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성 金容成(1894 ~ 1954)】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만세운동 주도"
1894년 9월 13일 경기도 진위군(振威郡, 현 평택시) 포승면(浦升面) 방림리(芳林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서당의 한문교사를 지냈다. 1919년 경기 진위군 오성면(梧城面) 학현리(鶴峴里, 현 안중읍)에 거주하였는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국내 각지에서 만세를 일으키는 것을 전해듣고 행동을 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3일 밤 오성면 학현리 옆 봉오산(鳳梧山) 정상에 올라 주민 12~13명과 함께 짚으로 봉화를 피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시위는 3월 31일 이래 진행되었던 진위군 만세운동의 정점을 찍은 것이었다. 3월 31일 북면(北面) 봉남리(鳳南里, 현 진위면)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평택(平澤)의 서탄면(西炭面)·송탄면(松炭面)·부용면(芙蓉面, 현 팽성읍)·병남면(丙南面, 현 평택동 일대)·고덕면(古德面)·청북면(靑北面) 등지에서 4월 3일까지 다양한 규모와 방식의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이 시위로 함께 만세시위를 한 주민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0일 이른바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고,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으로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은사령(恩赦令)이 내려지자, 4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