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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출생: 1964년 7월 29일
직업: 고등교원,시인
경력: 現천안 중앙 고등학교 교사
수상: 김수영문학상 수상 대전일보문학상수상
대표작: 십원짜리 똥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의자
사랑은, / 이인원
눈독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1952년 대구 출생
19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에 살을 베이다><사람아 사랑아><빨간 것은 사과>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등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1970 강원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
10여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현재 '시힘' 동인.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동화집 : 『바리공주』
산문집 : 『물밑에 달이 열릴 때』
사랑의 미안 / 이영광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과열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손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이리라,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어느 울음도 진화(鎭火)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가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낼 때까지,
한 불구자를 시간 속에서 다 눌러 죽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너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
1965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와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등
껍질의 사랑 / 최문자
사랑에 빠질 때
껍질이 있는 건 축복이죠
누구나 이 축복을 까보고 싶어하죠
찢고 비틀고 지지고 쪼개고 후벼 파면서
무섭게 사랑을 까보죠
껍질이 벗겨진 사랑은 죽어 있죠
하얗고 까맣고 누렇게 죽어 있죠
껍질이 깨지면 허망의 즙들이 흘러내리죠
축복이 사라진 것들을 사랑했죠
하얗게 눈을 뜨고 죽은 흰니 살밥 같은
입을 딱딱 벌리고 죽은 조개들 같은
랍스터 등짝을 쪼개고 판 흰 속살 같은
껍질보다 주검을 더 사랑했죠
껍질들은 안으로 몸을 잔뜩 오므리고 있죠
팽팽하게 가슴 쪽으로 핏줄을 잡아당기죠
껍질의 가슴이 찢어질 때까지 잡아당기죠
온몸을 끌어 덮으려다 찢어진 껍질이죠
조금씩 사라져가던 껍질이 축복일 줄 몰랐죠
껍질에 닿으려고 팔을 뻗어보지만
자꾸 헛손질하죠
사랑에 빠질 때
껍질이 남아 있는 건 축복이죠
이미 나에게도 새 뿌리가 나오고 있죠
조금씩 가슴이 찢어지고 있죠
1943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귀 안에 슬픈 말 있네』『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울음 소리 작아지다』『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등
현재 협성대학교 총장.
*♡* Aloha Oe ♬ ......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김달진문학상, 시외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등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1960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안개>가 당선
1989 별세
시집 <입 속의 검은 입>
노랑꼬리 연 / 황학주
노랑꼬리 달린 연을 안고
기차로 퇴근을 한다 그것은 흘러내린 별이었던 것 같다
때론 발등 근처에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손을 내밀 때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니까
길에 떨어진 거친 숨소리가 깜박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거다
아물면서도 가고 덧나면서도 가는 밤에 우리는 부끄러웠을라나
그런 밤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할지
네게 물어도 될 것 같았다
도착하고 있거나 잠시 후에 발차하는
기차에 같이 있고 싶었다
내 퇴근은 날마다 멀고 살이 아파
노랑꼬리 연이 필요했던 것이고
어디에 있든 너를 지나칠 수 없는 기차로 갔던 것 같다
너의 말 한마디에 하늘을 날 수 있는 댓살이 내 가슴에도 생겼다
꼬리를 자르면서라도 사랑은 네게 가야 했으니까
그것은 막막한 입맞춤 위를 기어오르는 별이었던 것 같다
내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운명은
오래오래 기억하다 해발 가장 높은 추전역 같은 데 내려주어야 한다
바람이 분다
지금은 사랑하기에 안 좋은 시절
바람 속으로 또다시 바람이 분다
지금은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시절
네게로 가는 별, 댓살 하나에 온몸 의지한
노랑꼬리 연 하나 바람 위로 떠오른다
1954년 광주 출생
세종대, 한양대 교육대학원 졸업
우석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 시작
<저녁의 연인들><상처학교><루시>등
현재 이롬라이프 및 국제 사랑의 봉사단 상임고문
둥근 반지 속으로 / 이사라
봄볕이 내려앉은 창가에서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인 듯 한 사람인 듯
눈동자 속에 둥근 집 한 채 짓고
눈빛 속에 눈물 속에
눈뜬 꿈 둥글게 두고 싶다
둥근 세상과 한 몸으로 철철이 물들어
눈 밖에 나는 일 없으면 좋겠다
딱딱한 것 깨고 나와
알고도 모르는 척 다시 세상 살면서
온 마음이 온 마음에게 부딪쳐도 즐겁게 쓸리는
여느 봄날같이
가지 끝의 연륜이 가벼울수록 팔랑팔랑 안타까운 봄날같이
사랑햇던 사람들 다시 파릇한 봉분에서 피어오르는 봄날같이
이렇게 둥근 눈으로 마주보며
말 못하고 피 마르는 고통도
오래될수록
씨눈 된다는 말, 이젠 믿는다
사랑은 말없이 둥글다며
누구나 말없이 단풍들고 낙엽지고
누구나 말없이 봄볕 들고 새순 돋는다는 말, 정말 믿는다
둥글게 세상 담은 반지 속으로
사람들 자꾸 들어간다
1953년 서울출생
1981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히브리인의 마을 앞에서』 『미학적 슬픔』 『숲속에서 묻는다』
『시간이 지나간 시간』『가족박물관』등
겨우살이 / 정진규
내 사랑 겨우살이 한번 풀어보려고 겨우살이 찾아, 즉효라는 그걸 찾아 눈 덮힌 심산 들었다 참나무 뽕나무 오리나무에 붙어살지만 겨울날 홀로 초록 잎새 싱싱한 독야청청 겨우살이, 나 좀 살려다오 내 후살이로 조심조심 들어앉혔다 네 몸 달이어 나를 깊게 뎁혔으나 아직도 여적지다 너나 나나 아직도 겨우살이다 내 사랑 겨우살이 아직도 여적지다 몰랐었구나 사랑이 본시 겨우살이인 것을, 후살이가 본시 겨우살이인 것을, 合歡이여, 철든 사랑아
1939년 경기 안성 출생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65년),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77년),
<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83년), <몸詩>(94년), <도둑이 다녀갔다>(2000년),
<本色, 천년의 시작>(2004년), 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상(80년), 월탄문학상(85년), 현대시학작품상(87년),
공초문학상(2000년), *2006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삽’ 외 25편
배를 매며 /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인천 덕적도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1년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5년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8 <젖은 눈>솔
2000년 산문집 <물의 정거장>이레
2001년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5년<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8년 산문집<물 긷는 소리>해토
1992년 김수영문학상.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사랑의 외곽 / 문태준
울타리를 치고
들어앉으니
나의 사랑은
뼈와 살로
외곽을 만들어
그 안쪽
인색하고
붉고
조마조마하는
심장 같아라
외곽을 갖춰
나갈 곳도
누굴 향하는 마음도 없이
어제 문득
산곡(山谷)에서 보았다
조그마한 꽃봉오리가
수줍게 피면서
조금조금
외곽을 넓히는 것을
내일에는
그예 그이의 산골(散骨)을 보리니
꽃은 지면서
사랑의 외곽을 마저 허물다
1970년 생
고려대학교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9편 당선
2004년~2005년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인
2006년 제21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시잡<가재미><그늘의 발달>등
접목椄木 / 복효근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도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도 몰라
더듬더듬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1962년 전북 남원출생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마늘촛불』등
사랑 / 김충규
내 시선이 닿아야 꽃은 제 몸을 활짝 열어 젖힌다
내 시선이 닿기도 전에 이미 꽃이 피어 있다면
그 꽃은 내 꽃이 아니다
내 시선이 닿았는데도 꽃이 피지 않는다면
그 꽃도 내 꽃이 아니다
내 꽃은 내가 부르지 않으면
내게 향기를 흘러보내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절대로 피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꽃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거나
노래를 불러도 피지 않는다
나와 내 꽃은 그런 관계이다
물론 이것은 나와 내 꽃 사이의 비밀이다
그대의 시선이 닿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피어나지 않는 꽃이다
그대도 내 시선이 닿아야만
활짝 피어나는 꽃이다
그대와 나 사이엔 꽃 향기가 흐르고 있다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문예공모 시 당선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등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오월문학상 수상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옛사랑은 라디오를 듣는다 / 윤제림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법 하나는
노래하며 걷거나
신발을 끌며 느릿느릿
걷는 것이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눈물을 훔치며
손목을 잡는 버드나무가 있을라
마침 흰 구름까지 곁에 와 서서
뜨거운 낯이 한껏 더 붉어진 소나무가 있을라
풀 섶을 헤치며 나오는 꽃뱀이 있을라
옛사랑은 고개를 넘어오는
버스의 숨 고르는 소리 하나로도
금강운수 강원여객을 가려낸다
봉양역 기적소리만으로도
안동행 강릉행을 안다
이젠 어디서 마주쳐도 모르지
그런 사람 찾고 싶다면
노래를 부르거나, 신발을 끌며 느릿느릿
걸을 일이다
옛사랑은 라디오를 듣는다.
1959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남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7년 문예중앙당선.
시 집 『삼천리호 자전거』『미미의 집』『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등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중.
첫사랑 / 류시화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1957년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분 당선
1980~1982년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작품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
너에게만 몰두한다 / 강미정
몰두한다, 나는 너에게만 몰두한다 몰두 속에서 나는 한없이 길들여지고 한없이 난폭해지고 한없이 생략되고 한없이 촘촘해져 화분 속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 뿌리처럼 촘촘해져 화를 내고 어리석어진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만 몰두한다 몰두 속에서 너는 미소 띤 장미꽃다발을 들고 내 가슴속으로 뛰어들어온다 한없이 느긋하게 한없이 따뜻하게 한없이 아프게 찔러대며 나를 덮는 사랑이여, 나를 벗어나고 싶어 어디로든 가겠다고 몸을 몰고 가면 몰고 가버린 내 마음이 그 어디든 그 어느 곳이든 너에게로만 닿는 저녁, 언제나 너에게로 돌아온다 갈 곳이 너밖에 없어 물을 끓이면서도 몰두 국수를 삶아내면서도 몰두 고명을 얹으면서도 몰두, 몰두한다 모든 방향을 지우고 붉게 들여다보는 몰두여,
맹목은 빠져나올 생각을 않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다
경남 김해 출생
94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 타오르는 생 >, <물 속 마을>
<상처가 스민다는 것><'그 사이에 대해서 생각할 때> 등
민족문학작가회 회원
부산시인협회 회원
시문학시인회 회원
현재 <월요시> 동인으로 활동
어제 / 박정대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푸른 음악의 한가운데로 별똥별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메마른 섬 같은 가을도 함께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 낡은 기타를 매만질 때, 너는 서러운 악보처럼 내 앞에서 망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심심해 오래된 항아리 위에 화분을 올려놓으며,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포개어져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우젓 장수가 지나가든 말든, 우리의 생이 마냥 게으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일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밤새도록 몇 편의 글을 썼다, 추운 바람이 몇 번씩 창문을 두드리다 갔지만 너를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속 톱밥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톱밥이 불꽃이 되어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生도 언젠가 별들이 가져가겠지만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현재 『목련통신』편집장으로 활동중
이제는 다만 때아닌, 때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성복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울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 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1952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7 <<문학과지성>>에 시 <정든 유곽에서>로 등단
1982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남해금산> 등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
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볼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
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
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도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호랑이 발자국>, <목련전차>
육사시 문학상, 이수문학상 수상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먼 곳에 두고 왔어도 사랑이다.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제 혼자서 부르며 왔던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외로운 열망같은 기원이 또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쪽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이 세상을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만 같은 한 순간이여.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휩쓸려,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꺽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긴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엔듯 실려오는 향취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제 몸이 꿰어 있어서,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인들 그 쪽으로 향하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등 너머에 있어도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1960년 전남 화순 출생
1990년 무등일보 신춘 문예 당선
1991년 계간 [실천문학] 등단
<시의 지평> 동인, 계간 『시와 사람』 편집위원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구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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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