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진평왕 39년에 압랑군 남쪽 불지촌의 율곡 사라수 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바로 원효대사인데 원효대사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어머니가 원효를 가졌을 때 별똥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이렇게 태어난 원효대사는 어린시절 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청년이 된 원효대사는 29세에 출가하여 영축 산 남지, 훙류낫 연기, 반용산 보덕 등을 찾아 수행하다가 34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고 하였다.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당항성으로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는데 너무 달고 맛있어서 기분 좋게 잠들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인 것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분이 낮은 농민이나 천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원효대사의 이름이 이미 신라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원효가 아침부터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며 큰 소리로 이런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노래를 듣고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 하신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여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무열왕은 마침 요석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공주를 떠올랐다. 왕은 신하들을 시켜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 나섰을 때, 원효는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저 편에서 관리들이 보이자 원효는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오다가 일부러 발을 헛딛고 물에 빠졌다. 관리들은 허겁지겁 원효를 건져 내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벗고 궁에서 머물렀다. 요석공주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둘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얼마 후 공주가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바로 유명한 설총이었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어찌나 총명하였던지 어릴 때 이미 유학과 역사에 통달했다. 그는 이두문자를 만들어서 그 때까지 중국어로만 통하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우리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끔 했다.
원효대사는 파계해서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 소성거사라 했다. 또 광대들이 가지고 다니는 둥근 박에 여러 가지 도구를 장엄하여 무애라 이름 짓고 가지고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염불하였으므로 가난 하고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도 모두 부처를 알게 되었고 갓난아이들까지도"나무아미타불"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 때 부터 신라에서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였고, 백성들은 고달픈 삶에 위안을 얻게 되었다. 스스로가 붙인 원효라는 법명은 부처님의 세상을 처음으로 빛나게 하다 라는 뜻인데 원효대사가 이룬 업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그 이름대로임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을 뿐 아니라 화엄경과 금강산매경에 대한 해설을 써서 후세에 길이 도움이 되게 했다.
출처:(문화원형백과 한국설화 인물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