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차그릇의 병폐를 지적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하코가키(箱書)’라는 일본 제도를 따르고 있는 사기장들의 태도입니다. ‘하코가키’란 서화나 공예품 등을 넣은 상자에 진품임을 보증하여 작가, 감정가가 서명하여 날인한 것을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차그릇에 대하여 이름을 지어서 그 이름으로 부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흔히 명품으로 일컫는 차 도구들 대부분이 누구누구 작(作)이라거나 명문(銘文)을 붙여서 부르는데, 특히 차완은 그릇을 넣어 보관하는 나무 상자의 뚜껑 안쪽에다 붓글씨로 씁니다. 명문이 있는 것의 가치를 높이 사는 것도 일본의 관습입니다.
명문을 짓고 쓴 사람의 직위와 명성이 높을수록 차그릇의 명성도 더욱 커진다는 관습이 생겨난 이후로 차도구에 하코가키를 받는 일이 곧 명품임을 보증하는 것처럼 여겨져 왔지요.
그러자 하코가키를 짓고 쓰는 사람을 결정할 때 일본 다도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명사들이나 그들 후예들로부터 하코가키를 받는 일이 유행했지요.
일본 다도에서 최고의 가문이자 종가(宗家)는 오모테센케(表千家), 우라센케(裏千家)입니다. 두 집안은 모두 다도의 창시자 센노 리큐(千利休)의 후예이기 때문이지요.
센가의 하코가키가 있는 차그릇은 명성과 함께 가격도 매우 높게 거래되는 관행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때부터 심각한 모순이 일본 다도계에서 자라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같은 모순을 병폐로 보아 신랄한 비판과 함께 깊이 반성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즉 종가라 하여 마치 차계(茶界)의 왕처럼 취급하는 것은 봉건적 해악이며, 센노 리큐 후손이라하여 무조건 대우하는 것 또한 봉건적 잔재라는 것이지요.
센케의 가문에 태어난 자라하여 모두 일류 차인이라 할 수 없고, 실제로 존경받는 차인은 그리 많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요.
그런데도 일본 차인들이 가진 차그릇에다 센가문의 하코가키를 받으려고 온갖 비리를 일삼고, 재미를 붙인 센가문 사람들은 돈을 받고 글 몇자 적어 주는데 재미를 붙였으며, 결국 경제적인 상호 기생제도로 타락했다는 통렬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결국 돈이 차와 차그릇 그리고 차인의 정신까지 모두 타락시켰다는 얘기지요. 지금 일본의 다도와 차인들의 실제가 이같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코가키의 근원과 내력 그리고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부터 한국의 사기장 중에서 문제의 센케 가문 사람한테서 하코가키 받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점당 수백만원 이상의 돈을 주고받는 하코가키는 보통 수개월 동안을 기다려야 하고, 길게는 몇 해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한국의 흙과 불을 소재로 하여 한국인이 만든 차그릇을 일본의 다도 종가 가문 사람한테서 인증서를 받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국의 차인들에게 그 하코가키를 보여주면서 차그릇의 값을 비싸게 받아내기 위한 상업적 술책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기장을 한국 차인들은 유명 작가라 부릅니다.
하코가키가 있다하여 반드시 좋은 차그릇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 없어도 좋은 차그릇은 얼마든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