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이 파병지로 검토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지역 술라이마니야와 에르빌은 모두 파병의 제1원칙인 파병 장병의 안전 측면에서 과거 파병 후보지인 키르쿠크보다 양호하다… 술라이마니야는 에르빌보다 면적이 넓지만, 터키계인 투르크멘인이 적어 쿠르드-투르크멘의 민족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이 적다.”(2004년 4월19일 군 관계자)
빈 공방전, 전 유럽을 전율시키다
술라이마니야라는 이름이 다가오고 있다. 이라크 파병 예정지로 급부상하면서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술라이마니야는 어떤 곳일까? 과연 거기선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역사를 보면 다른 어떤 곳보다 술라이마니야로 가는 것이 대단히 상징적인 성격을 띤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어느 의미에선 한국군이 중동의 뜨겁고 어두운 역사에 본격적으로 빨려들어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술라이마니야는 바로 오스만 터키의 최전성기를 연 술탄 술라이만을 기려 지명을 붙인 곳이다. 이슬람 역사는 술탄 술라이만에 대한 기본정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이름: 야우즈 술탄 셀림(야우즈는 ‘냉혹한 자, 탁월한 자’라는 뜻)어머니 이름: 하프사 하툰생존기간: 1495~1566년재위기간: 1520~1566년통치면적: 1498만㎢통치지역 인구: 약 2천만명별명: ‘화려한 황제’ ‘입법자’ 술라이만은 1495년 흑해의 해안도시 트라브존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가 바로 2002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 이을용 선수가 진출했던 트라브존스포르의 홈코트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술라이만은 대단한 행운 속에서 오스만 터키의 최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혼자 남은 아들이었기에 아무런 승계 분쟁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오스만 터키는 할아버지대의 230만㎢에서 아버지대의 650만㎢로 확장돼 있었고, 홍해와 동지중해의 해상권도 대부분 확보하고 있었다. 제국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와 무력을 쌓아놓은 채 유능한 통치자의 등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위 초기 이집트계의 맘루크조를 재건하려는 다마스커스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술라이만은 1521년 발칸반도에 대한 전격적인 원정에 나서 그때까지 난공불락이라던 베오그라드와 주변의 요새들을 점령했다. 기독교 문명권의 중동 공격이라 할 수 있는 ‘십자군 원정’에 대응하는 이슬람의 유럽 공격인 ‘지하드’(성전)가 본격화한 것이다. 그해 가을에는 다시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성 요한 기사단이 220여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로도스섬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동지중해와 발칸반도에 성공적으로 거점을 마련한 술라이만은 드디어 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헝가리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오스만 군단은 모하치 평원에서 헝가리군을 자기 진영 깊숙이 유인한 뒤 대포부대의 집중 포화와 정예병의 기습공격으로 몰살시켰다. 헝가리왕 루트비히 2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럽대륙의 중심부인 헝가리는 그 뒤 145년 동안 오스만 터키의 속국이 된다. 당시 오스만 군단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와 소총을 대대적으로 활용해 무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술탄은 여세를 몰아 1529년 12만명의 대군에 300문의 대포를 동원해 오스트리아까지 진출해 빈을 포위했다. 유럽 최강국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일대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결국 오스만 군단은 보급 문제와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철수했지만, 이 빈 공방전은 전 유럽을 전율시켰다. “오스만 터키는 오늘날 지구상의 공포이다.”
그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술라이만의 군대는 진격을 계속해 독일 바바리아 지방과 폴란드 국경까지 육박하고, 드네프르강 하구까지 진출했다. 이와 함께 동쪽의 이란계 사파비 왕조를 공격해 그 수도 타브리즈를 점령하기도 했으며,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스 지방, 이라크를 정복한 것도 술라이만 때의 일이다. 육지에서 오스만 군단이 위세를 떨치는 동안 오스만 함대도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누볐다. 1538년 122척의 오스만 함대가 알바니아 해안 프레베자에서 200여척으로 이뤄진 기독교 국가의 연합함대를 격파했다. 그 뒤 지중해 해상권을 바탕으로 알제리 등 아프리카 북부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는 물론 프랑스의 니스, 멀리는 대서양의 아프리카쪽 관문인 세우타까지도 오스만 함대의 작전지역이었다. 술라이만은 이런 제해권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확보하는가 하면, 교역과 관련된 이권을 지렛대로 유럽국가들의 반오스만 통일전선을 교묘하게 분열시키는 외교전을 성공시켰다. 그는 재위 기간에 모두 12차례의 대원정을 벌였으며, 스스로 전쟁터에서 보낸 기간도 10년에 이른다. 이런 업적에 대해 후세 역사가들은 ‘술라이만 화려한 황제’(Suleyman, the Magnificent)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술라이만은 탁월한 입법가이자 행정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1400만㎢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에 혼재한 수니파 이슬람교도, 시아파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가톨릭교도, 동방정교도, 유대교도, 콥트교도, 네스토리우스교도, 조로아스터교도, 힌두교도 등 다민족 다종교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세속법 ‘카눈’의 제정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그는 이전 세대에 통용되던 법령들을 고치고 정비해 제국의 토대를 굳건히 만들었다. 그는 종교와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들 사이에 정의가 존재해야 하고, 권력자 역시 국민에 대한 정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을 관철시켰다. 오스만 터키가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면서도 650년 동안 유지된 배경에는 이런 법에 의한 통치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공을 기려 이슬람 역사가들은 그에게 ‘카누니’(입법자·The Lawgiver)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동시에 세계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걸출한 건축물을 후세에 남기는 데 성공했다. 이스탄불에 있는 술라이마니야 모스크와 루스템 파샤 모스크를 비롯해 예루살렘의 아크사 모스크 등이 다 그의 시대 작품이다. 오늘날에도 세계의 관광객이 끊임없이 이 걸작들로 몰려들고 있다.
각 민족의 연고권이 복잡하다
그러나 이런 술라이만도 어쩌지 못하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였다. 그는 총애하는 황후 록셀란이 후계 분쟁에 관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결국 궁정은 술탄의 후계를 둘러싼 모략과 암투 그리고 피로 물들어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제국은 통치권이 이완되면서 내부 분열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나아가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권을 장악한 오스만 터키는 이슬람 시아파의 지도국가인 이란-사파비 왕조와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사파비 왕조는 군사력이 현저하게 열세일 때는 후퇴하면서 식량 등을 불태우는 초토 전술로 버텨나갔다. 서부의 유럽전선에도 대응해야 했던 오스만 터키는 동부의 사파비 왕조를 끝내 복속시키지 못한 채 평화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555년 아마시야 협정을 맺어 술라이만은 터키 동부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차지하는 대신, 아제르바이잔과 카프카스에 대한 권리를 사파비 왕조에 양도했다. 술라이마니야는 바로 이런 과정에서 태어난 이름이다. 오스만 터키가 사파비 왕조와 맞바꾼 지역에 술탄 술라이만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이란과 터키 그리고 이라크를 번갈아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땅… 그러면서도 민족·종교적으로는 쿠르드(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를 비롯해 투르크멘(수니파)과 수니파 아랍인, 시아파 아랍인 그리고 시아파 이란인이 뒤섞여 사는 매우 불안정한 땅… 나아가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석유자원의 이권을 둘러싸고 나라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권모술수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땅…. 이런 역사적 맥락과 경제적 배경 때문에 각 민족이 내세우는 연고권과 자기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먼저 이 지역에 관한 한 다수민족인 쿠르드인은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적극 활용해 수천년래의 비원인 ‘쿠르디스탄’ 독립국가나 자치주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쿠르드인들은 현재 이라크 원유수출량의 절반을 생산하는 키르쿠크를 자신들의 관할권으로 두려 한다. 터키계 투르크멘인들은 쿠르드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연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몫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925년 제정된 이라크 독립헌법 제16장은 아랍계 쿠르드인과 함께 투르크멘인을 이라크의 3대 민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더욱 엄밀히 측정하면 투르크멘인들이 쿠르드인보다 더 많다.” 그런데도 미국 중심의 서구세력이 이라크의 아랍인을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인을 우대하는 정책에 펴는 바람에 자신들만 불이익을 겪고 있다는 논리를 편다.
이라크의 다수파인 아랍인들은 현재 쿠르드인과 투르크멘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일정 한도 이상의 독립 움직임이 현실화하거나 쿠르드인 등에게 막대한 원유 관련 이권을 넘긴다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후세인은 바로 그런 잠재적 여론을 등에 업고 1988년 쿠르드인 마을을 화학무기로 공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라크 북부지역은 상황에 따라선 국제적 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안고 있다. 후세인 시기까지 터키는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쿠르드인 문제를 밀봉하기 위해 반대급부로 이라크 내 투르크멘인에 대한 지원을 억제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의 정책에 따라 쿠르드가 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이라크 내 투르크멘 문제를 서서히 노골화하는 움직임을 보여 주목된다. 터키가 한국 군당국에 이라크 북부에 파병되더라도 투르크멘인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를 부탁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암시적이다. 술라이마니야의 옛 주인이 발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피와 모래와 기도의 땅, 그 심장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투르크멘은 술라이마니야에는 3만명, 에르빌에는 3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나아가 쿠르드인들이 이라크는 물론 이란·터키·시리아에 넓게 퍼져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국제 분규로 발전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 국가의 쿠르드인 문제가 다른 나라로 불똥을 튀게 해 자연발화식으로 국제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본인 저술가 무라마쓰 쓰요시는 중동의 현대사를 다룬 저서에 <피와 모래와 기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피와 모래와 기도의 땅, 그 심장부로 우리 젊은이들이 가고 있다.
“남은 형제와 그 자녀를 죽여라” 오스만 터키는 기이하고도 끔찍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무력이나 책략으로 집권한 왕자는 남은 형제와 그 자녀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준 것이다.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에서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가 이 제도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왕자간의 갈등과 투쟁이 치열했다. 후계권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물론 술탄으로 즉위한 뒤에도 경쟁자와 그 무리를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이 분열되거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늘 존재했다. 실제로 술레이만의 할아버지인 메흐메드 2세도 동생과 권력 다툼을 벌여야 했고, 아버지 셀림 1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두 차례나 반란을 일으킨 뒤 나중에 술탄의 근위부대인 예니체리 부대의 지원을 받아 양위를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즉위 뒤에는 두 형을 죽인다. 걸출한 술탄 술레이만도 이 끔찍한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어느 의미에서는 더하면 더했다고도 할 수 있다. 술레이만은 진실로 사랑하는 여성 록셀란이 후계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결국 왕가는 승계를 둘러싼 모략과 암투 그리고 피로 물들어갔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예로 황후에까지 오른 록셀란은 술레이만과의 사이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황태자 메흐메드가 죽자 피의 암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유고 몬테네그로 출신의 귤헴이라는 여인에게서 낳은 왕자 무스타파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이 음모에는 딸과 사위 등 온 가문이 가담했다. 그러나 그 여파로 다시 록셀란의 아들 지한기르가 자살한다. 이복형을 몹시 사랑했던 것이다. 록셀란이 죽은 뒤 남은 두 아들 셀림과 바예지드는 서로 군대를 일으켜 사생결단을 벌인다. 여기서 아버지인 술레이만은 셀림을 지원해 바예지드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이 끔찍한 제도는 17세기 들어서야 나머지 왕자들을 살해하지 않은 채 별궁에 유폐하는 식으로 완화될 수 있었다.
[ 온 + 오프 항해지도 ] ▶ 중고생-<술레이만-시공디스커버리 총서> 테레즈 비타르/시공사-<대세계사3: 유럽의 형성> 태극출판사(옛날 대형 화보전집: 큰 도서관이나 헌책방에 있을 것임.)-<이스탄불 기행> 진순신/예담-http://kr.yahoo.com ☞ 검색 ☞ 술레이만 대제-http://kr.yahoo.com ☞ 검색 ☞ 오스만 터키▶▶ 대학생 이상-<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 프랜시스 로빈슨 외/시공사-<이슬람 1400년> 버나드 루이스/까치-<중동사> 김정위/대한교과서-www.yahoo.com ☞ 검색 ☞ suleyman-www.yahoo.com ☞ 검색 ☞ ottoman-〈Islam in Context〉 Peter Riddell/Baker Academic
[ COMING SOON ] 자료제공, 도움말씀 기다립니다.okh1234@empal.com▶ 다음호: 사마천 - 분서갱유의 참극을 극복하다(사진) ▶▶ 다다음호: 바둑 - 21세기 문화산업의 주인공
첫댓글 탈도많고 말도많고 많은 이권이 달린 영토에 재건을 해주면 결국 그지역의 독립을 도와주는 꼴이니..이라크로서는 싫어하는지도.. -_-;;
그 옛날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오스만투르크..1차세계대전때 독일편에 섰다가 망하면서 터키로 신생국가가 된 역사가많은 멋진 나라군요..
클릭하자 마자 글의 압박으로 거부감이 확~~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