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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6일 주일
[(녹) 연중 제23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과 영을 부어 주시어, 우리가 모든 율법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에 충실하며, 형제들의 올바른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으므로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그를 타이르라고 하시며,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3,7-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먼저 단둘이 만나 그 잘못에 대하여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시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사람의 말도 듣지 않았을 때는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할 노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사람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공동체 밖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고자 함께 기도하며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함께 노력하고 기도할 이웃을 마련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노력에도 당신께서 흔쾌히 함께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말씀은 어려운 세상살이 가운데서도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왕태언 요셉 신부)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수도공동체에 몸담은 지가 40여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수련기 때 계획으로는 지금쯤 공동체 생활의 달인이자 친교의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순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도 공동체 생활이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아직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공동체가 내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요즘도 이런저런 수도회 회의에 참석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 있습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입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 말은 쉬운데, 정말이지 요원한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저희는 또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추구한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따뜻한 형제애가 필요합니다. 특히 공동체 책임자들의 부성애, 그리고 흘러넘치는 일상적 친절과 배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책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공동체 안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예의주시하고 고무하는 역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춤추게 하고 살맛 나게 하는 칭찬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끝없는 용서, 한없는 인내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가치 있고, 꼭 필요하고, 차원이 다른 사랑의 실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형제적 교정’입니다. 그러나 형제적 교정은 말은 쉬운데,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고도의 조심성과 극도의 예민함, 숙련된 기술과 강도 높은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 형제가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형제의 눈이 뭔가에 잔뜩 씌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본래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래서 증거의 삶은 사라지고 반대 표양이나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제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프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한 형제적 교정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에 적당히 해서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정 작업을 위한 로드맵을 세워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실효성 있는 교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 15-1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당사자 ‘단둘’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 그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다음 단계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한 가족, 한 형제로 여기면 절대로 한번 시도해보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 너그러운 상담자, 깊이 있는 영적 지도자와 함께 또 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얼마나 보석 같은 관계인데, 단칼에 끝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되던 남편의 사업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은 코로나를 지내면서 갑자기 아파서 1년에 10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퇴원을 못 하면서 병원에서 1년을 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공부를 곧잘 하던 아들이 힘든 시기를 지내면서 대학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성경 공부도 하였고, 봉사도 많이 하였던 분이었습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구약성경의 욥 성인을 떠올렸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며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욥에게 닥친 불행은 한둘이 아녔습니다. 마치 파도가 연이어 밀려오듯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욥의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욥과 함께 앉아 울어 주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때까지는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말없이 함께 있어 주는 것, 아픈 사람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친구들은 욥이 고통받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이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거나, 하느님께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친구들의 말에는 당시의 종교적인 지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욥의 아픔을 들어 주기보다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했습니다. 욥을 위로하기보다 가르치려고 했고, 함께 울기보다 잘못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욥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어 줄 사람이었습니다. 자매님에게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시련의 파도가 너무 높았고, 신앙의 깊이는 낮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에 휴가를 갔던 저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2시간 넘게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잠시 하느님을 떠났었지만, 자매님을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긴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휴게소가 나옵니다. 휴게소에서는 잠시 쉬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하며, 자동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지친 몸을 풀고 다시 길을 갈 힘을 얻습니다. 종교도 우리 인생길의 휴게소와 같습니다. 지친 영혼이 쉬어 가는 곳입니다. 상처 입은 마음이 위로받는 곳입니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다시 길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사랑의 연료가 떨어졌을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채우는 곳입니다. 그런데 휴게소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힘을 얻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때로는 운전하다가 휴게소를 그냥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급해서, 너무 지쳐서, 또는 출구를 놓쳐서 휴게소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휴게소가 그 운전자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다음 휴게소가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한동안 성당이라는 휴게소를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매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성당 건물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매님이 성당에 나오지 못했던 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자매님 곁에 계셨습니다. 눈물 흘리던 밤에도 함께 계셨고, 혼자라고 느꼈던 순간에도 지켜 주셨습니다. 자매님은 하느님을 잠시 놓쳤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매님의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도 하느님의 신실하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할 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보내 주시고, 만남을 마련해 주시며, 작은 위로를 통해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15년 만에 만남도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자매님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저를 만나게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파수꾼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외치는 사람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도록 알려 주는 사람입니다. 파수꾼에게 중요한 것은 높은 곳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감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명예를 지켜 주라는 뜻입니다. 그의 사정을 듣고, 그의 상처를 살피며, 사랑으로 대화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오늘 복음의 목적은 잘못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되찾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죄와 잘못을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공동체에서 밀어내는 것은 복음적인 충고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잠시 성당을 떠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신앙 공동체에서 멀어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느껴 하느님에게 마음을 닫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미사에 나올 힘조차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이 아닙니다. 비난도 아닙니다. 정답과 훈계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 했던 것처럼, 말없이 곁에 앉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도 멀어진 사람 한 명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전화하고, 따뜻한 안부를 전하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판단과 비난의 말을 내려놓고, 용서와 사랑으로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을 다시 얻는 일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의 사명입니다.
<벗이 벗일 수 있도록>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벗이 불신이어도
벗에게 믿음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절망이어도
벗에게 희망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미움이어도
벗에게 사랑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슬픔이어도
벗에게 기쁨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내침이어도
벗에게 품음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홀로이어도
벗에게 함께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거짓이어도
벗에게 진실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굴레이어도
벗에게 자유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저주이어도
벗에게 축복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벗이 죽임이어도
벗에게 살림이어라
벗이 벗일 수 있도록
오늘의 성인
성 즈가리아(Zachary)
활동년도 : +6세기BC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카르야
히브리말로 "야훼 기억하시다." 라는 뜻인 즈가리아는 느헤미아서 12,4에 의하면 제사장 잇도의 아들로서 바빌론에서 귀국하는 유다인들에 섞여서 귀국하였을 것이다.
즈가리아의 연대는 기원전 520-518년 이며 그 자신도 제사장이며 예언자였다고 추측한다.
또 즈가리아는 하깨와 동시대의 예언자이었지만 하깨만큼 성전을 짓는데 열을 내지 않았고 사상적으로는 앞서 있었다.
즈가리아의 이상은 신정(神政)정치이고 목표는 하느님 야훼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를 건설하고 이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될 것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열두 소예언서에 하나인 즈가리야서는 자카리아(Zacharias, 또는 즈가리야)라는 한 예언자의 이름으로 전해진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이야기를 하면서, ‘은전 서른 닢’과 관련된 예레미야(Jeremias) 예언자의 말이 실현되었다고 밝혔다(마태 27,9-10). 그런데 이 표현은 즈가리야서 11장 12-13절에 나온다. 이로써 즈가리야서 전반부와 11장을 중심으로 한 후반부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즉 이사야(Isaias)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즈가리야 예언서 역시 한 사람의 동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
예언자 자카리아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즈가리야서 제1부(1-8장)에 의하면 예언자 자카리아는 “이또의 손자이며 베레기야의 아들”(1,1. 7)로 전해진다.
그는 예언자 하깨(Haggai)와 동시대 인물로서, 기원전 520년 8월 또는 9월부터(1,1) 518년 11월까지(7,1) 활동했다.
하깨가 종교적인 이상(理想)을 불러일으키는 데 헌신했다면(하깨 1,14), 자카리아는 성실성에 대한 호소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이 이상을 실현시키는데 최선을 다한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성전의 역할을 그처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단식문제에 대한 답변 장면(7,1-3; 8,18-19), ‘거룩한 땅’과 성성(聖性)에 대한 깊은 관심(2,16; 5,1-4. 5-11) 등으로 미루어 자카리아의 신분이 사제였음이 거의 확실하며(느헤 12,16 참조), 또한 옛 예언자들의 정신적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1,3-6; 7,4-14; 8,16-17).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
성 리베라토(Liberatus)
신분 : 수사
활동지역 : 로로(Loro)
활동연도 : +1258년?
같은이름 : 리베라또, 리베라뚜스, 리베라투스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시대의 관상가로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베옷을 입고프란치스코 회원들처럼 사람들에게 모범을 주었다.
시빌리아 산 속에 있는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했으며 라우로(Lauro)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렀다.
이분을 공경하기 위해서 이분의 고향이름을 로로 피체노 (Loro Piceno)라고 명명했다
868년, 비오 9세가 그의 공경을 허락하였으나, 전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현재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브룬포르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지만, 은수자로서 관상생활만 하였다.
성 프란치스꼬의 잔꽃송이 46장과 47장-그리스도의 모친께서 병중에 있는 한 거룩한 형제에게 약 세통을 가져다 주신 이야기-에 성모님의 환시를 본 무명의 수도자가 리베라토임이 틀림없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