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응신조를 보면 이상하게도 404년(응신 28년)부터는 응신의 태자인 토도가 응신 대신에 국정을 본다. 그 이유가 삼국사기에 있다.
․아신왕 12년(403년), 2월 왜국의 사자가 이르자 왕이 깊이 위로하였다.
응신이 403년 2월에 죽은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응신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2월에 죽었음을 기억하자. 아신왕의 슬픔으로부터 우리는 응신이 진사왕을 실각시키고 아신왕을 옹립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402년의 미사흔 왕자 인질 기록을 중애 9년조에 적고 있는 등 5세기초의 사건이 응신조가 아니고 신공의 초반 기록에 섞여 있다. 그러다보니 중애의 기록에도 응신의 기록이 혼합되어 있다.
@@@ 우선 여기까지만 비평을 해봅니다.
일본서기 관련 기록의 해석은 연대를 자유롭게 올려놓아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일본서기 연대를 올리는 이유가 위 글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으니, 이에 대한 비평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이주갑자(120년) 인상설도 아닌, 새로운 연대 편년법인 만큼, 천천히 판단해보겠습니다.
자, 우선 위 글에 보면 "아신왕 12년(403년), 2월 왜국의 사자가 이르자 왕이 깊이 위로하였다."
라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문장에서 일도안사님은
아신왕의 슬픔으로부터 우리는 응신이 진사왕을 실각시키고 아신왕을 옹립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라는 해석을 했습니다. 아마도 위로라는 말을 들으면 왜국의 사자에게 정말 슬프다는 것을 위로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삼국사기 원문을 볼까요.
十二年, 春二月, <倭>國使者至, 王迎勞之, 特厚
자. 이 글의 번역은 다시 해볼까요. 아신왕 12년 봄2월에
왜국의 사자가 도착했다. 왕은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여기서 勞之의 해석이 문제인데, 之는 사신이 도착한 것을 말하는 대명사이고, 勞가 위로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기로 하지요.
아달라 이사금 4년조에는
三月, 巡幸<長嶺鎭>, 勞戍卒, 各賜征袍.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1) 다시 말해 병사들을 고무 격려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는 아달라 이사금 9년조.
九年, 巡幸<沙道城>, 勞戍卒. 에도 있습니다.
두번째 쓰임을 보면
진평왕 43년의 기록입니다.
四十三年, 秋七月, 王遣使大<唐>, 朝貢方物. <高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 賜以璽書及畵․屛風․錦綵三百段.
43년 가을 7월,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로하고, 통직 산기상시 유문소를 사절로 파견하면서 조서, 그림, 병풍, 비단 3백 단을 보내왔다.
2) 여기서는 사신이 온 것에 대한 수고를 격려고무 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무슨 슬픔이 있어서 진평왕을 위로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로의 쓰임이 바로 아신왕조의 쓰임과 같은 것입니다.
勞는 3) 힘쓴다, 4) 노동자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무슨 슬픔을 위로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왕이 죽어서 슬픔을 위로하는 제대로 된 사례를 살펴볼까요.
문무왕 즉위 원년 기록에
冬十月 二十九日, 大王聞<唐>皇帝使者至, 遂還京. <唐>使弔慰, 兼勅祭前王, 贈雜彩五百段.
10월 29일, 대왕이 당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당 나라 사신이 조의와 위로의 뜻을 표하고, 동시에 황제의 조칙에 따라 이전 임금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채색 비단 5백 필을 부조하였다.
는 것처럼 弔慰라는 문장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수고한 것을 격려한 것을 통해서 백제가 일본왕의 죽음을 알고 사신을 위로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 입니다.
게다가 여기에 맞추어서 일본서기의 편년까지 조정하는 것은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글 해석본의 "위로"를 가지고 지나치게 과장해석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군요.
삼국사기를 분석하려면 원문 한자를 갖고 해석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한자의 용례를 살펴보고 과연 이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우선해야 할 작업이라고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