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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의 새 시집, 『녹색비단구렁이』2008년8월《지혜사랑》출간
김영찬(시인)
강영은 시인은 제주도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를 읽으면 바닷바람이 느껴진다. 수평선을 끌어당기는 해류가 느껴지는 시. 그의 시 행간에는 짭조름한 소금끼와 수증기로 날아오르려는 구름의 문양도 들어있다. 그리고 그 구름은 은근한 관능과 내색하지 않는 위트를 싣고 흘러간다.
그는 그 섬에서 제주여고와 제주교대를 나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금방 알게 된다. 그 섬, 제주도가 그에게 준 귀한 선물이란 바로 바닷바람과 같은 순수함, 그리고 수평선과 같이 아늑한 마음도량이라는 것을. 그는 사람들에게 까탈스럽기는커녕 누구에게나 다감다정한 친구이다. 성정이 이렇다보니 그의 문학, 그의 시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그 선입견이 틀린 건지 맞는 것인지, 이번 그의 세 번째 시집, 『녹색비단구렁이』를 촘촘히 읽으며 내면을 들여다볼 일이다.
내 목구멍은 자음과 모음의 엇박자로
울음소리를 흉내 낼 뿐
매미의 은신처가 되지 못한다
-「매미시편」 중에서
강영은의 시 행간에는 음악을 담은 해풍이 숨어있다고 나는 말했다. 그의 문장은 바닷바람처럼 부드럽다. 유달리 성악을 좋아하는 그는 가수 못지않게 노래를 잘 한다. 그가 동아리로 참여하는 <좋은시공연문학회>에서 그는 시를 음송하는 대신 멋진 랩을 구사하여 동료시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모든 시인들이 음악을 기조로 형상화를 시도하지만 그의 시가 이처럼 자연스런 음조를 얻는 이유는 제주도의 파도와 구름, 그곳의 햇빛이 그에게 영향주지 않았나 싶다.
저 풍경은 왜가리처럼 구부러진 목으로
내 생의 배후를 기웃거릴 뿐
그 구부러진 곡선으로 여기까지 온 내 몸의
밀물 드는 소리 듣지 못한다
-「왜목마을을 지나며」중에서
그의 시는 진솔하고 소박하며 과장이 없다. 아무데서나 뽑은 위 시가 보여주듯 작품 하나하나에 시인의 참된 마음가짐이 담긴 진정성이 돋보인다. 그런데도 정작 그가 취한 시의 소재는 일상사를 시시콜콜 기록하는 진정성과는 대별, 거리가 멀다. 흔히 중/장년 여성 시인들이 빠져들기 쉬운, <진정성=일상사=진솔>의 등식에서 벗어나 있어서 좋다. 시적 화자, 즉 시인의 실제 체험을 시로 승화시켜 성공하는 경우가 불가능/불합리하다거나 차원 낮은 수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능한 시인이란 자신의 체험을 한 차원 높게 숙성, 발효시켜 시적 형상화의 과정을 밟을 때 완성도 높은 시를 탄생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으면 시는 자칫 수필이 되거나 산문, 최악의 경우 일기나 서간문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화단가의 달팽이 한 마리//執을 벗고 什밖으로 나선다//
알몸으로 기어가던 달팽이 보이지 않고//표표히 빛나는 슬픔 한 채//
달팽이가 끌고 왔던 저, 꽉 찬 빈 집(輯)
그의 두 번째 시집,『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에서 발췌한 시, 「빈집」의 전문이다. 이 시를 인용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강영은의 문체는 단순 서술형이 아니고 은유, 환유를 통한 치유의 세계이다. 현실은 왜 이처럼 불온하고 답답한가. 이 삶은 도대체 빠져나갈 돌파구 하나 마련하지 않는다고 절규하는 대신 그는 조용히 독자의 귀에 대고 에둘러 은유로 속삭인다. 즉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탈출을 위한 방편으로 화자는 고뇌를 직접화법으로 발화하지 않고 함께 숙의해보자고 조곤조곤 얘기함으로써 스스로 위안 받고 치료하는 방식이다. 현실에서 겪는 모진 시련, 갖가지 비속한 일상사의 내막을 짐짓 행간에 접어두고 이렇게 담담해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무지렁이처럼 어눌해 보이는 그의 문맥 속에는, 하늘로 솟구쳐 승천하려는 이무기의 의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문장은 탄력을 받아 힘이 있고 관능적 활기까지 띤다.
엄마가 내 푸른 담요를 걷었을 때/나는 꽃이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어요./
꽃이 나에게 노크를 했거든요.//
엄마가 내 몸 속에/얼마나 많은 꽃씨를 숨겨 놓으셨는지/
보세요, 저리도 많은 발가락과 손가락들을/마구 뻗어난 길들을
-「능소화」중에서
햇살의 흰 뼈를 등에 지고 사막을 건너는 그녀/
ㅅㅅㅅㅅ, 사막의 뱀처럼 모래 무덤을 끌고 가요 /그녀 몸속에 오글거리는
빛의 맹독,/사막의 노을, 진분홍 드레스자락 펼지는 저물녘이면
-「사막장미」중에서
그 투명한 바다의 몸이 독을 내뿜었던 적 있다/벌겋게 독 오른 그날,/
바다는 내게 옷 입는 법을 가르쳤다
-「물로 지은 옷」중에서
문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난감했다/문자의, 벗은 몸이 보고 싶지만/
문자에게, 쉽게 속을 보이는 것 같았다/문자의, 눈치를 적당히 보다가
-「문자의 세상」중에서
건반 위를 튀는 손가락이 싱싱한 총알을 쏟아낸다
몸에 와 박히는 무수한 음의 총알들, 납탄 같은
랩소디 인 블루의 탄피가 귀를 파고든다
-「그가 나를 쏘았다 」중에서
이제부터 그의 시의 특질을 다른 각도로 고찰해 볼 차례가 왔다. 제주도 오름의 완만한 곡선처럼 느슨하고 문문한 그의 시행. 그 속에는 의외에도 ?므 화딸(femme fatale)적 치열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여성성 속에 도사린 남성적 아니무스로 그의 시는 다분히 박진감 넘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 卽物的 사유의 외형에 미끌미끌한 언어의 비늘을 씌워 상징적 관능미로 조형화 하는데 성공한 시, 라고 나는 우선 정의하련다.
그의 시는 놀랍게도 ‘유디트’적 관능과 ‘유레카’적 발견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이 곳곳에 들어나기 때문이다. 이 의문에 해답을 주기 위해 위의 시들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인지하기 위해서라면 시집 도처에 감춰진 관능적 요소와 일상에서 스쳐 지날 번한 인식에 제동을 거는 그의 어법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유디트적 관능과 유레카적 발상>, 어느 쪽에 비중이 더 실려 있는지 독자 스스로 판단하며 읽을 일이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언어는 유별나게 관념에 묶이기를 싫어하고 부동자세를 취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동작을 멈춘 언어들이란 죽어있는 존재, 죽음이나 다름없다. 우물에 든 달빛도 풀어줄듯 갇혀있는 언어에게 동작을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 그래서 강영은의 문체는 뛰어오를 듯 액션이 주어지는 동시에 유레카적 발견의 순간이 합쳐져 묘한 감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녹색비단 구렁이」중에서
그의 의도는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언어를 육탈시켜 시적 형상화로 세계를 통합 시려는 것. 그러므로 아직 용이 되지 못한 그의 언어들은 여의주를 찾아 부단히 헤맨다. 그는 그의 분신인 이무기(녹색비단구렁이라는 신분)들을 육탈시키기 위한 날개부터 찾는다. 그러나 용이 되기 이전인 이 이무기들은 날갯죽지 없는 양날의 팔뚝으로 몸부림치다가 때로는 어렵사리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쾌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 용트림, 진저리침의 몸짓에서 그의 언어는 가히 '?므 화딸'적 격정을 치르기도 한다. Femme Fatale, 치명적 파국을 불러올 위험천만한 여성성.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열애에 빠지는 그의 언어유희는 매혹적인 지평을 넘어 가히 유레카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 과정은 곧잘 고통을 수반하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가 유디트적 사디즘을 낳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떻든 절정에 닿기까지 언어의 궁극적 도정은 멀기만 할뿐, 아직 용이 되어 비상하지 못함으로써 화자가 처한 언어 현장은 비애와 고통 속에 놓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적장의 목을 칼로 따는 애국여성, 유디트의 행위처럼 과격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강영은이 취하는 태도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근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유화로 옮긴 유디트의 새로운 여성상과 일맥상통한다. 즉, 어떤 목적을 앞세우기 전에 시의 화자는 여성성을 구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인지한 점이다. 여성의 힘은 관능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의미를 부각시키기보다는 여성적인 관능미를 슬쩍 끌어들인 그의 문체가 돋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것이 강영은의 시가 높은 점수의 예술성을 획득하는 관건인 것이다.
*보석처럼 박히는 몇 개의 단어들, 가슴에 들어와 프리즘에 꺾이면 격정적인 비애를 내비치는 굴광성 언어들. 어떤 시들은 침묵의 긴 꼬리를 데리고 밤하늘을 가로질러 오고 어떤 시들은 그렇게 긴 탄식을 몰고 밤바다로 온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연민의 정을 함께 나누게 된다. 만일 <유디트적 관능과 유레카적 발상>이 그의 시 일부에만 국한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시어들은 비 갠 날의 창가에 찾아와 멈춘 뭉게구름처럼 다정다감하지 않은가. 그를 불러낸 바닷바람의 순결. 그 속에 유디트의 의도가 숨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관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순진무구한 체취의 배후에 착한 감성을 길러준 제주도가 있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게 되는 건 과장된 헌사가 아니다. 출렁이는 제주도의 파도를 타고 그의 시가 더 넓은 세계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08, 시선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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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와 음악과 삶의 여정 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그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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