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과 함께 꿈꾸는 생명 공동체 세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제자들을 맞이하여 그들에게
휴식을 주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제자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돌보려고 하시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이들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찾아온 이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셨고,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농민 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우루과이라운드(UR) 농산물 개방으로
농업·농촌·농민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우려하여 1994년에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가 기도하며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
1996년부터 7월의 세 번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농민 주일은 농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식탁을 위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식탁과 마주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식탁은 예수님의 식탁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해주셨으며,
이 땅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도록
성찬의 식탁, 성체성사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식탁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농민을 만날 수 있으며, 도시와 농촌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의 식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찬미 받으소서. 7년 여정’을 걷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특별히 기후 위기와 관련하여
우리의 식탁을 고민해야 합니다. 기후 위기가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후 위기가 식량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징후는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반도를 덮친 최장 기록의 장마가 농업에 미친
영향은 뉴스를 통해서 들은 것은 물론, 식탁을 준비하면서 몸소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려스러운 부분은 우리가 우리의 식탁을 준비하면서 탄소를 배출하여 기후 위기를
심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화학 비료와 화학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탄소 배출을 줄이는 농사법인 “생명 농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생명 농업은 공동의 집인 지구와 인간, 모든 피조물 형제들을 위한 농사 방법입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도 생명 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농민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그들의 노력에 정당한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이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농민 주일 하루만 농민들을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매일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그 식탁을 위해서 어려움 속에서도
농업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농민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신 것처럼,
우리도 식탁에서 농민의 마음과 정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도시와 농촌이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바로 농민 주일이 꿈꾸는 “생명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글 : 이승현 베드로 신부 –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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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
짧지 않은 세월동안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여러 경험을 해 오다 보니
맡았던 책무에 관련됐던 분들마다 아나운서, 기자, 특파원, 대변인, 자문위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대표 등 각자의 방식대로 저를 부르곤 합니다.
여러 호칭이 더해가도 늘 떠나지 않는 꼬리표는 첫발을 내디딘 ‘SBS 아나운서’입니다.
아나운서 역사의 산증인과도 같은 선배들과 모이는 아나운서 클럽에 가면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다.’란 말을 신조와도 같이 지켜 가시는
원로 선배님들의 정신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저 또한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올 때마다 ‘주님의 새로운 부르심’이라고 받아들이며
기꺼이 임해왔지만, 어떤 일을 하든 늘 천직으로 생각해 온 아나운서의 뿌리를 잃지
않게 됩니다. 마치 행복하게 고향으로 찾아가는 귀성길이나 집에 돌아와 편안한
일상복을 갈아입듯 말이죠.
우리 신자들도 세례와 함께 ‘한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득 마음에 갈등과 의혹이 찾아와서 냉담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며 공동체 생활 가운데 실망을 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혹은
가톨릭 신자임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거나, 때론 신앙인의 삶이 너무 익숙한
일상이 되어 주일미사나 기도 등에 무심하게 타성에 빠지게 되더라도 결국
‘한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처음 같은 설렘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 심어진 이 뿌리를 생각하면
신앙의 여정 속에 가끔은 멈칫하고 돌아가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며 휴식기에 머물게
되더라도, 결국 다시 익숙한 일상복을 입듯 ‘영원한 신자’라는 고향 집으로 돌아오게
될 거란 기대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후 내가 멀리 있는 듯 느끼거나 가까이 교회 안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거나 우리 마음에는 이미 깊이 신앙의 뿌리가 내려졌다고 생각하니,
‘한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라는 믿음이 늘 든든히 우리의 신앙 여정을 지키게 하는
주춧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르코 복음 1장 9~11절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에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들려온 음성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우리는 그 순간 각자가 이미 어떤 부르심,
소명을 부여받았을 것 같습니다. 선종하신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행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의무입니다.”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부르심을 받은 것’만으로도 행복의 의무를 지켜가야 하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마태오 복음 28장 20절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이 ‘영원한 신자’의 꼬리표에 행복하게 머물게 합니다.
글; 류지현 안나 / 아나운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