바를 두고 ‘거룩한 악녀, 천한 성녀’라는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평가가 따라 다니게 됩니다.
에바의 가장 중요한 업적중의 하나였던 여성정책에 대한 평가도 이런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에바가 펼친 여성운동이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역사는 에바의 여성정책과 여성운동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에바는 여성운동 또한 페론주의의 한 방편이자 권력기반의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에바는 여성운동의 확장과 여성인권의 신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 성과를 남편 후안 페론에 대한 충성심으로 귀결시킴으로서 에바의 머릿속에 있는 여성의 상이 가부장적 권위에 복종하는 여성상에 불과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에바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 남자는 지성을, 우리 여성은 감성을 투쟁에 바쳐야 합니다. 지성과 감성을 모두 합하여 정의롭고 행복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온 힘을 바치고 있는 우리의 페론 장군을 우리는 충심으로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여성들은 남녀 모두 뭉쳐야 하기 때문에 남자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안팎의 도전과 페론주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에바와 페론의 지지는 높아만 갔습니다. 에바는 자신과 자신의 남편을 향한 비판이 있을 때마다 더욱 단호하게 그들을 민중의 적이라 규정하면서 싸워 나갔고 그만큼 더욱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에바는 실로 초인적인 열정으로 일을 해나갔습니다. 하루에 1만 2천통씩 날아오는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과 소외된 이들의 편지에 답장을 해야 했습니다.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업무에 변변한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었지만 에바는 민중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휴식을 권하는 참모의 말에 에바는 자신의 가장 큰 적은 반대파도 아니고 자신의 건강도 아니고 오로지 시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안 보이세요? 내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일은 너무 중요한 거예요. 나에게는 시간이 최악의 적이에요.”
이런 일련의 시간들 속에서 에바와 페론은 이제 한 사람의 자연인이나 대통령과 영부인이라는 직책을 넘어서 대중적 숭배의 대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에바의 애칭인 에비타라는 이름은 아르헨티나 가스공사의 이름이 되었고 새로 개통된 지하철의 역이름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새로 발견된 별에 에비타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페론부부를 위한 글짓기 숙제와 행사가 줄을 이었고 에바의 자서전인 <나의 삶의 이유>는 스페인어 교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에바를 위한 노래들이 만들어졌고 그중 <에바 페론의 행진>과 <지도자 에비타>라는 노래는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제 1회 범아메리카 경기대회(Pan-America Games)의 개막식에서 연주되기도 하였습니다. 페론주의는 이처럼 민주적 리더쉽이 아닌 카리스마를 갖춘 대중적 리더쉽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이는 곧 바로 개인숭배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1951년 11월 선거에서 페론은 67%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하였습니다.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은 상원의원 30석, 14개의 주지사직을 모두 석권했으며 하원 149석 중 135석을 확보함으로서 아르헨티나 정치를 거의 일당구조로 재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압도적 승리는 민중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함께 새로 투표권을 얻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페론은 온갖 비판과 페론주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임기를 통해 대중을 사로잡으며 승리했고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에바는 그가 그렇게 가까이 있고자 했던 민중들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없었습니다.
페론의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 에바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당초 에바는 페론과 짝을 이루어 부통령 출마를 검토했으나 1951년 8월 에바는 병으로 쓰러지고 치유의 가능성이 높지 않은 척수백혈병과 자궁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식지 않는 열정으로 민중들의 삶을 책임져 왔던 에바 페론은 그렇게 쓰러졌고 본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에바는 병상에서 투표했고, 승리의 그 날, 암으로 썩어가는 육신의 고통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페론의 재선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에바가 공식적으로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2년 6월 4일, 페론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였습니다. 아픈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에바는 아르헨티나 민중앞에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발목까지 덮는 밍크코트를 걸치고 페론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할 때 에바는 시종일관 민중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었지만 그의 육신은 이미 견디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보지 못하도록 모피 코트 속에 감춰 둔 받침대가 그의 몸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마치 에바가 아르헨티나의 민중과 페론을 힘겹게 지켜 온 것처럼 그렇게 에바는 이제 자신을 키켜주는 받침대에 기대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르헨티나와 아르헨티나 민중들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에바는 병원에서 아르헨티나 민중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병과 고통이 저를 신께 가까이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일이 부당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후안 페론과 결혼했을 때, 얼마든지 상류사회의 잘못된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저에게 민중의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가 그 길을 택했기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분들로부터, 어느 누구보다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이 고통에서 조금 쉬게 해달라고 신께 부탁드립니다.”
정부는 에바의 병이 깊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소식은 아르헨티나 전역을 슬픔과 비탄에 젖도록 만들었습니다.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매일 에바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수많은 노동자, 농민, 여성, 가난하고 빈곤한 사람들이 매일 대통령궁 앞에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에바는 오늘, 1952년 7월 26일, 숨을 거두고 맙니다. 에바의 나이 겨우 33세였습니다.
에바는 신화로 남았습니다. 아르헨티나 민중의 눈물은 그날 비가 되어 아르헨티나 전체를 적셨습니다. 에바에게 바치는 추모의 꽃들이 빗속에서 빛나며 아르헨티나 전체를 꽃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에바의 장례는 13일간 지속되었고 수백만의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보존처리된 에바의 시신을 보기 위해 밤 낮 없이 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에바의 시신은 에바가 묻힐 기념묘지가 건설되기 전까지 그가 열정을 불태웠던 노동총동맹 건물내에 임시로 안치되었습니다. 에바에 대한 많은 신화들이 지어졌고 에바는 성녀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에바를 위한 기도문이 암송되었고, 에바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추앙되었습니다. 민중들은 가톨릭 교회에 에바를 성인으로 추앙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에바는 죽어서도 그렇게 아르헨티나 민중에게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았으며 페론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형성했던 페론과 페론주의는 마치 에바가 쓰러지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공교롭게도 에바가 쓰러지고 나면서부터 위기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계속적으로 페론의 정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혀 가던 아르헨티나의 보수세력은 때마침 덮쳐 온 경제상황 악화를 빌미로 페론정부에 대한 공격을 전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후 아르헨티나 경제호황을 이끌던 농축산물 수출이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국의 농축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미·영 등의 수입제한 조치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1951년과 1952년의 가뭄은 대초원의 농축산물 생산에 차질을 빗게 하였고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아직 선진국들과 경쟁할 만한 단계에 오르지 못한 아르헨티나의 공업 수준과 경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 정책은 더욱 큰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페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공업 중심으로 공업화 전략을 전환하고자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혼선은 더욱 커지고 자본재 수입의 증가만 늘려 가뜩이나 악화되어 가던 외환 사정은 더욱 심각해지게 되었습니다. 페론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외국인투자유치 전략을 주요한 전략으로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의 고용과 근로조건, 복지에 대한 위협요인이 되었습니다.
에바가 암으로 쓰러진 시기는 안팎으로 페론정부가 심각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에바는 그들이 세운 가난한 자들의 나라 아르헨티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병상에서 지켜 보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노동자, 민중은 에바와 페론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놓지 않았지만 반대파들의 공세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에바가 죽고 난 후, 페론정부는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정치적 입지도 대중적 지지도 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보수세력과 자본은 페론이 농축산업 경제에서 실패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의 토대를 확고하게 다지기도 전에 권력에 대한 야욕 때문에 대중에게 과도한 수준의 복지혜택을 남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아르헨티나가 겪고 있는 경제파탄의 원인이라면서 페론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투쟁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이런 선동은 그동안의 경제성장과 복지정책으로 어느 나라보다도 넓게 형성되었던 중산층을 자극하여 페론정부에 등을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내부적으로 정치적 공세에 흔들리던 페론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 경제상황으로 더욱 큰 어려움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수출감소로 국가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그동안 페론정부가 추진했던 사회복지정책은 타격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은 경제위기를 이유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자 했고 투자를 회피하는 사실상의 자본파업은 사회적 고용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페론이 추진한 중공업 전환 전략은 외자유치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고 외자유치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담보로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페론정부에 대한 지지와 애정을 갖고 있었지만 점차 죄어오는 생활의 압박으로 페론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론정부는 즉자적인 복지정책에 길들여진 대중에게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페론이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취한 정책들은 오히려 페론정부의 입지를 더욱 좁혀 놓고 있었습니다. 페론은 더욱 강경한 정책을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사회통제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사회적인 갈등과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페론은 여전히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권력기반을 다지고자 하였으나 그동안 페론 정부를 지지했던 군부와 가톨릭이 돌아섬으로써 페론은 점차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페론이 추진한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하는 입법은 가톨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페론은 자신에 대해 반대하는 가톨릭의 신부들을 체포했고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금지시켰습니다. 가톨릭은 10만 신도의 반대집회로 맞불을 놓았습니다. 페론은 다시 민중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악이며 아르헨티나의 가톨릭은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비난했습니다. 급기야 페론과 그의 참모들은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맙니다. 아르헨티나는 페론지지와 페론반대라는 엄청난 사회적 소요가 거듭되었습니다. 결국 페론은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아르헨티나 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결단이라는 명분을 내건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1955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에바와 페론의 영광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에바와 페론의 정치, 페론주의는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자 사회전반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는 페론주의자인가 아닌가가 정치를 구분하는 1차적인 평가잣대가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문제에 대한 접근은 언제나 에바와 페론시대를 기준으로 이루어졌으며 아르헨티나의 정치지형은 에바와 페론의 상속자와 그 반대자들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르헨티나의 정치지형이 반복될수록 에바는 한편에서는 권력의 화신으로 사치와 향락에 물든 추한 악녀가 되어갔고 한편에서는 아르헨티나 민중을 보살피는 성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에바와 페론의 정치, 페론주의에 대한 평가와 정리를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페론주의에 대한 평가와 정리로 넘어가기 전에, 페론의 실각 이후 그 반대파들이 에바와 페론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벌였던 싸움들을 살펴 볼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에바와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정치와 사회전반에, 그리고 아르헨티나 민중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반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군사정권은 민중들에게 반에바, 반페론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현재의 상황, 즉 경제파탄의 상황이 모두 에바와 페론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점을 모든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선동해 나갔습니다. 실업도, 임금삭감도 그들 때문이었고, 군부의 통제와 인권탄압도 사실은 페론주의의 유산이 남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강변하였습니다. 군사정권은 에바의 보석과 모피코트를 비롯한 사치품을 공개 전시하고 이 모든 것이 민중의 피를 짜낸 결과물임을 며칠을 두고 선전해 나갔습니다. 에바의 동상과 기념물을 없앴고 에바와 페론의 이름이 붙은 것이면 무엇이든 그 이름을 지웠습니다. 에바와 페론에 관한 책, 사진, 각종 기록을 공공장소에 모두 모아 불을 지르는 행사를 통해 그들이 남긴 모든 유,무형의 유산을 지워 버렸습니다.
이 에바와 페론의 흔적지우기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에바의 시신처리문제였습니다. 에바의 시신이 존재하는 한 에바에 대한 추모와 숭배를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군사정권은 화장하거나 수장하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중들의 전면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킬 것이 뻔했으므로 차마 시행할 수 없는 방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에바의 시신을 예정대로 완공될 기념묘역에 안치한다면 이는 아르헨티나 정국에 새로운 돌발변수가 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에바의 시신은 군사정권의 안정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국지로 말하면 그야말로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쫓는 형국이었습니다.
1955년 11월, 노동총동맹 건물에 안치되었던 에바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군사정부는 모르는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페론주의자들이 빼돌린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에바의 시신 실종은 아르헨티나 전역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민중들은 군사정부의 짓이라고 추측도 하고 확신도 했지만 어떤 사실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15년이 흐른 1970년, 페론주의 게릴라 단체인 몬토네로스(Montonerods)는 1955년 당시 쿠데타를 통해 페론을 내쫓고 권좌를 차지했던 페드로 아람부루 장군을 납치하여 에바시신의 소재를 추궁하였으나 실패하자 끝내 살해하였습니다. 에바의 시신을 놓고 다시 아르헨티나가 혼란에 빠지자 군부는 16년만인 1971년 에바의 시신이 이탈리아 밀라노의 작은 공동묘지에 묻혀 있음을 밝혔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사망한 이탈리아 여인의 묘에서 미이라 상태의 에바의 시신이 발굴되었습니다. 1971년 9월, 군사정부는 에바의 시신을 당시 스페인에 망명중이던 페론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참으로 엽기적인 사건이었지만 이는 한편으로 에바가 얼마나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에게 위협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페론 이후 시대를 넘으며 아르헨티나의 정권을 잡은 군부세력들, 혹은 반대세력들은 에바에 대한 민중의 존경심과 향수를 제거하지 않고는, 페론과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를 망쳤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는, 정치적 기반도 민중의 지지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페론의 실각 이후 취해진 모든 정치적 행위와 논쟁들은 아르헨티나의 정치를 페론주의와 반페론주의로 양분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논쟁은 페론주의가 진정 가난한 자들의 나라,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라는 이상을 지향하는 정치이념이었는지, 아니면 대중영합적인 기회주의 정치논리를 포장하여 집권과 개인적인 욕심에 골몰했던 단순하고 감성적인 선동정치였는지를 놓고 벌어졌습니다. 페론주의의 본질이 진짜 무엇인지 페론주의에 대한 주요한 평가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페론주의는 지향하는 사회체제와 그 사회의 성원들의 관계, 혹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사유를 포함하는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페론주의는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연민을 품고 연대를 실현하는 사회를 지향했지만 이를 이루어 나갈 총체적인 사회변혁의 이념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페론주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의 기술적인 양태의 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핵심적인 가치로 제시한 민중이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정하게 그 진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당시 부자들이 주도하던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소외된 계층을 묶어 세우기 위한 정치적 수사나 선동적인 정치행위의 성격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정치를 위한 구체적인 참여민주주의의 프로그램이나 민중주도의 정치체제, 사회체제를 지향하는 전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한 페론주의 사회복지 정책으로 규정되는 노동자, 민중을 위한 사회건설도 그 이념적 지향이 민중주도의 경제정책이나 생산수단의 사회적통제라는 기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시혜적이며 대증요법에 입각한 단기적인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이념적 규정성은 부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페론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이념으로 규정하기에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설사 일정하게 이념이나 정책이 있었다 해도 매우 이중적이고 가변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페론주의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표현인 국가 사회주의도 그런 점에서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외국자본을 배제하고 산업국유화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정합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런 반자본주의적 경향성의 대칭에 자본주의 시장질서와 사적소유를 철저하게 존중함으로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분명한 반대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실제 페론은 집권 내내 공산주의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가지고 끝까지 경계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내세우는 좌파 노동운동을 해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페론주의는 일관된 방향을 갖는 정치, 사회적 이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상황과 대중추수, 그리고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변하는 기회주의적이고 임기응변적인 정치논리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정책기조는 여성문제, 노동조합에 대한 정책기조, 공업화 정책, 민주주의의 문제 등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페론주의가 매우 모호하고도 이중적인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것은 이후 아르헨티나에 등장한 페론주의 정당, 단체들이 모두 자신들이 해석한 페론주의를 기반으로 다양한 이념적 편차, 그것도 극과 극의 이념적 편차를 보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반공동맹(AAA)과 같은 우익단체도, 몬토네로스 같은 좌익 게릴라 세력도 페론주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셋째, 페론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정치적 행동양식에 가깝다고 볼 때, 페론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와 단순하고 감성적인 대중선동 정치를 들 수 있습니다. 페론주의는 기존의 정치체제가 대중을 소외시키고 일부 특권층에 좌우되고 있다는 선동을 통해 대중의 소외에 대한 분노를 결집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선동은 민주주의체제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한계, 즉 대의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한계로 인하여 어느 정치체제, 어느 사회체제에서도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페론주의는 에바와 페론만이 그런 대중의 아픔을 나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대중에게 강조하면서 어느덧 대중의 우상이자 영웅이 됩니다. 이를 통해 페론주의는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고 강화해 나가면서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나 정치세력을 민중의 적, 타락하고 부도덕한 집단, 사회개혁을 반대하는 수구반동세력으로 규정하면서 통치의 한 방식으로 사회집단을 적과 동지로 이분화 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행동양식은 한편에서는 열광적 지지를 얻게 하였지만 한편에서는 극도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는 사회개혁의 과정에서 사회통합을 지향하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의 악순환을 반복하였습니다.
넷째, 페론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우상화된 지도자를 중심으로 지탱되는 정치체제라는 점입니다. 출발은 민중이 정치의 주인되는 사회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페론주의의 대중선동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대중은 지도자에 의해 대상화되고 지도자는 대중의 우상이 됨으로서 오히려 민주주의가 후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구도가 일단 형성되면서 페론과 에바는 모든 비판과 토론이 수용되어야 하는 민주주의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민중을 위한 정치에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으로 빠져 버리고 이리하여 마침내는 독재정치의 형태를 띠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는 민중을 위한 정치가 사실은 에바와 페론이 정치적으로 권력과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민중을 이용한 정치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다섯 째, 이런 정치로 변질되어 감으로써 페론주의가 추구한 노동자, 민중을 위한 사회개혁과 사회복지 정책은 언제나 즉각적이고 시혜적인 정책의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사회개혁의 중심이 되어야 할 민중에게 체제개혁을 위해 고통스러운 책임을 강조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페론주의의 기반을 확보해야 하는 당면한 정치적 필요 때문에 대중에게는 언제나 무한정의 복지를 보장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책의 반복적 시행은 결국 국가의 부담을 일정부분 증가시킨 측면이 있었고 사회통합과 장기적인 균형성장을 돌아 볼 여력을 뺏어가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은 페론의 정적들이 페론정부 이후 페론시대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페론주의가 갖고 있었던 분명한 한계이자 특징이었습니다. 문제는 페론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고 이런 요소들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페론주의가 이후 아르헨티나 사회전반에 걸쳐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했다고 보는 과도한 비판입니다. 페론주의가 국가의 미래와 민중을 위한 사회체제의 실현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권력만을 위해 대중과 영합한 기회주의 정치, 즉 포퓰리즘의 전형이었다고 보는 견해 또한 지극히 편파적이고 보수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페론주의가 갖고 있던 민중에 대한 연민과 연대, 특권층의 이해만을 위한 정치의 탈각, 대중과의 직접 접촉을 통한 대중정치의 부활과 같은 가치와 정치행동 양식은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의 평가가 분명히 필요한 지점입니다. 페론주의가 일방적인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그 긍정적인 정책방향과 정치형태와 무관하게 페론의 실각 이후 오랜 기간 아르헨티나가 반페론주의를 내세운 군사정권체제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울러 페론주의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던 좌우양쪽(아르헨티나 내부에서나 세계적으로 냉전체제를 유지하던 자본진영과 공산진영에서나)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매도하고 비판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할 것입니다.
군사쿠데타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는 오랜 기간동안(1973년까지) 군사정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끝없는 경제불황과 사회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이런 모든 부정적인 사회현상에 대해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원인으로 페론주의를 꼽았습니다. 군사정권은 이러한 측면을 끊임없이 확대하고 부각시켰으며 다양한 논리를 빌어 재생산하는 과정을 밟아 나갔습니다. 실제 페론 이후 현실에 존재하는 아르헨티나의 몰락과 비참한 실상은 이런 군사정권의 평가에 일정한 설득력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런 반페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페론주의라고 이름 붙여졌던 정치체제가 종언을 고한 1955년으로부터 46년이 흐른 2001년에 벌어진 아르헨티나의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마저도 페론과 에바 때문이라는 논리로 계속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2010년 현재까지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의 비극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이제 아주 상식적인 평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자세히 짚어 보면 상당한 부분에서 과도할 뿐만 아니라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페론이 집권했던 시기는 2차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경제성장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경제성장에 기반하여 수립된 경제자립과 외채청산, 공업화 전략,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의 기조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업화전략에서 경공업 중심의 전략의 실패를 지적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비슷한 경제정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농.축산업을 경제기반으로 하는 아르헨티나가 초기 공업화 전략으로 경공업 중심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결과만을 놓고 오류로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후 세계농축산물 시장의 변화 때문에 경제전반에 충격이 오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활력이 현저히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를 한 국가의 경제정책이 수시로 겪게 되는 정책적 실책이상으로 침소봉대하는 것도 과도하다 할 것입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사회복지를 확대하지 않고도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페론주의에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온당하지는 못한 일로 보입니다. 실제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페론의 실각 이후 페론과는 전혀 반대의 정치노선, 전혀 다른 경제정책을 추진한 군사정부의 무능으로부터 왔던 측면이 컸습니다. 경제회복을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시도한 외자유치와 친미정책은 국내경제기반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고 외국자본의 치고 빠지기는 민중에 대한 수탈과 자립경제의 붕괴, 외환사정의 악화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여기에다 어설프게 페론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추진한 대중영합적인 정책들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론주의가 최악의 정치형태라는 평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결국 민중을 위한 정치, 민중을 위한 사회복지정책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페론주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따지고 보면 기득권의 희생을 가져 온 복지정책에 대한 보수세력들의 비판적인 평가라 할 것입니다. 즉 과도한 복지정책이 경제위기를 빚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이 정도의 복지정책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르헨티나의 보수세력이 견강부회식으로 갖다 붙인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페론주의의 보호무역주의, 반시장주의로부터 위협을 느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자본주의 진영, 그리고 공산주의의 가치를 위협하는 페론주의의 정책방향에 대해 경계하던 공산진영의 평가가 더해지면서 페론주의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 두 진영이 사실상 세계의 전부였음을 감안하면 오늘 세계 모든 나라에서 페론주의가 왜 최고로 저급한 정치논리로 규정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페론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에바와 페론의 정치행태나 부도덕하고 사치스러운 사생활도 페론 실각 이후 오랜 군사정권의 에바와 페론 지우기를 생각하면 과도하게 포장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페론의 망명 이후 군사정권이 발표한 페론의 부정축재와 국부유출 사례 등은 후에 과장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페론과 에바의 권력을 이용한 정치통제와 언론통제도 따지고 보면 개혁을 위해 기득권과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것임을 고려하면 이 부분에 대한 지나친 과장은 실각 이후 보수세력이 만들어낸 흠집내기의 냄새가 강하게 납니다.
또한 대중에 대한 선동적 정치라는 비판도 현대정치가 대중획득을 전제로 한 선거제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독 페론의 대중정치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부당한 평가입니다. 현대정치의 모든 세력들이 대중과 서민중심을 외치며 그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정책과 행보를 일삼고 있는 오늘의 정치에서, 오늘의 민주주의에서,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고 노력했던 에바와 페론의 정치행위들을 권력을 잡으려는 술수로만 매도하는 것은 페론주의에만 들이대는 가혹한 잣대입니다. 현대정치에서 이런 정치행위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선이고 어느 정도를 넘어야 악이고 포풀리즘인지는 그 한계를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가톨릭과의 불화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매우 진보적인 여성입법을 둘러 싼 충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작정 종교를 탄압했다는 평가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50년대의 가톨릭이 기득권의 이해에 기반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아르헨티나의 경우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의 지지세력이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가톨릭과의 충돌 때문에 페론주의를 폄하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지적했듯이 페론주의가 대중영합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이중적일 뿐만 아니라 뚜렷한 정치적 이념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후퇴, 대중추수, 개인숭배, 즉물적인 정책추진 등도 분명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페론주의가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와 사회에 미친 부정적 측면 또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에바와 페론, 그리고 페론주의는 분명하게 긍정적 측면들을 갖고 있습니다.
에바와 페론은 민중을 정치의 주인이자 참여자로서 등장시킴으로서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페론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는 대중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라는 과제를 부여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민중을 정치의 한 축으로 등장하게 함으로서 기존의 엘리트 중심의 정치체제에 충격을 가져다 주었던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는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 체제에 새로운 고민을 던져 주었습니다. 즉 현대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정착한 대의민주주의가 이후 지향해야 할 민주적 원칙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의 특권층 중심의 과두정치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에서 민중을 고려하지 않는 정치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전례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페론주의가 민중을 기반으로 하지만 실제는 민중을 소외시키는 선동 정치로 추락해 갔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초기 페론주의가 지향한 가치는 충분히 평가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페론주의가 평가 받아야 할 지점은 민중을 위한 사회연대와 사회복지를 확장시켰다는 점일 것입니다.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점이지만 에바와 페론은 민중의 생존과 사회평등, 사회정의를 위해 기득권과 타협하지 않는 과감성과 헌신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현대정치에서 이미 구조화된 사회 불평등의 구조는 이데올로기와 사회의 전 영역에 걸친 기득권 세력의 헤게모니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과감하고도 단호한 공격, 대중적 기반의 형성,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창출 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에바와 페론은 오래된 아르헨티나의 지배구조와 사회체제에 대하여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는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런 개혁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국민소득은 페론의 집권기간 동안 200% 이상 증가했습니다. 사회복지제도 또한 서유럽의 복지국가 못지않은 수준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이런 사회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경제는 집권기간 동안 130% 성장했고 모든 외채를 상환하는 등 자립경제의 기반을 조성해 나갔습니다. 이런 통계들로 미루어 볼 때 복지정책이 아르헨티나를 망쳤다는 평가는 확실히 과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페론주의가 진정 가난한 자들의 나라,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라는 이상을 지향하는 정치이념이었는지, 아니면 대중영합적인 기회주의 정치논리를 포장하여 집권과 개인적인 욕심에 골몰했던 단순하고 감성적인 선동정치, 즉 포퓰리즘이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평가의 관점과 처해진 계급적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논쟁의 중심에는 민중을 향한 진정성이 있었느냐는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정치행위에서의 이런 저런 한계와 문제점은 현대정치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이므로 이런 정치적 행위만을 중심에 놓고 어떤 정치형태나 정치운동의 진정성은 간과하고 싸잡아서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성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인 실천의지와 정책의 내용으로 검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는 노무현의 진정성은 이후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보여 주었던 비정규직과 노동자에 대한 생각과 철학,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구체화한 비정규법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민중심의 경제를 이야기하며 시장통을 돌면서 영세 상인과 만나는 이명박의 진정성은 서민을 향한 그의 구체적 열정과 헌신, 그리고 서민중심의 경제정책의 실현여부에서 확인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에바와 페론이 민중의 복지와 사회정의가 구현되는 사회체제를 꿈꾸었던 진정성을 의심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지향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에바와 페론이 가졌던 민중에 대한 애정과 헌신, 그리고 이에 기반한 구체적인 실천은 분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페론주의를 민중을 이용한 권력지향과 국가와 사회에 대한 무책임한 대중영합의 정치만으로 폄하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페론주의가 현대정치가 규정하는 포퓰리즘에 해당하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해서 페론주의를 포퓰리즘의 원조이자 전형으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론주의가 가장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포퓰리즘의 원조이자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페론주의가 지향한 일정한 가치에 대하여 자본주의 진영과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진영이 일방적이고 비판적인 평가를 덧칠한 까닭일 것입니다. 이쯤에서 페론주의의 평가 잣대가 되고 있는 포퓰리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