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 11,25)
2025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 해 첫 번째 달의 마지막 날입니다. 시간은 정말 쏘아놓은 화살과 같음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오늘 교회는 특별히 오늘을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로 지냅니다.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어야합니다.”라는 말로도 잘 알려진 성인은 1815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성인은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뒤늦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되고 그와 같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제가 된 후, 가난한 젊은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갖게 됩니다. 성인은 토리노 뒷골목에서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과 교도소에서 만난 청년들,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에게 기술교육과 그리스도 신앙을 가르치며 그들을 보살필 목적으로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서약하고 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끌며 청소년들과 함께 사는 삶으로서 젊은이들의 아버지,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부모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라 불린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이 이야기하듯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가 철부지 아이들에게 직접 그 신비를 알려주듯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
이제껏 알려지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느님 나라의 신비. 신비라는 말이 뜻하는 바 그대로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어느 한 부분이 감추어진 그 무엇, 신비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마르 4,33-34ㄱ)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비유’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을 뜻합니다. 그 뜻을 토대로 예수님의 비유를 설명하면, 직접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를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들어 말하면 땅에 뿌리는 씨앗에 빗대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방식을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아직 실제 체험해 보지 못한, 아니 체험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신비를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씨앗이라는 대상에 빗대어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시는 그 신비란 과연 무엇인가? 그 해답은 바로 예수님의 비유 말씀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ㄴ-32)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아주 작은 겨자씨가 하늘의 모든 새들이 깃들 정도로 수없이 많은 가지를 지닌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히 베풀어진다는 사실, 바로 이 신비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의 말씀 역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독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 10,32-34)
하느님으로부터 빛을 받은 이들은 그 이후 그들이 겪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공공연한 모욕과 환난, 감옥에 갇히는 부당함 또 재산을 빼앗기는 일을 당했음에도 하느님의 빛을 체험한 이들은 그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빛 속에서 그 모든 것보다 더 좋고 그 모든 것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그 무엇인가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자신들이 본 하느님의 빛 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체험하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그 어떤 시련이 그들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 어떤 부당함과 불의가 그들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두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체험한 아직은 분명하지 않은 하느님의 빛이 그들에게 언젠가는 큰 상을 내려줄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들이 체험한 그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모든 이들에게 그 믿음을 통한 확신을 갖기를 권고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히브 10,35)
하느님이 주시는 상을 얻기 위해선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의 말씀이 전하듯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하느님 그 분께서 내게 보여주신 그 빛으로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내가 겪은 모든 시련과 고난을 한 번에 보상해 줄 한없이 큰 기쁨과 행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믿어서 생명을 얻는 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한다 할지라도 하느님 그 분께 대한 굳은 믿음, 그 분이 지금 내가 겪는 모든 고통을 이겨낼 기쁨과 행복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 바로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아주 작은 겨자씨가 그 어떤 나무보다 큰, 그래서 하늘의 모든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되도록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처럼 바로 그 믿음으로 우리의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 분을 신뢰한다면 하느님께 몸소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참된 기쁨을 얻게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 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 37(3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