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y Warhol (1928-1987)에 대하여
미국 팝아트 화가이며 영화제작자인 앤디 워홀은 체코 이민세대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공부했고, 1952년 뉴욕으로 나가 상업디자이너로 활동한 뒤
화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62년 시드니재니스화랑에서 열린 <뉴리얼리스츠(new realists)전>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었다.
만화와 신문 보도 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 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
린으로 캔버스에 전사, 확대하는 방법으로 유명해졌다.
63년부터 《슬리프》 《엠파이어》 등 실험영화를 제작하였고, 상업영화도 제작하였으며 소설도
출판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여 1960년대 예술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워홀이 평생 명성과 부를 좇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그가 남에게서 작품의 아이디어
를 구했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빈번히 차용했으며, 조수를 고용하여 작업의 상당 부분을 맡겼고,
같은 주제를 무수히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사인가지도 남들에게 맡기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 역시 공개된 일들이다. 그는 상업성이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으며, 작품을 주식에 비유하기
도 했다. 문제는 그가 이런 행동을 통해 무엇을 의도했든 간에 (혹은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데 있다.
워홀이 제시한 문제점들은 한마디로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가없는 부정과 도전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대게 다음 몇 가지를 그 특성으로 열거할 수 있다 .즉 오리지낼리티의 부정, 작가의 수
작업( authorship) 이나 기량에의 무관심,반복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성의 부정,그리고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지상주의 등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술품에 따라 다니는 천재와 영감이라는 아우
라(aura)를 자각의 명성이 발하는 아우라로 대치하였고, 고급정통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부정
하고, 더 나아가 미술품을 상업시스템에 종속되는 이래 상품으로 파악, 제시했다.
그는 또한 미술가의 위상을 대중적인 스타의 그것과 큰 차이 없이 규정하였는데,1980년대 미술의
여러 속성들을 예고한 이런 입장은 엘리트 모더니스트나 보수 진영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는 비판
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으로는 그의 이런 태도를 미술의 문화비평적인 기능 또는
현대미술의 전개과정에 대한 반성적인 관심으로 평가 하기가 힘든데 있다. 다시 말해서 외견상으
로는 마르쎌 뒤샹을 필적하거나 또는 능가하는 이런 우상타파적인 제스처가 워홀 자신의 미학적인
신념에 근거한 '전위적인'행동이라기 보다는 그어느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소위 '미학적 몰
가치'의 한 방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 워홀은 어떤 배경을 가진 미술가 였는가?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노동 이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난하고 병약한 어린시절을 보냈다.어려서부터 유난히 통속적인 의미의 사회명사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연예인이나 유명작가를 흠모하여 영화배우의 사진을 모으거나 팬클럽에 가입하는 등의 특이한
열정을 보였으며,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성인이 되거나 미술가로 성공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정통미술과 상업미술의 구분을 강조하지 않았던 피츠버그의 카네기 테크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졸업 후 뉴욕으로 가서 상업 디자이너로서 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즈음부터 그는 자신에 대한 신화가 쌓이는 것을 목적으로 나이나 배경등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
으며, 인터뷰때에는 얘기 꾸미는 것을 일삼았다고 한다.그의 주변 인사들은 한결같이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사적인 것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고 전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해 왔다.
자신의 외모에 일생 열등감을 느꼈던 그는 팝 미술가로 알려지기 전에 코를 성형수술 하고 가잘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의 자전적인 초기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상업미술계에서의 성공 뒤에 그는 팝아트가 대두하는 시점을 계기로 정통미술가로 데뷔하는데,
그의 작업방법은 상업미술의 테크닉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자신이 만들기보다는 이미 있는 재료
를 활용하여 베끼거나 (tracing) 신문이나 잡지의 이미지를 전사하는 방법을 택했고, 가능한 한
쉽게 작업하기 위해서 조수를 고용하고 친구들의 자발적인 도움을 유도했다. 한꺼번에 쉽게, 그리
고 대량으로 작업하고자 하는 그가 실크스크린으로 옮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상업미술의 이미지를 쓰고 또는 그것의 기계적인 테크닉을 사용한 것은 워홀만이 아니었고 사실
이것이 팝아트를 규정하는 특성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데, 특이할 것은 그가 작품의 아이디어
를 얻는데 남다른 방법을 택했고,처음부터 오리지낼리티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는 점이다.그는 늘
알만한 사람이나 주변인사들에게 무엇을 그릴지를 물었으며, 그의 초기작으로 유명한 캠벨스프나
코카콜라를 그리게 된 동기는 그의 방식을 잘 나타내준다. 즉 스프 깡통은 친구에게서 돈을 지불
하고 아이디어를 산것이고, 코카콜라는 두 개의 가능성을 두고 일조의 시장조사를 한 결과 택해진
선택이다.
그는 한때 상업미술가 시절에는 고치라면 고치는대로만 하면 되는 점이 좋았었다고 얘기한적이 있
는데, 바로 이런 전력이 그의 발상의 근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의 이런 방법을 창의력의 결핍으로 비난했을 때 미술잡지를 보고 아이디어를 구
하는 것이나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대꾸했는데, 그의 말이 타당하다 할지라
도 그 사실을 어떻게 하든지 숨기려거나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는 더 나아가 비슷한 아이디어로 더 나은 작품 을 만들기 위해 무명작가의
작업실을 둘러 보았고, 예를 들어 프랭크 스텔라에게 들러 작품 을 주문한 것도 가까운 친구에게는
아이디어를 얻기위해 다른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털어 놓았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워홀의 특성으로 논의 할 것은 공동작업을 하거나 또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맡기는 작업의
익명성이다. 그는 상업미술가 시절부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조수를 고용하였으며, 팝 작가로 알
려진 후에도 상업미술을 상당기간 계속하면서 조수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
고 그림에서 은퇴를 선언한 후에는 (1965-66)이런 사정은 더욱 심화 되었다고 봐야 한다. 워홀이
자신의 스튜디오를 '공장(factory)' 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그 다운 발상인데, 마치 공장의 일관작
업을 연상시키는 실크스크린 제작과정에서 정확하게 어디까지 그가 직접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
나 한때 그의 조수 중의 하나가 워홀의 작품들은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고 공개하고 그도 이를 수긍
한 사실 때문에 수집가들이 작품 반환 요구로 소동을 벌인 것은 그가 스타일이나 수 작업의 개별성
등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이와 더불어 그가 작품 제작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우연의 효과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한
동안은 그의 어머니가 작품에 사인을 도맡아 한 사실도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좋은 예이다.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유명한 발언과 팝이란 가장 쉬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정의는 이런 맥락에
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이 그의 철저한 상업주의와 이에 연
관된 도덕성의 시비이다. 그는 일단 어떤 이미지로 실크스크린을 만들면 그 스크린을 두고두고 써
먹으며, 같은 주제를 숫자와 배열방식을 바꿔 가면 배치하여 여러 개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는 스크린의 여분의 잉크를 닦아낸 모나리자 이미지가 찍힌 천까지도 작품으로 만들어서 저명한
평론가의 진지한 분석까지 유도한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작품 값을 올리기 위
해 작품의 사이즈를 불렸으며, 큰돈을 번 초상화 분야에서도 가장 상업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조수들
에게 일정의 할당금을 약속하여 고객유치를 독려 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크레 트 카드 고객을 향
한 판촉선전에도 등장하며"워홀과 함께 신화를 !"이라는 문구로 자신의 작품을 유행상품화 하였다.
그는 '공장'시대의 방만한 생활의 후유증으로 총격을 당한 뒤 작업실을 옮기면서 부터는 화가이기
보다는 사업가로 자신을 규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업미술(Business art)은 미술의 다음단계 이다. 나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하여 사업미술가로 끝을
마치고 싶다. 나는 '미술'이라고 불리는 것을 (또는 무엇이라고 불리든지 간에)한 뒤에 사업으로
옮겨 갔는데, 나는 미술사업가 또는 사업미술가가 되고 싶었다. 사업에 수완이 있는 것은 가장
매혹적인 예술의 일종이다.
그는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얻을 즈음 체코시의 이름인 워홀라( Warhola)에서 끝글자를 떼어버려
노동이민 출신의 배경과 결별하는 변신을 꾀했고, 팝작가로 명성을 얻었을 때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드렐라(Drella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어)로 통할만큼 패션과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군림했으며,
사업미술가로 자처했을 때는 조수들로부터 보스라고 불리었다. 결국 이런 사업미술은 그의 아메리
칸드림을 성취하는 골간이 된 것이다. 그는 미술품을 '순수한 '상품으로 취급했고, 그것도 미술품이
일종의 신분과시용의 상품으로 변질하게 되는 보드리야르 식의 교환가치를 지닌 사인으로 인식했다.
물론 이러한 철저한 상업주의는 비판진영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어서, 예를 들어 타락하고 결국
은 몰락한 이란 왕가와의 유착은 그의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워홀은 뒤샹을 존경했지만 뒤샹식의 미술비판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파괴적인 생활태도는 허무
적이고 위험스러운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는데, 그의 이러한 미술에 대한 "무신념"은 1970년대 말에
제작된 <산화 그림 Oxidation Painting> 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원래 <오줌 그림>으로 명명되었던
이 그림들은 물감에 금속가루를 섞어 칠한 캔버스에 오줌을 갈김으로써 재작된 것으로 미술사적
으로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나 추상표현주의 회화 전반에 대한 패러디가 된다.
이 작품은 위에 언급한 모나리자 그림과 함께 그의 미학적 몰가치를 나타내주는 단적이고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워홀 평가가 쉽지 않은 이유를 납득하고 동시에 적지 않은 의문과
회의에 직면하게 된다. 미술이라는 창조적 작업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런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
야 할까? 그는 정말 형편없는 엉터리가 아닌가? 이미 밝힌 대로 그를 실제 로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
도 많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각자그이 판단에 맡기는 수 밖에 없는데,그 대답은 또한 현대
미술이 제기하고 있는 많은 문제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나름대로의 평가와 연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워홀의 이러한 측면의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의 미술을 '사기극'으로 속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선 오리지낼리티의 부정에 관한 것으로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많은 미술가들이
선배나 동료 작가들의 작업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으며, 실제로 서로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의 독창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하는 것은 명확하게 규명하기가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어떤 아이디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냐는 온전히 워홀의 선택이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작품의 익명성의 강조나
상업시스템의 이용, 치부 등의 문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뒤샹, 여타 팝 작품들, 또는 미니멀
등에서 이미 다루어졌거나 또는 워홀과 거의 동시에 제기 되었던 것들이다. 더욱 특기할 것은 그의
이런 유산이 1980년대 이후의 미술에서 중요하게 모방, 또는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사의 문맥에서 보았을 때 캠벨스프는 재스퍼 존스의 유명한 <채색된 브론즈>(1960)에 대한 언급
이며, 코카콜라는 워홀이 더욱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콜라 병을 이용한 코카
콜라 풀랜(1958)과 연관 이있다. 이것이 워홀 자신의 두 선배 작가의 작품 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지금 현재 오리지낼리티와 차용의 이슈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셰리 레빈 이나 마이크 비들로, 제프
쿤스 등은 바로 이러한 워홀의 유산을 재검증하고 있는 작가 들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
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워홀은 뒤샹이 일용품을 가지고 문맥을 바꾸어 미술품으로서의 통과제의에
도전한 이래 가장 노골적으로 독창성과 개성, 수작업, 스타일, 또는 상업성의문제를 공략한 작가가
될 것이다.
<산화 그림>이 미술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현대미술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 스럽게 만
드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제작과정을 모른다면 더욱 그러하고, 혹은 알더라도 그에 관계 없이,
이를 미술품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다. 미술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확장된 현대미술에서는 그 경
계를 묻는 일 자체가 미술 작품이 되기도 하며, 이미 어떤 작품의 외양이나 제작방식이 미술, 비미
술을 결정짓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를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미술품이
제시된 그 문맥, 즉 미술관이나 전시장 또는 미술잡지 등의 제도적 환경이 관건이라는 시각이 제시
된 것도 이미 근 20년 전의 일이다.
어떤 작품이 기존의 테두리를 벗어나면서 대두되면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질 것이며
이런 개념의 확장이 현대미술가들이 해온 일이라면 워홀 역시 이일을 했으며 ,그가 우리를 혼란시키
는 그만큼 우리는 더욱 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껏 내가 그려온 워홀의
이미지가 악마의 그것이라는데 모자람이 없다면 마지막으 로 한가지 더 보탤 것이 있다. 그는 사후
에 대부분의 유산을 미술계로 환원되도록 조처했으며, 그의 유지에 따라 이미 그 수혜자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이 이같은 결정을 미술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신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공은 우리들에게 돌아와 있다.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예술가에 대한 개념은 반고호
같은 근대적 인간상이다.
예술가는 항상 고뇌에 잠겨 있으며 그는 돈대신 예술을 택하고 빵을 사는 것보다 물감을 사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고집스러운 인간이다.그는 예술에 관하여 처절하게 고민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때로는 광적이고 정신병환자처럼 보통사람과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즈음 되면 하나의
종교가 가지는 도그마와 우리시대의 예술가들을 매료 시킬만한 설득력은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 그의 예술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자신이 서명만하고 내다 팔았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사기 행각이 어디 있겠는가?
예술가는 개성이 가득한 고뇌의 상징인 예술품이 돈이라는 저속한 가치와 맞바뀐다고 하는 것 자체
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의 독창성을 가늠지을 예술품자체도 그의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의문스러운 것이다.
* 작품들
앤디 워홀의 생각 / 이규리
내가 빌렸던 입술, 내가 빌렸던 꽃잎,
내가 빌렸던 손,
내가 빌렸던 여자
한데 쏟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농심라면이다
퉁퉁 불어터진 면발과
식은 국물로
허기를 채우던 밤은 이제 가라
빼곡한 세상의 진열대
복제된 사랑 안에서 오늘 누가 울고 있나
추억도 나날이 소비되는 것
신제품에 밀려 구석진 곳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저 느렸던 날들의 행복에 대해선
이제 말하지 말자
나는 나를 믿을 수 없다
굳기름 둥둥 떠다니는 치사한 연애는
이제 내다버려라
쇼핑백 속 훌쩍거리는 비애덩어리들
지상의 화면을 빠져 나가면
대량 생산된 사랑 코카콜라처럼 마셨던
여름이 있을 뿐
첫댓글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전향 님, 살뜰하게 애쓰시는 맘, 시를 향한 사랑이라 읽습니다. 시낭송회 때 보여주심 따스함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앤디워홀>에 대한 자료도 고맙고, 기술복제시대, 대량생산시대의 쓸쓸함과 사랑도 복제되고 생산, 소비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시를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사실 <앤디워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해서 찾아 보았답니다. 이규리 시인 님의 시를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정성껏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