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골프백과 이런저런 준비물을 챙기면서 걱정이 되었다. 거의 한 달 만의 라운드인 데다가 그동안 연습도 전혀 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또 점수가 얼마나 엉망일까 겁이 슬쩍 났다. 한 달 동안 골프를 잊었다가 돌아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자는 실험 정신으로 임하기로 했다. 9시쯤 부킷티마 킴스패밀리에서 달님 및 수현과 함께 저녁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모처럼 만나는 얼굴들이 반갑고 좋았다. 식당은 다양한 국적의 손님들로 북적였다. 매콤 새콤한 총각김치와 추억의 무나물을 비롯한 여러 맛있는 반찬에 더해 서비스로 주신 먹음직한 해물파전까지 곁들여 각자 당기는 음식을 저녁으로 든든히 먹고 옆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 통에 담아주는 테이크아웃 커피까지 받아서 기분 좋게 출발했다. 마구 내리던 비도 얼추 잦아들어 있었다.
우드랜드에는 차와 오토바이 행렬로 가득했다. 달님이 실시간 카메라 화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앱으로 출발 직전 확인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사이 이렇게나 몰려들다니... 우리 셋이야 차 안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천천히 가도 되지만, 조호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조몬태나 님이 걱정되었다. 조몬태나 님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를 보며 단톡방에 걱정어린 톡을 보내기도 했다.
달보까: 1시간쯤 걸린다고 나오는데, 우리가 가는 동안 천둥 번개 비구름 좀 정리해 놓고 계시라고 해주세요.
봉주르: 녜 ㅋㅋ (카톡 답장 확인 후) 조몬태나 님이 다 정리해 둘 테니 천천히 오시래요.
조몬태나 님이 정말 비구름을 정리했는지, 폰데로사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비가 말끔히 개어 있었고 하늘엔 맑은 반달이 떠 있었다. 폰데로사 밤샘 골프는 10-18홀을 두 번 돌아야 하므로 전반은 네 명 모두 레드티에서, 후반은 모두 화이트티에서 치기로 했다. 얼리어답터답게 달님의 가방 속에선 각종 신기한 장비가 속속 나왔다. 충격을 받으면 한동안 불이 켜져 있는 공으로 네 명 모두 어렵지 않게 공을 찾으며 칠 수 있었다. 엎드리지 않고도 바닥에서 안정적으로 찍어주는 낮은 카메라 삼발이로 흔들리지 않는 멋진 스윙 동영상도 촬영되었고, 초록색 불이 켜지는 공을 친 수현의 사진은 꼭 초록색 레이저 빔이 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초반부터 양파 행진을 이어가고 있던 중 어느 홀에선가 달님이 모두에게 작은 플라스틱 컵에 담긴 와인을 돌렸다. 골프장에서 와인을 마시며 치긴 정말 처음이었다.
봉주르: 와우 이거 고급진데요? ㅎㅎ
달보까: 이 플라스틱 컵들, 아까 커피 산 카페에서 슬쩍 챙겼어요. 종이컵에 와인 마시면 종이 냄새가 나거든요.
신기하게도, 난 와인을 마시고부터 양파를 면하기 시작하더니 처음으로 티오프하는 honor를 갖기도 했다. 물론 그다음부터 바로 뺏겼지만 ㅋㅋ 버기에서 수현은 내 음주 운전을 걱정하기도 했다. ㅋ 달님은 드라이버 대신 5번 아이언으로 계속 티오프를 하셨다. 모리야 주타누간이 그런다던가.. 조몬태나 님은 처음에 간혹 드라이버샷이 힘없이 삑사리 날 때도 있었는데 날카로운 퍼팅으로 그런 홀마저 파를 하기도 하셨다. 이래도 즐겁고 저래도 즐거워하는 수현은 이날 유난히 벙커에 자주 빠졌는데(저 멀리서 달님이 수현한테 "또 벙커에요?" 하는 소리가 들린 적도 있음 ㅋ) 폰데로사의 모래란 모래는 다 퍼 올리며 33달러 그린피의 본전을 제대로 뽑고 있었다. ㅎㅎ 수현은 어떤 파4홀에서 드라이버샷을 잘 친 조몬태나 님에게 "이번에 2온 하시나요?" 했다가 결국 트리플을 하신 조몬태나 님한테 찍혔다며 눈치를 보기도 했다.
봉주르: (그린까지 50미터쯤 남은 페어웨이에서 열심히 공을 찾는 조몬태나 님에게) 여기 그린 위에 공 하나 있는데요?
달보까: (조몬태나 님을 향해) 앗, 여기 있네요 여기~
봉주르: (안도하는 조몬태나 님에게) 너무 심하게 엉뚱한 데서 찾고 계신 거 아닌가요? ㅋㅋ
달보까: ㅎㅎ 아까 맞는 소리가 좋다 싶긴 했어요.
이날은 앞뒤로 눈치 볼 다른 조도 없겠다 공 찾을 때도 한껏 여유로운 마음으로 차분히 찾아다닐 수 있어 좋았다. 먹고 마실 것은 물론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넉넉하게 골프를 즐기는 사이 어느덧 2개 홀만 남겨둔 시점이 되었을 때 갑자기 앞서 가는 달님/조몬태나 님 버기에서 경운기 소리가 났다. 왼쪽 바퀴에 펑크가 나 있었다. 뭐 얼마 안 남았으니 그냥 하지 뭐 했는데, 마침 골프장 보수 작업을 하고 지나가던 직원에게 수현과 달님이 플랫 타이어라며 보여주자 알았다며 쌩하니 가더니 10분도 안 되어 누군가 새 버기를 가져와 우리가 파3 그린에서 봉 버디에 놀라는 동안 골프백 등 모두를 싹 옮겨놓았다. 이때까지 연속 4번의 아우디 파를 기록한 달님은 마지막 파5홀에서 그동안 아이언으로만 티오프하던 것을 깜박하고 드라이버를 잡았다가 더블을 기록하자 심히 아쉬웠는지 이 홀만 다시 돌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우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달님은 또! 드라이버를 잡았고 또! 더블을 기록하셨다. ㅋㅋ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6시 반쯤 되었는데 싱신골 회원들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때 막 백드롭하고 로비로 들어오시는 조원장님 일행을 마주치긴 했다. 우리 넷은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고 해산하기로 했다. 몇 달 후 에든버러의 세계 최초 골프장에 가실 계획으로 들떠 있는 달님은 밤새 옆 나라에서 골프를 치고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족들에게 시치미를 뗄 작전에 은근히 혼자 스릴과 쾌감을 맛보고 계신 듯했다.
봉주르: 우리 세 명은 야밤에 들어오든 새벽에 들어오든 뭐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ㅋㅋ
달보까: 앗.. AC... 어젯밤 했던 거 그 스트레스 재는 거 지금 한번 해보세요. 얼마나 나오나..
2년 동안 쓴 핸펀에서 최근 심박수, 산소포화도, 스트레스 등을 측정할 수 있는 기능을 발견한 봉주르: (핸펀 뒤에 검지를 대고 있다가) 음, 평균보다 조금 높네요. 졸려서 그런가..
수현: 앗, 난 또 낮게 나오네 ㅎㅎ 역시 걱정 없이 살아야 해~
봉주르: 와, 이렇게 낮게 나오는 사람 처음 봤어. 정말 행복한가 봐!
달보까: 사람 손이 아닌 게죠 ㅋㅋㅋ
집에 돌아와서는 몇 시간 자고 일어나 뭘 좀 먹고 또 늘어져 티비 프로를 보며 푹 쉬었다. 사실 토요일 아침에 골프를 쳐도 오후 늦게 돌아오면 이렇게 늘어져 쉬기만 하니까, 아예 바짝 골프를 치고 토요일 하루쯤은 아무 생각 없이 쉬기만 해도 괜찮은 것 같다. 더구나 오전의 강렬한 땡볕이 너무 무서울 때는.. 토요일 하루 종일 그렇게 퍼잤는데도 밤에 어렵지 않게 또 잠드는 게 신기할 뿐이다. 역시 잠이 보약인가 ㅋㅋ
첫댓글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한적한 골프장에서 느긋한 날밤새기 골프. 참 재미있어요. 글고 동반자분들께 감사드려요 - 내리막 옆 라인에서 깜짝 버디를 떨군 봉님, 백사장에서 밤을 보낸 수잔님, 선더스톰을 정리해주신 조몬타나님. 재미있었죠? ㅎㅎ
넹~ 골프는 이 맛에 치나? 했어요 ㅎㅎ 처음부터 주선하고 여러 가지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
너무 재미있었어요! 와인은 신의 한수
밤 새워 게임을 하시다니...일단 그것만 가지고도 대단하십니다. 전 술먹으면서 밤 새는 것도 안되는 데...하물며 운동하면서...ㄷㄷㄷ
ㅎㅎ 전 술마시며 밤은 못 샐듯요. 계속 움직이며 운동하니까 가능한 것 같아요. 얌얌 님도 하실 수 있어요!! ㅎ
@봉주르 그 와중에 봉님은 버디도 함
저도 토요일 아침라운드만 아니었으면 꼭 조인하고 싶었는데.
한번도 안해본 분들은 꼭 경험해보시길~~
토요일에 억지로 깨어 있으려고 안 하니까 피로도 싹 풀리고 정말 좋네요~
봉작가 만세
ㅎㅎㅎ
전 이번주에 해볼까 잠깐 고민중입니다. :)
오, 싱에서 출발하는 차량만 있으면 저 또 가고 싶은데~ 함 보지요~
저도 또 참석할 수 있음
오호~! 차주만 있음 문제 해결이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잘 챙겨주신 달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즐거운 라운딩 할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봉주르님과 수잔님께도 짝짝짝
다음에 또 좋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ㅎㅎ 조몬태나 님 두번째 뵈니까 상당히 유머러스한 분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덕분에 아주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또 필드에서 뵙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