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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빌립 집사
사도행전 8장 4-13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세상에 하나님의 제사장과 대사로 세우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표로서 모든 삶에 하나님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그 결과, 성도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영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부환경에 따라 쉽게 들뜨며 낙심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도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하고 난 뒤에 초대교회에는 말할 수 없는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핍박을 피하여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흩어진 곳곳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들을 치유합니다.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은 그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으며, 영향력 있던 마술사 시몬도 빌립이 전한 복음을 믿고 빌립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4-8)
성령 충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서로 모여 합력하라고 하십니다. 함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끼리 받은 은혜를 나누고만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흩어지라고 하십니다. 세상으로 흩어져 받은 은혜를 증거 하라고 명하십니다.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4-8)
하나님께서는 핍박 받은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함께 촉발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의 광풍이 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큰 슬픔으로 스데반을 장사지냈습니다. 박해를 통해 몇몇 성도들만 사방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⑴ 사방에 흩어진 성도들(4)
각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다니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과정을 상세하게 다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4)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큰 박해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로 시작합니다. 정든 집을 떠나야 했고, 가족이든 교회든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도들의 흩어짐은 패잔병들의 도망이 아니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곳곳을 두루 다니며 그것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흩어짐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핍박을 피해 도망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역지를 이동시킨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에 전해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말이 통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곳으로 흩어졌을 것입니다.
⑵ 빌립 집사의 등장(5)
누가는 본 단락을 일곱 일꾼 중 한 사람인 빌립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유독 빌립만 다른 유대인 성도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누가는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일곱 집사였던 빌립은 사마리아 땅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독특한 이유는 다른 성도들은 동족 유대인들에게만 전할 때, 짐승처럼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향했던 것입니다. 그는 스데반처럼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뽑았던 일곱 집사 중 한 명입니다. 그 역시 스데반처럼 집사로 뽑히기 전부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직접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8:26)고 들을 만큼 신령한 영적 소통 능력을 구비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흩으신 것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지만, 일반 성도들 중에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먼저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증거 한다면 따라가겠지만,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립은 탁월한 영적 감각과 소통 능력으로 이 때가 바로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까지 예루살렘만 머물고 사마리아에는 들어가지 않았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갈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이 갈등의 뿌리는 가나안 정복 시절 유다가 다른 지파들과 분리되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신명기 33:7). 포로 시절 이후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집니다. 하지만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리심 산에 세워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합니다.
그 이후 주전 63년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사마리아는 유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두 지역 간의 갈등은 신약성경과 요세푸스의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더 깊어집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심각한 갈등 상황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은 매우 담대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들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자신들은 자격 없는 자들에게 주신 사랑을 받았지만, 그래서 성령께서 이 큰 장벽을 큰 박해라고 하는 방법으로 치신 것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갑니다.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흩어지는 것은 고통과 고난을 의미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광범위하게 전해지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곧 비유대인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데 박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습니다. 누가는 이제 그 심한 박해로 인해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⑶ 사마리아에 일어난 부흥(6-8)
빌립 집사는 박해를 피해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 내려가서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과 같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영접한 것은 정말 유대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① 빌립의 사역(6-7)
여기에 언급된 빌립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닙니다. 6장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출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6-7장에서 그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의 행적과 죽음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8장에서는 빌립 집사의 행적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러나 빌립이 사마리아의 어느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 중에서 누가만 예수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한 이야기를 다룹니다(누가복음 9:52; 10:30-37: 17:11-19). 이러한 사실은 예수가 직접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요한복음과 맥을 같이합니다(요한복음 4:4-42). 또한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신학을 부각합니다.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인들도 ‘타헵’ 혹은 ‘회복자’로 알려진 장차 올 구원자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빌립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관심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18장 15-19절에서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모세가 말한 이 선지자가 이미 오셨고,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했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였던 자들이 일어나고 못 걷던 사람들이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눈요기로서만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 나라가 사마리아에도 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켰고 지속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라고 표적보다 말씀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사역한 내내 말씀에 집중했을 보여줍니다.
② 사역의 결과(8)
하나님께서는 빌립을 통해서, 그가 전한 복음을 진리임을 사마리아인들 앞에서 귀로 듣게 하시고, 눈으로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도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또한 기적으로 확인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박해 때문에 울었던 예루살렘 성도들이, 흩어져서 부정한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우상숭배의 도시 사마리아에 큰 해방의 기쁨, 치유와 구원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있는 곳에 큰 기쁨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큰 기쁨이 항상 머무는 가정과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마술사 시몬(9-13)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전화위복으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을 사용하셔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큰 기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소망을 품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았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9-13)
엇뜻 보기에 교회는 세상에 비해 힘이 없어서 세상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는 세상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 질서를 뒤엎습니다. 세상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이에 반목과 분열을 해결할 수 없었지만,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⑴ 사마리아의 대표인 시몬(9-11)
지금까지 사마리아 백성을 사로잡았던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빌립이 오기 전까지는 사마리아 백성에게 신적인 존재, 즉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9-10). 누가는 시몬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자칭 자기를 ‘큰 자’ 즉, ‘위대한 자’라고 말하면서 마술을 통해 사람들을 매혹시키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의 마술에 속아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칭송하며 그를 따랐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신약성경은 본문에 기록된 것 외에 다른 정보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를 마술을 행하는 자로 소개함으로써 후대 전승은 그에게 ‘마술사 시몬’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몬의 말에 좌우되었습니다. 그가 사마리아의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영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마술사(마고스)’라는 단어는 나중에 이 구브로 섬 바보에서 만난 ‘바예수’라고도 하고 ‘엘루마’라고도 하는 자를 소개할 때도 사용됩니다(행 13:6,8). 한편,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하는 동방으로부터 온 ‘마고스’(흔히 ‘동방박사’로 부름)는 마술사라기보다는 점성가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시몬이라는 인물은 후대 교부 문헌에서는 영지주의자의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순교자 유스티 누스는 그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임 시절 로마에 가서도 추종자들을 얻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누가는 이 사람이 자신의 마술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합니다. 시몬이 자기 자신을 어떤 인물로 소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시몬의 과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소개한 이유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던 시몬이라는 인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시몬에게 쏠렸던 관심이 이제는 빌립에게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 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할 때에 그들이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은 성령을 통해 사람과 인생관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 사마리아는 시몬의 마술을 통해 현혹하고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술을 통해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빌립 집사는 진짜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큰 기쁨을 진정한 회복의 기쁨을 주었던 것과는 다르게, 거짓 마술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시몬을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으면서 신적인 존재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⑵ 빌립을 통해 변화된 시몬(12-13)
‘사마리아의 신’인 시몬이 빌립의 역사를 보고는 회심합니다. 시몬은 어느 날부턴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 빌립에게 간 것을 알게 됩니다. 빌립을 찾아왔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했던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 앞에서, 거짓의 종교인 시몬의 무능력함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을 보고, 시몬도 항복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자가, 이제는 성령의 큰 역사 참다운 능력을 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거짓 기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그가 이제 성령을 통한 진짜 능력을 보고 놀라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따르게 하던 자가, 이제는 빌립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2절의 주석적 의미에 대해 학자들의 해석은 엇갈립니다. 일부 학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을 믿은 것이지, 그가 전한 복음이나 혹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법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믿었다’는 의미에서 믿는 대상이 여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피스테오 동사에 여격이 뒤따를 경우, 어떤 대상을 마음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한 지적 동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누가는 16:34과 18:8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문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두 개의 구문 모두 단순한 지적 동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갑니다. 누가가 ‘빌립을 믿었다’라고 말할 때 사마리아인들의 불완전한 믿음을 말하려고 한 젓인가, 아니면 온전한 믿음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후자의 해석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이 전한 복음을 마음으로 믿었고, 그 믿음에 대한 외적 표징인 세례를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누가는 사마리아인들의 회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가 사마리아인들의 회심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그 문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빌립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이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예수가 지상에서 선포하신 메시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귀와 성령강림 이후 메시지의 강조점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분이 이제는 선포된 복음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제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초대교회의 이해가 한 단계 더 성숙하고 발전을 거듭한 셈입니다.
지금도 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이 사람을 거듭나며, 복음으로 양육시켜서,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증인이 되도록 합니다. 복음은 변화를 일으키고, 세계를 뒤바꾸고,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습니다. 충실하게 복음 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