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신부] 여기에 물이 있다(그래도 역시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게 낫다)
한 여인이 문학가이자 무신론자인 버트란드 러셀에게,
만약 그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어 천국 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면 뭐라고 말하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러셀은 눈을 반짝이며 특유의 높고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 왜 저희에게 충분한 증거를 주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되물을 것입니다."
러셀의 비아냥거리는 입담을 비꼰 이야기 한 토막 입니다마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결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습니다.
죽어서 하느님을 만날 때 러셀처럼 '증거 부족' 타령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할 명분도 없거니와 살아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여러 연구 결과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안 믿는 것보다 삶의 질을 훨씬 높여 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건전한 사회 기강을 위해서 '종교의 보호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세계사를 볼 때 어느 문명(文明)이고 도덕(道德)이나 종교(宗敎)가 튼튼하게 버티고 있을 때는 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마가 멸망한 것도 결국은 도덕적인 타락에서 기인되었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 유행하는 부패, 범죄, 가정 붕괴, 약물 남용,
대중 매체에서 난무하는 성의 타락과 폭력 등은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는 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와 문화의 풍토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도덕과 종교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와 무제한의 선택권을 옹호하던
근대계몽주의와 자유 주의가 낳은 부작용입니다.
이제는 도덕과 종교가 제공해 주던 보호벽을 다시 찾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가정의 붕괴를 막기 위한 운동이나 교실에서의 인성 교육 등
시민의 여러 가지 의무와 덕을 되살리기 위한 세속 언어를 찾아내고 있지만,
이것이 하느님 신앙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큽니다.
왜냐하면 '양심' 교육의 문제는 다름 아닌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無神論者)요 세속주의자(世俗主義者)였던 귄터 루이는
세속주의를 옹호하려는 책을 쓰려고 했으나 통계 자료들을 조사하고 난 후
놀랍게도 생각을 바꾸어 신앙 생활을 권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청소년 비행, 성인 범죄, 편견, 혼외 임신, 결혼 생활의 갈등과 이혼 등
모든 문제에 있어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도덕적 실패나 사회적 병리 현상이 현저히 적었다."
둘째로, 인간의 행복한 삶에 신앙이 크게 기여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의학 연구에 따르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례하고
신앙에 따라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잘산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알코올 남용이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서 많다는 사실,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범죄를 피하는 것 사이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는 사실,
신앙심이 높을수록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수준이 낮아진다는 결과,
교회 참례의 여부가 결혼의 안정성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통계 사실,
심지어 종교인이 종교가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장수한다는 사실 등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임상 경험과 연구 결과도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가장 중요한 결정 인자들은
우리의 영적인 신념과 도덕적인 선택"임을 말해 줍니다.
셋째로, 인간의 유전자는 하느님을 믿을 때 영적 차원의
치유력이 발휘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허버트 벤슨 교수는 최근 의학 연구가 유전자 속에서
영적 차원의 잠재된 치유력을 발견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비록 벤슨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그는 인간에게 내재된
'종교적 정향성(宗敎的定向性)'에 대해 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정향된 존재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의 유전자 청사진은 무한한 절대자를 믿는 것을 우리 본성의 일부로 만들어 두었다."
이는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의 친교(親交)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졌다는
성서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비신자로서는 가장 성서에 가까이 가는 주장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에 정의화 평화, 선과 사랑, 생명과 기쁨이 없다고 투정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결핍을 느끼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부인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안기지 않는 것, 그분을 잊는 것, 그분 없이 스스로 일을 도모하려는 것,
그분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일상의 대화 중에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물음과 목마름입니다.
우리는 가끔 새삼스럽게 물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그리고 한 해 한 해 그저 조금 더 행복하게 또는 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인가?
그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로는 나의 마음에 무언가 아쉬움이 있다는 것을 느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의 삶과 행복을 의탁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여태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격려와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그전에 누리지 못했던
빛과 색깔을 얻는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사도 17,28)
하느님께서는 사실 내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로도 해갈되지 않는 나의 목마름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먼저 나 자신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첫번째 고백을 하게 됩니다.
크레도 인 데움 ! 나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여기에 물이 있다/ 차동엽 신부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아우님
오늘은 전국이 비소식있다네요 밖은 못나가지만
비가 더내렸으면 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뽜이팅=3 =3
형님, 고맙습니다.
비가 오면 공평해야 하는데 와 인천쪽만 오지요.
이거 콤푸레인 좀 해야겠습니다.
ㅎ.ㅎ.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오.
아멘!
"나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
아멘!
나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고맙습니다.
언제나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며칠전 아우님이 올리 차신부님글을
오늘 나도 한번 편집하여 올려 봤네요.
밖에는 단비가 내리네요
가믐의 단비처럼 좋은 일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그렇습니까?
이 글 끝내고 한번 보아야지요.
아, 봄 비가 내리는 하루.
무언가 이루어질것 같습니다
오늘도 행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