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프랑스 화가 앙리에트 브론(Henriette Browne; 소피 드 부트예; Sophie de Bouteiller, 1829~1901)의 1875년작 〈글쓰는 소녀와 애완용 금방울새(Une fille qui écrit et le chardonneret de compagnie)〉이다.
☞ 한국 말 글 발언 집필 내용 무시 묵살 무지 꼰대 도덕 정의 정확성 발언자 집필자 태도 즉감 감정 청중 독중 맹감 맹정 괴테 니체
☞ 인간 감각 감정 동물 흄 이성 정념 노예 신분 계급, 인간원, 동물원
아니나 다를까, 게으르고 비뚤린 죡변도 어차피 눈치를 거의 불비(不備)한 무자격 관종(☞ 참조)이므로 당연히,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권위자들의 명언에나 고견에 찰싹 빌붙어서라도 얄망궂은 소견을 다음과 같이 알량하게 은근슬쩍 흘려둘 수밖에 없으리라.
뭐, 하여튼, 스코틀랜드 철학자·역사학자·정치경제학자 데이빗(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1740년작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제2권: 정념론(감정론; Of the Passions)》에 “이성은(리성은; 理性은) 정념들의(情念들의; 감정들의) 노예이고 어차피 노예일 수밖에 없다(노예여야 한다)”고 글썼다.
독일 정치인·작가·과학자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Goethe, 1749~1832)의 비극시(悲劇詩) 《파우스트(Faust)》 제1부 〈마르테의 정원(Marthens Garten)〉에서 박사 파우스트는 “감정이 모든 것이다(Gefühl ist alles)”고 주장한다.
파우스트의 이런 주장에는 독일 고전문헌학자·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도 1890년작 《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 제9장 제1절에서 완전히 찬동한다. 그리고 니체는 일찍이 1878년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인간스러운, 너무나 인간스러운): 자유정신들에게 유익한 책(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Ein Buch fur freie Geister)》 제1권 제303절에도 “우리가 타인의 의견을 반박하는 까닭의 십중팔구는 기껏해야 의견을 표현하는 타인의 어투(語套; 말투; 글투)를 싫어한다는 것뿐이다”고 글썼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심리학과 명예교수 앨버트 메러비언(메라비언; Albert Mehrabian, 1939~)은 1971년판 저서 《묵전되는(默傳되는) 정보내용들(묵언되는 메시지들; Silent Messages)》에서 인간들(더 정확하게는, 피험자들) 사이에서 발언·표현되어 전달·소통되는 감정적·정서적 정보내용(메시지)의 속도, 분량, 강도(强度)를 결정짓는 주요한 세 변수의 양향력률(影響力率)들을 산출하여 요약한 이른바 메러비언의(메라비언의) 법칙이라고 별칭되는 “7푼-3할8푼-5할5푼 규칙(7퍼센트-38퍼센트-55퍼센트 룰; The 7%-38%-55% Rule)을 제시했다. 인간의 의사소통수단들에나 의사표현요소들에 포함되는 이 세 변수는 발언자·표현자(발언인·표현인; 發言人·表現人)의 언어(말; 글), 청각요인(聽覺要因: 목소리; 음성; 음색; 음량; 음질; 발음; 발언속도; 말투; 어투; 어조; 語調; 억양; 抑揚 따위), 시각요인(視覺要因: 외모; 용모; 옷차림; 입성; 행색; 표정; 안색; 낯빛; 눈빛; 체격; 자세; 손짓; 발짓; 몸짓; 인상; 장신구 따위)이다.
메러비언의(메라비언의) 법칙은 인간들 사이에서 언어는 단위시간당 감정적·정서적 메시지의 7%밖에 전달·소통시키지 못하는 반면에 청각은 38%를 전달·소통시킬 수 있고 시각은 무려 55%나 전달·소통시킬 수 있다고 알린다. 물론 이 법칙도 어차피 거의 언제나 언어로써 표현되므로 표현내용의 7푼만 전달·소통시킬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법칙의 7푼이나 신빙될 수 있다면, ‘발언자·표현자의 태도(態度: 청각요인+시각요인)가 시청자·관독자(視聽者·觀讀者; 시청인·관독인)의 감각과 감정에 언어보다 훨씬 더 빠르게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고 의미할 수 있을뿐더러 현대에 급증한 동영상 매체들의 압도적 영항력마저 직간접으로 증명하는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니까 언어는 무릇 모든 학문과 모든 언론방송뿐 아니라 심지어 몸(신체; 육체; 육신)을 주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스포츠와 군사활동마저 포함하는 “거의 모든” 인간사(人間事)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요건인데도, 메러비언의(메라비안의) 법칙은 언어를 기껏해야 벼슬아치의 앞잡이노릇, 장사꾼의 여리꾼노릇, 사기꾼이나 야바위꾼의 바람잡이노릇(☞ 참조), 허언을 일삼는 정치꾼노릇(☞ 참조), 가짜뉴스를 남발하는 기레기노릇(☞ 참조), 권력자의 끄나풀노릇, 가스라이팅(개슬라이팅 ☞ 참조), 판새·검새·법기술자·법꾸라지노릇, 무뢰배와 깡패의 공갈·협박 따위에나 이용되는 편의주의적인 수단·도구·방편(☞ 참조)처럼 인지시키는 듯이 보인다.
이런 언어관(言語觀)이 바로 언어허망론(言語虛妄論), 언어무용론(言語無用論), 침묵주의, 맹험주의(盲驗主義), 신체행동지상주의 따위(☞ 참조)를 발끈불끈 히스테릭하게 분비(分泌)해버릇할 것이다.
그런데, 아니, 오히려 그래서, 적어도 동양에서는 발언자·표현자의 태도뿐 아니라 자격·권위·권세(☞ 참조)도 발언·표현의 영향력을 결정지을뿐더러 어쩌면 태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더 확실히 결정짓는 훨씬 더 강력한 변수들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적어도 근래의 한국은 걸핏하면, 수틀릴 때마다, 발끈하여 나이, 수능성적, 계급, 직급, 직위, 서열, 권위, 권세, 자격, 출신학교(학벌; 캌뻘), 학위, 몸값(☞ 참조), 집값 따위부터 들먹이고 따져대며 막무가내로 갑질하고파 안달하느라 히스테릭하게 고함질러버릇하는 이보포류개체(☞ 참조)들이 득시글거리는 무속무치한(巫俗無恥)한 갑질천국으로, 이미 거의, 변이했을 것이다.
왜냐면, 예컨대, 적어도 한국에서 자행되는 모든 갑질(돈지랄+벼슬질)은 행위자의 자격·권위·권세(금력·권력; 자본·벼슬·지위)를 가장 쉽게 술술 매끄럽게 후루룩 뚝딱 증명하는 짓거리들이라고 감각되어 감정(感情)되면서 믿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왼쪽그림은 프랑스 화가·만평가 샤를-조셉 트라비에 드 비예르(Charles-Joseph Travies de Villers, 1804~1859)의 〈거만하고 늑장부리며 게으른 벼슬아치(관료)(La bureaucrate insolent, musard et paresseux)〉이다. 아래오른쪽그림은 프랑스 만평가 샤를 아메데 드 노에(Charles Amedee de Noe; 샹; Cham, 1818~1879)의 1869년작 〈군관(장교; Le soldat bureaucrate)〉이다. 이 그림에는 “늘 똑같은 청구서야! 다시 가져오면, 내 부관을 시켜 네놈을 총살해버리겠어!(Toujours la meme demande! Revenez, et je vous fais fusiller par mon garcon de bureau!)”라는 군관의 으름장도 부기(附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