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동계(參同契)는 후한때 위백양(魏伯陽)이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다가 도가(道家)의 연단양생법(鍊丹養生法)을 논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의 약칭이다.
후한시대의 위백양(魏伯陽)이 찬(撰)한것으로 전해지나, 찬자의 경력에 대한 의문이 많으며, 실재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 책이름에서 보면 위서(緯書)의 일종으로 생각되는데, 일찍부터 도교 연단(練丹)의 대표적인 전적(典籍)으로 중시되어 왔다.
특색은 한대 상수역(象數易)의 이념에 의해 연단의 방법을 설한데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주석서는 오대 팽효(彭曉)의 《주역참동계분장통진의(周易參同契分章通眞義)》로, 그는 ‘주역이 참동하고 계합하는 단서(丹書)’라 풀이하는 데, 역리(易理)에 의해 금(金)과 수(水)를 화(火)에 의해 금단(金丹)을 만드는 외단(外丹) 연금술(鍊金術)로 보는 경우와, 참 목적을 내단(內丹)에 두고 호흡으로 이를 실천하는 원리로 보는 경우로 설명된다.
팽효 이후 모든 주석서가 그의 책을 저본으로 하고 있는데, 송나라 주자(朱子)의 《주역참동계고이(周易參同契考異)》와 같이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사상의 해명에 중점을 두어 건곤(乾坤)을 주체, 감리(坎離)를 작용으로 보고 감리가 건곤 사이를 승강하는 만물의 작용 원리로 보기도 한다.
이 책은 초기 도교(道敎)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역경》의 형식을 빌려 서술한 이 책은 내단(內丹:도교기공)과 외단(外丹:연단술)을 방기(方技)로 삼아 계통적으로 연단신선(煉丹神仙) 이론을 논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감(坎)·이(離)·수(水)·화(火)·용(龍)·호(虎)·선(船) 등을 빌려 연단양생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신비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지만, 외단 수련은 과학기술, 그 중에서도 화학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내단 수련, 즉 기공수련은 생명을 연장시키고 질병을 방지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시하였다. 출전: 두산백과및 원불교대사전
고문(古文)으로 된 참동계(參同契) 뒤에 쓰다 - 허균/성소부부고13권
고문(古文)으로 된 《참동계(參同契)》는 영락(永樂) 연간에 나왔는데, 어떤 농부가 서주(瑞州)의 산중에서 땅을 파다가 돌상자를 발견하였는 바, 이 속에 책 3권이 들어 있었고 글씨는 비단천에 주사(硃砂)로 쓰여졌다. 양용수(楊用修.양신)씨가 기이하게 여겨 올바른 책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책은 사언(四言)을 모아 그것을 위백양(魏伯陽)이 기술한 경문(經文)이라 하였고, 오언(五言)을 모아 그것을 서경휴(徐景休)가 주석한 것이라 하였으며, 또 《오행삼상류(五行三相類)》를 순우숙통(淳于叔通)이 저술한 것이라고 하는 등 체제가 정연하여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올바른 책일까? 이 책이 세상에 돌아다닌 지가 거의 1천 년이 되었고 주석을 한 사람 또한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그 잘못된 것을 깨달은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이 혹 도서(道書)로서 뜻이 은미하고, 또 은어(隱語)와 난사(亂辭)가 많아 쉽게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진일(眞一)ㆍ포일(抱一)ㆍ상양(上陽)등 세 사람은 세상에서 모두들 도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이들로 모두 이 책을 주석하면서 그 그릇된 점을 깨닫지 못하였다. 세 사람이 이미 도를 깨달았다면 반드시 신선이 되어 상청(上淸)에 올라가 여러 진인(眞人)과 만났을 것이며, 위백양과 서경휴 또한 반드시 상제(上帝) 곁에 먼저 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의 뜻을 의논하여 잘못된 곳을 바로 잡았을 터인데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팽효 등이 혹 도를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미 도를 깨달았더라도 옥경(玉京)에 오르지 않고 인간 세계에서 이 주석을 저술한 연후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던가? 이는 알 수가 없다.
고문(古文)은 이미 장구(章句)가 질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산란하여 질서 없는 구서(舊書)와는 다르므로, 내가 우선 이것을 옳게 여겨 읽는다. 순우숙통과 서경휴는 다 위백양과 함께 선도(仙道)를 속인 자들이니 그 글이며 뜻은 본디부터 우열이 없는 한 사람의 솜씨인 것이다. 독자가 두루 읽고 자세히 음미해 보면 틀림없이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참동계(參同契) 수장(首章)의 해석 - 남구만/약천집29권
건(乾)과 곤(坤)은 역(易)의 문호(門戶)이고 여러 괘(卦)의 부모이며, 감(坎)과 이(離)는 광곽(匡郭)이 되어 곡(轂)을 움직이고 축(軸)을 바로잡는다. 암수 네 괘(卦)로 풀무〔槖籥〕를 만들어 음(陰)과 양(陽)의 도를 뒤덮으니, 수레를 잘 모는 자가 승묵(繩墨)을 기준하여 함비(銜轡 고삐와 재갈 )를 잡고 규구(規矩)를 바로잡아 궤철(軌轍)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중앙에 있으면서 밖을 제재한다.
건과 곤은 음과 양이다. 문호는 나가고 들어옴을 말하고, 부모는 낳고 이룸을 말한다. 감과 이는 수(水)와 화(火)이다. 광곽은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의 이른바 ‘범위(範圍)’라는 위(圍)와 같으니, 포괄함을 말한다. 감(坎)은 곤(坤)으로써 건(乾)을 포함하고 이(離)는 건으로써 곤을 포함하니, 이것이 이른바 광곽이란 것이다. 곡(轂)은 수레바퀴의 가운데 부분으로 축(軸)을 받아들이는 곳이고, 축은 곡 가운데를 가로로 관통하여 바퀴를 돌게 하는 것이다. 탁약은 풀무라는 말이니, 탁(槖)은 약(籥)을 받아들이는 바깥의 독(櫝)이고 약은 탁을 고동시키는 안의 관(管)인바, 비어 있으면서 쓰임이 됨을 말한 것이다.
건은 호(戶)가 되고 곤은 문(門)이 되며, 건은 아버지가 되고 곤은 어머니가 되며, 감(坎)은 곡(轂)을 음으로 삼고 축(軸)을 양으로 삼으며, 이(離)는 곡을 양으로 삼고 축을 음으로 삼는다. 건과 감은 수컷이고 곤과 이는 암컷이며, 건과 곤은 탁(槖)이고 감과 이는 약(籥)이니, 이는 모두 비유를 취하여 형용한 것이다. 승묵과 규구는 바로 음과 양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징후이고 수와 화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순서이며, 함비(銜轡)와 궤철(軌轍)은 바로 수와 화를 운반하는 법이고 음과 양을 순환시키는 자취이다. 가운데에 처하여 밖을 제제한다는 것은 바로 천군(天君) 즉 마음이 주재하여 온몸이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에 있으면 상(象)을 이루고 땅에 있으면 형체를 이룬다.” 하였으니, 이것을 사람에게 비유하면 머리의 귀와 눈은 위에서 상을 이룬 것이고, 배의 오장육부는 아래에서 형체를 이룬 것이다. 이는 〈설괘전(說卦傳)〉의 이른바 “하늘과 땅이 자리를 정했다.”는 것이고 소자(邵子)의 이른바 “한 몸에도 역시 한 건곤이 있다.”는 것이며, 바로 여기의 이른바 ‘문호와 부모’라는 것이니, 바로 하늘과 땅의 본체이다.
사람의 한 몸은 다만 기(氣)와 혈(血)뿐이니, 무릇 발로되면 천식(喘息) 즉 숨결이 되고 쌓이면 따뜻함이 되어서, 소리 내고 말하고 발로 걷고 손으로 돌리는 따위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에 속한다. 그리고 내놓으면 침〔涎唾〕이 되고 감추면 정수(精髓)가 되어서 눈물과 땀, 윤기 나는 털과 윤택한 피부 따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혈에 속한다. 기의 근본을 찾아보면 신장(腎臟)에 있고 혈의 근본을 찾아보면 심장에 있으며, 신장이 비록 기의 근본이 되나 실로 천일(天一)의 수(水)가 되기 때문에 기가 이르는 바에 물이 또한 불어나며, 심장이 비록 혈의 근본이 되나 실로 지이(地二)의 화(火)가 되기 때문에 혈이 행하는 바에 불이 또한 치성한 것이니, 이는 〈설괘전〉의 이른바 “물과 불이 서로 쏘아도 꺼지지 않는다.〔水火不相射〕”는 것이고 주자(周子)의 이른바 “음을 낳고 양을 낳아서 서로 그 뿌리가 된다.〔生陰生陽 互爲其根〕”는 것으로 바로 여기서의 이른바 ‘광곽과 곡과 축’이란 것이니 바로 음과 양의 쓰임이다. 이 장(章)은 바로 책의 첫 부분이고 여러 말의 첫머리이니, 만일 이것을 분명히 안다면 남은 것은 유추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참동계(參同契) - 이익/성호사설28권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叅同契)》는 건(乾)ㆍ곤(坤)ㆍ감(坎)ㆍ가(离)를 버려 버리고 60괘(卦)를 한 달 30일에 해당시키고, 매일 12시각을 두 괘의 효(爻)게 해당시켜서 화후(火候)로 삼았으니, 양자운(揚子雲) 경방(京房)에 비하면 비록 근사하다 하겠으나, 필경에는 안배(安排)라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왜냐면, 한 달이 30일에 다 차지 못하기에 그 그믐은 반나절 남짓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미제(未濟)의 한 괘는, 끝내 위의 두 효는 쓰지 못하고 말 것이니, 다시 어느 곳에다 처치할는지 알 수 없다. 절기(節氣)로써 말하면, 또 상당히 많은 분수(分數)가 남아 돌아서 마침내 가지런히 다듬어짐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