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과학, 철학뿐 아니라 문학, 예술의 분야에까지 폭넓게 관련되어 있고 이러한 분야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고 있다. 후기 구조주의는 기존의 서구철학이나 인식론에 대한 도전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화예술사조이며 문화양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끝까지 몰고 나간 것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구조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후기 구조주의는 기존의 구조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기존의 구조주의에 대한 반발하였다. 후기 구조주의는 인간 자체를 중시한 나머지 관계라는 것을 경시한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등장한 것이며, 인간경시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이성적 주체라는 데카르트적인 '완전한 주체'에 대한 반발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구조의 우월성을 강조하거나 형이상학적 대우를 함으로써 우상화한 부분을 공격하여 서구철학이 진리로 여겨온 부분을 부정하고 해체하며 구조주의에 의해 소외된 부분들을 복권하고자 한다.
나는 후기 구조주의의 대표적 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후기 구조주의에 대해 대략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특히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특징적인 몇 가지를 데리다를 중심으로 언어학의 전환과 그로 인한 후기구조주의의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현상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본론
1. 소쉬르 vs 데리다
1)소쉬르
구조주의 언어학자로 대표되는 소쉬르의 주장을 먼저 살펴보자.
소쉬르는 개인적 주체의 언어 기능인 파롤은 언어사용에 관한 사회적 규칙인 랑그에 의존하며, 랑그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랑그만이 언어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언어의 의미는 언어 외적 실재에 구애됨이 없이 언어 체계 내의 기호들 간의 차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또한 말은 의미가 재현되어 안주하는 본래적이고 생명력 있는 사고의 그릇이지만, 글은 말하여진 본래적 언어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는 불필요한 외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소쉬르는 어떤 단어가 실세계의 어떤 대상과 일치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전복시켰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긴 하지만, 그 관계는 언어 구조 속에서 고정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후기구조주의는 이 지점에서부터 구조주의와 멀어지기 시작한다.
2)데리다
후기구조주의는 지시어와 지시대상이 결합하면 오히려 의미가 불안정하게 되며 지시어는 자기만의 지시대상을 가질 수 없으며, 즉 지시어마다 여러 개의 지시대상이 있고, 또 그 지시대상 자체가 지시어가 될 수 있으며 어떤 말의 의미는 그 기호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 있는 기호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데리다의 언어관을 보면 궁극적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반대하는 반근원주의이다. 언어의 의미는 의식이나 실재 세계 혹은 본질과 같은 언어 외적인 것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용어들 간의 차이와 대립 그리고 상관적 관계에 의해서 언어 체계 스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결국 완결적인 의미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이다.
① 차연 -절대적 의미의 부재-
데리다는 기표와 기의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는 끝없이 지연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총체적인 구조도 거부한다는 것 어떤 고정적인 근원도 거부한다는 것, 이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출발하는 기초가 된다. 데리다에 의하면 의미는 지연과 차이 속에서 형성된다. 우선 지연이라는 말을 살펴보려면, 국어사전에서 아무 단어를 살펴보는 것을 가정해 보면 된다. 그 단어를 찾으면 다시 그 의미를 설명하는 몇 개의 단어와 문장들이 나온다. 하지만 바로 그 단어와 문장들 또한 의미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개념일 뿐이다. 즉, 의미라는 것은 기표에서 기표로의 이동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끊임없이 미끄러지게 되어 존재하는 동시에 그 실체는 허상인 것이다. 또한 차이에 의한 의미 생성은, 말 그대로 한 개념의 의미는 다른 개념과의 대비 속에서 비로소 생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생성과정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데리다는 이를 '차연(差延; differance)이라 칭하였다. 결국, 그러한 의미생성은 일시적으로 맥락 속에서만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또한 맥락이 의미에 대해서 완전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② 순수실재 -그 폭력적 위계질서에 관하여-
또한 두 가지 이상의 개념들이 서로 대조될 때, 이 사이에는 '폭력적 위계질서'가 생긴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개념들은 '보충의 기묘한 경제학' 속에 놓이게 되는데, 필연적으로 그들 중 하나가 다른 것에 대해서 특권을 가지는, 우월한 위치 즉 '순수실재'라는 위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순수실재라는 말은, 다른 개념들의 보충을 받지만, 스스로는 다른 개념의 보충물이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것을 칭한다.
문제는, 의미생성의 과정상 그러한 것은 존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처럼 인식되어서 다른 개념보다 우월해 보이는 개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앞서 말했듯이, 개념의 쌍들은 순수한 반대개념이 아니라, 서로에 의해서 자극을 받고, 궁극적으로 그 존재 자체를 상대방에 의존한다.
③ 소쉬르 비판
파롤이 개인적 주체의 언어 기능에 의존한다는 것과 사회적 규칙인 랑그에 의존한다는 것이 모순임을 밝혀낼 뿐 아니라 랑그뿐만 아니라 파롤도 개인적 발화 자로부터 자율적이다. 그래서 파롤보다 랑그에 특권을 부여하는 소쉬르의 이원적 대립은 근거 없는 폭력적 서열 제도라고 하였다.
소쉬르와 데리다의 차이를 표면적으로 볼 때 유사한 것 같지만 차이의 개념은 고정된 의미, 고정된 소기가 있다고 보는 것과 대조적으로,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은 고정된 의미는 끝없이 지연되기 때문에 궁극적 소기, 초월적 소기가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소쉬르는 재현 가능성을 인정하나 데리다는 재현 가능성을 차연의 망각에 기인된 환상이라고 하였다.
또한 소쉬르의 말의 우월성에 반하여 말보다 글이 본래적이라고 중국어 같은 표의문자, 프로이트의 수수께끼 그림을 예로 들어 주장하였다. 이것은 말보다 글의 우수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언어 형태가 필연적으로 진정한 수준의 언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음성언어만이 의미를 재현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언어라는 소쉬르의 주장은 차연 작용을 망각한 환상이며 그릇된 현전의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소쉬르에게는 고정된 의미가 있었지만 데리다는 그것을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용어는 단순히 의미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되었다.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찍혀 나온 것이 아니다. 텍스트에 새겨진 용어들은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남은 것은 '다양한 해석' 뿐이다. 텍스트에는 고정된 의미란 없다.
2. 레비-스트로스 vs 데리다
구조주의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의 심층에 불변의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데리다의 공격대상이 아닐 수 없다. 고정된 의미가 존재하지 않듯이 고정된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사회를 연구하면서 원시사회나 문명화된 사회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가 있다고 주장했다.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문화','선/악','순수/오염'등의 이분법적 구조를 비판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암묵적으로 자연과 원시사회에의 동경을 표현했다. 데리다는 이것이 모두 '음성 중심주의'에서 나온 폭력적 서열이라고 주장한다. 말이 글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서구사상에 이어져 내려오는 '폭력적 서열'이며 이것이 '음성중심주의'라는 것이다.
3. 형이상학의 비판
후기 구조주의는 과학, 언어, 진리 등과 같은 개념들이 서구의 형이상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정된 지리, 목적, 그리고 절대적인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반대하는 작업을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하고 있다. 고정된 진리나 목적 등은 서구 철학의 편견의 결과로 해석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조는 편견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 현상학의 비판 -훗설 vs 데리다-
1)훗설
구조주의학자인 훗설은 세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순수의식의 본질을 분석·기술하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지시적 기호가 구체적 실체나 개별적 현상을 지시하는데 비하여, 표현적 기호는 추상적 개념이나 보편적 본질을 직관하게 하므로, 현상학적으로는 표현만이 의미 있는 언어라고 하였다.
2)데리다
이러한 훗설의 근원주의 역시 데리다의 비판과 해체의 대상이 되었다. 근원주의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것을 지시하는 '지시적 기호'에 비해, 추상적 개념이나 보편적 본질을 직관하게 하는 '표현적 기호'만이 참다운 언어라는 주장은 인식론적 차원에 초점을 둔 분석으로, '표현'은 외화성이라기 보다 내면화이며, 소리 없는 음성이라 했는데, 내면적 음성이라도 그 음성과 의미직관이 조금이라도 시간간격을 가진다면 그 직관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절대적 확실성의 신화는 허물어진다.
또한 훗설이 제시한 의미의 '현전'이라는 현상학적 시간개념이 과거와 미래와 전혀 무관한 순수 현재는 없다고 한 획기적 시간개념이라는 그의 언어이론과 모순되며, 결국 플라톤적 전제에 의한 음성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가 폭로되었다. 내면적 음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음성과 의미 직관이 그야말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한 '현전'의 신화는 허물어진다.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 만약 "눈 깜짝할 정도"라도 시간 간격이 생긴다고 하면, 의미직관은 기억에 의존해야 하고, 기억이라는 것은 정확성이 보장될 수 없으므로 절대적 확실성이라는 현상학의 주장은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현재 지각한 의미는 이미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 즉 과거와 미래로 구조화된 것이므로, 비현재가 현재를 구성하는 것이고 훗설의 언어 이론이 현전에 부여한 특권이 자리할 수 있는 시간적 처소가 없기 때문에, 내면의 음성이 표현의 의미를 의식에 직접적으로 현전시킨다는 주장은 하나의 환상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5. 미셀 푸코의 지식과 권력의 관계
-순수한 지식의 부재-
데리다의 의견에 덧붙여서, 과연 어떻게 해서 구조가 생기며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월등히 순수하며 우수한 어떤 것이 정의되는 것일까?
미셀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지식에 대한 욕구는 소유와 정복을 위한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이다. 푸코는 이방인의 관점으로 서구의 지식체계를 바라보았다. 일정한 담론이 수락, 생산, 유통되고 어떤 담론들은 배제되어 형성된 지식체계가 인간의 지각을 인도, 지배하는 문화적 코드가 되며 이것이 인간에게 쾌락을 야기하고 지식을 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
푸코는 순진무구한 지식은 없으며 지식과 권력은 은밀히 유착되어 모든 지식은 그 자체가 권력을 내포. 어떤 권력도 지식의 정당화 없이는 행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누가 갖고 있는가 또는 어떤 목적, 의도를 갖고 있는가가 아닌, 지속적인 권력현상에 의해 우리의 언어, 신체, 행동이 예속되고 주체성이 구속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지식이 개인이나 계급의 소유물이 아니며 권력의 효과일 뿐이며 미시적 수준, 즉 일상적 수준에서 분석하고 권력행사와 지식 생성은 상호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진리를 통한 권력은 통제가 아닌 현실생산, 진리의식생산, 개인생산의 역할을 함. 권력/진리(지식)에 대한 해체를 하였다.
6. 데리다의 언어관 전환의 실천적 활용
데리다의 언어관의 전환은 단순한 언어 비판이 아니라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그 자체를 해체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데리다가 비록 텍스트성을 강조하기는 하나, 그가 강조하는 맥락은 삭제 하에 씌어지거나 말해진 언술적 맥락뿐이며, 그는 사회 문화적 맥락과 정치 경제적인 맥락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불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체적 비판은 대중문화보다 고급 문화, 주변보다 중심을 중요시하는 모든 유형의 획일적인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적 저력을 발휘할 수 있고 다양성과 다원성을 존중하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맺는말
후기 구조주의는 데카르트식의 '이성적 주체'에 반발하는 구조주의를 계승하는 동시에 구조주의를 비판하였다. 후기구조주의는 텍스트를 정밀 분석해 음성언어/문자언어, 말/글 등의 이원적 대립체계를 발견하고, 한/쪽에 부여된 특권적 지위의 이유를 그 텍스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심문하여 그것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그것이 근거 없고 폭력적인 서열제도임을 밝혔다. 이러한 이원적 대립체계의 위계성, 서열성 자체를 제거하여 인식의 구조 자체를 변환시켰다.
본론에서 살펴 본 데리다의 말/글, 자연/문화, 본질/현상, 표현/지시 등의 대립의 해체는 그러한 것들의 해체뿐 아니라 중심/주변, 남성/여성, 정상/비정상, 이성/감성, 정통/이단 등의 모든 대립과 그 편파적 특권의식도 삭제 가능하다. 헤겔과 막스의 법칙성/목적성, 객관/주관, 존재/사유, 필연/자유의 대립과 변증법적 종합까지도 비판이 가능하며 역시 해체가 가능하다. 후기구조주의에서는 어떠한 절대적 근원도 궁극적 목적도 결정 불가능하다.
또한 본론에서 살펴본 데리다의 말 중심주의의 해체는 단순한 언어비판이 아닌 인간, 사회 및 우주의 궁극적 이분법과 근원, 신, 이성, 주체, 실재, 절대정신, 진리와 같은 즉 궁극적 근원어들을 해체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해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후기구조주의의 시선은 대중문화보다 고급 문화, 주변보다 중심을 중요시하는 모든 유형의 획일적인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적 저력을 발휘할 수 있고 다양성과 다원성의 존중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