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하여라. -
☆ 2014년 가해 3월14일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수도회] 역시 회개가 답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에제 18, 21 - 28
† 복음 : 마태 5, 20ㄴ - 26
★ 에제키엘 예언자가 악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경고한다. 악인이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살 것이며, 의인도 정의를 저버린다면 죽고 말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어떤 의로움인지 예물을
바치러 제단에 가기 전에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도의 간디는 이러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실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다. 그대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
지금 당장 그 결실을 얻는 것은 당신의 능력 밖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행동으로 어떤 결과가 얻어질지 당신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간디의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실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라는 간디의 말을 저는
믿습니다. 옳다고 믿는 일을 향해 온몸을 던져 실천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값진 일입니다. 행위의 결과가 우리에게 미칠 이해득실을 따지며 앉아 있는
일보다 옳다고 믿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간디의 이러한 확신은 회개하는 삶에 대한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진리를 선택하는 것이지만 그 진리는 인식의 진리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회개가 근본적으로 목적하는 것은 수행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실행하는 용기 없이는 긴 성찰도, 꼼꼼한 반성도 결국은 헛수고로
그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화해하는 것을 의로운 삶, 곧 회개를 통해 선택할
올바른 삶의 으뜸가는 실천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걸음을 '지금 여기서' 돌이켜 화해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긴 숙고나 이에 따른 어려움에 대한 현실적 예측의 시간은
지났습니다. 지금이 바로 행동할 때입니다. 그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
자신을 수행의 진리로 던지는 용기를 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다 가지십시오.
2014년 가해 3월14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 5,20ㄴ-26
2009년 2월. 저는 혼자서 개인 피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정 중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제 마음속에 큰
어른으로써 영원히 그 자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주님
곁으로 떠나셨다고 하니까 참 먹먹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저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조문객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섰었지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명동성당을 찾아가 조문을 했던
것이지요.
역사 안에서 큰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을 접하게 됩니다. 큰
어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
가지십시오.”라는 남과 다른 생각을 갖고서 철저하게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본 받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생활하고 있으며, 남보다 내가 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이러한 큰 어른이 없다고들 말하네요. 그런데 왜
특별한 사람만이 큰 어른이 되어 자기희생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어야
할까요? 바로 내 자신이 “다 가지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과 사랑을 전달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을까요?
의자에 앉아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많은 것들을 바라봅니다. 그중에서도
연필꽂이에 가득 꽂혀 있는 필기구가 눈에 띕니다. 볼펜 한 자루면 몇 달을
쓰고도 남을 텐데 왜 이 많은 필기구를 소유하고 있었을까 싶습니다.
책장을 바라봅니다. 책이 많아서 겹겹이 쌓아두었습니다. 또 책이 너무
무거워서 책장의 가운데가 크게 휘어졌습니다. 다 읽은 책을 또 다시 볼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텐도 쓸데없이 책장만 채우고 있구나 싶습니다.
옷장을 열어봅니다. 빼곡하게 걸려 있는 옷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옷 몇
벌이면 충분한데도 버리고 나누지 못해서 옷장을 가득 매우고 있었습니다.
“다 가지십시오.”라는 마음가짐. 남이 표현하면 좋고, 나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마음가짐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말씀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율법조항만 지키면 그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이상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역시 똑같이 재판에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성을 내면 재판에 넘겨지고,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면 최고 의회에 넘겨지며, ‘멍청이’라고 하면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 가지십시오.”라는 마음가짐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 조문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기쁨이 원망보다 더 강하고 더 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전국 성소국장 회의를 마치고 정리하면서... 힘들어서 또 몸살감기 걸렸네요.
주님의 나라에서 대박 납시다.
지금 현재 미국 메이저리그의 추신수 선수는 작년 FA 계약을 통해 텍사스와
7년간 1억 3000만 달러(약 1394억 원)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평균 1857만
달러(약 199억 원)를 수령하게 되었지요. 매년 199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통장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던 그의 땀과 노력이
이러한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문득 로또 복권을 떠올려집니다. 우리나라에서 매주 약 천만 명이 대박을
노리면서 복권을 구입한다고 합니다. 1등에 당첨된다고 해도 199억 정도가
아닌, 약 10억 원 정도 받는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행복한 마무리를 못한다고 하지요. 흥청망청 쓰다가 결국은
알거지가 되는 경우가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80% 이상이랍니다.
거액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알거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 흘린 땀과 정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에 의해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그렇지 않지요.
주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들의 목표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냥 ‘어떻게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허황된 욕심을 버리고 대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떠날 이 세상 안에서의 대박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주님의 나라에서 대박 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순 제1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3월14일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 5,20ㄴ-26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미움, 원망, 증오는 또 다른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목요일에는 서울 신학교에
올 일이 있었습니다. 용문 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웬 자매님께서 제게
서울 가는 기차를 어디에서 타는지 물어 보셨습니다. 저는 제가 서울로 가기
때문에 저를 따라 오시라고 하였고, 가지고 있던 명함을 드렸습니다. 그
자매님은 제가 드린 명함을 보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병환 중에 있는 남편과
아빠를 위해서 휴학 중인 아들과 수련장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자매님은 불교를 믿는 불자였지만 사제인 제게
의지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자매님의 집에 가서 축성을 해 주었고,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작년 10월 말에
자매님은 남편이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수녀님께서
오셔서 대세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을 위해서 장례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저는 용문에서의 인연도 있고, 그분들이
신자가정이 아니라서 장례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자매님은
따님과 함께 명동으로 찾아왔고, 다도를 공부하신 자매님은 제게 차를
선물하셨습니다. 저는 성소후원회 지구 대표 피정에 그 자매님을
초대하였습니다. 자매님께서는 ‘향기가 묻어나는 차’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오늘 새벽, 기도 하면서 자매님께서 주신 ‘보이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서울 가는 길을 알려 주었을 뿐인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모든 것들은 사실 전체 안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칙과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작은 티끌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컵의 물에 있는 에너지로도 지구상의 모든 물을 증발 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친구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신부님께서 동창모임에서 제게 본당 사순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동창신부는 제게 이야기 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을 했고, 저에게도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된 것인데 저는 다른
동창들에게 친구의 잘못을 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친구도 사과를 하였고,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말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을 하는 본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험담과 비난을 받는
당사자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역시 회개가 답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14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에제18,21-28 마태5,20ㄴ-26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 5,20ㄴ-26
역시 회개가 답이다
오늘 강론은 '역시 회개가 답이다' 라는 묵상 나눔입니다.
인생광야여정을 압축하는 사순시기는 회개의 여정이자 회개의 시기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개인주의적
이기적 삶에서 형제애의 공동체적 삶으로, 과거와 미래에서 현재의 지금
여기 하느님 제자리에로의 귀환이 회개입니다.
전통단절의 시대, 공동체 붕괴의 시대, 약육강식, 승자독점의 자본주의
시대, 날로 기계화, 시스템화 되어가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하느님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개는 절박합니다. 끊임없는 회개 없이는 자기를
잃어, 영혼을 잃어 괴물이, 악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대죄는 딱 둘입니다. 절망과 이웃에 대한 무시와
멸시입니다. '넘어지는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게 죄이다.'
제 지론일뿐 아니라 주님의 뜻도 그러합니다.
실수나 잘못으로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이나 자포자기로 곧장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다보면 영적탄력도 떨어져 온갖 질병에
급기야는 자살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제가 즐겨 써드리는 고해성사 때 보속 처방전 말씀의 약입니다.
'지난간 일을 생가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과거에 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말고, 과거는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현재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지금 여기서의 삶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르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살것이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하느님에게는 일체의 기득권도 소용이 없습니다.
의인에게 자만은 금물이며 악인이라 하여 절망도 금물입니다.
의인을 분발케 하는 말씀이며 악인에게는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현재 지금 여기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구원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절망에 이어 이웃에 대한 무시와 멸시, 차별이 대죄입니다.
급기야는 살인에 까지 이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순수가
이에 대한 답입니다. 회개를 통한 마음의 순수가 무시와 멸시, 차별 의식을
존중과 사랑, 배려와 공감으로 바꿉니다.
바로 이게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 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아예 살인의 뿌리인 성을 내는 일이나, 무시와 멸시에 기인한 바보,
멍청이라는 욕설도 마음의 순화가 아니곤 근절시키기는 불가능합니다.
모두 마음에서 나온 간접적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순화와 사랑만이 이런 간접적 살인행위를
근절시킬 수 있습니다.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을 때 지체없이 화해하고
제단에 예물을 바칠 수 있음도 이런 끊임없는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순결한 마음을
선사하시며 사랑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에너지 전환의 첫 걸음/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순 제1주간 금요일(2014년 3월 14일): 에너지 전환의 첫 걸음
우리 안에는 화가 있지요. 분노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원망의 감정이 맺히면 몸이 반응합니다. 우리 몸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우리 몸은 우리 자신에게
정직합니다.
혹시 지금 몸이 굳어 있습니까? 그건 어떤 것 때문에 마음이 굳어 있다는,
화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다는 표지일 수 있습니다. 분노를 표출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내 안에 계속 남아 있다면 문제이지요.
우리 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 화가 나있는 상태라는 것을요.
사실 화와 원망은 우리 내면의 에너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내면의
에너지는 부정적인 색깔로 나올 수도 있고 긍정적인 색깔을 띌 수도 있지요.
분노와 원망의 에너지를 화해와 사랑의 에너지로 변모시켜야 합니다.
분노와 원망의 에너지는 우리와 상대를 갈라놓고 죽이지만,
사랑과 화해의 에너지는 우리 모두를 가깝게 하고 살게 합니다.
나 자신부터 내면에서 에너지 변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변모의 첫 발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세요. 마음의 문을 열고 축복을
빌어주세요. 그 사람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정성껏 기도하세요.
이것이 에너지 전환의 첫걸음입니다.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세요.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수십
번 수백 번을요.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세요.
“주님, 제 자신은 용서할 힘이 없지만, 당신은 축복하실 수 있나이다.
그 형제를 축복하여 주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의로운 사람이란?
2014년 가해 3월14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복음 : 마태오 5,20ㄴ-26
< 의로운 사람이란? >
한 구도자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찾는 것을 본 사탄은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돌아서도록 힘껏 온갖 수단을 다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엾은 구도자에게 재산, 욕정, 명성, 권력, 위신 등 있을 수 있는 온갖
유혹을 다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자는 영적인 일에 제법 경험이
있었기에 그 유혹들을 쉽게 싸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스승 앞에 갔을 때, 그는 스승이
융단 의자에 앉아있고 제자들은 그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좀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성인들의 으뜸가는 덕인 겸손이 모자라는군.’
그러고는 그 스승에 대하여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다른 점들도 살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세상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찾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의 눈길도
주지 않는군.’
그리고는 혼잣말로,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아첨을 안 하니까 그럴 테지”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뭔가 잘난 척하는 말투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이 모든 점들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기가 잘못 찾아왔으며 어디 다른 데를
계속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구도자가 방을 나서자, 방 한구석에 앉아있던 사탄을 본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탄아. 그는 애초부터 네 차지였다.”
[개구리의 기도 1, 6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의로움’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인데,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의로움’의 의미를 명확히 새기고 살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일까요?
루카복음 18장 9절에서 14절에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바리사이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우선 바리사이는 불의나 죄를 짓지도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단식을 통한 절제생활과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십일조도 철저히 내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는 행동으로는 이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신실한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의롭게 되었다.’라는 말은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완전한 삶을 산 바리사이가 아니라, 온갖 죄를 저지르는
세리만이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그는 뒤에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의로움’이란 결코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낮추어 누구도 평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청하지만,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 세리를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의
자리가 심판자가 아니라 용서를 구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면서 어떻게 동시에 심판자처럼 남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자리를 아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심판한다면 하느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움이고 정의입니다. 따라서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이 ‘의로움’이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의로운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형제를 심판하여,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거나, ‘성’을 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르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살인자가
어떻게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을 살인자와 같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가끔은 ‘내가 이렇게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아무 것도 안 하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봉사하면서 남을 판단하게 된다면, 내 구원을 위해서라도 봉사를 잠시
접는 것이 낫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도 위대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찌 될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이고 나의 의로움도 하느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바랐던 세리의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지닐 때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모순(矛盾).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내가 원하지 않는 내가 있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2014년 가해 3월14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오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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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矛盾).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 없는 단어임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모순이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듯 하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조차 없다.
조금만 차분히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쩌지도 못하는 그런 모순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늘 무엇인가를 청하는 우리의 삶이지만, 타인의 청에는 소극적이고, 때로는
모른 척 하기까지 한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이면서도,
타인의 작은 잘못에도 관대하지 못하다. 언제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하는데 인색하고 서툴다.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어둠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의 희생적인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 알면서도, 내 몫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분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아니 그분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삶을 보여드리기도 한다.
그 내용을 일일이 열거해서 무엇 하겠는가?
어쩌면 세상도, 그 세상 안에 있는 교회도,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도
평생 자기모순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계신지도 모른다.
싸워야 한다. 내 안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선을 선택하고자 싸워야 한다.
이것이 복음적 삶이다.
하느님의 논리는 늘 간단하고 분명했다.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
구원의 의미는 그분께서 일러주신 길로 걸어갈 때 존재한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수없이 걸려 넘어진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변함없이 기다리신다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모두 영적 혈연이라는 거지요.
2014년 가해 3월14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 5,20ㄴ-26
모두 영적 혈연이라는 거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며 바치는 주의 기도가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 가족이라는 것은, 영적 혈연이라는 거지요.
영적 혈연은 영혼들이 한 근원 이라는 뜻, 정신 멍한 경지를 느낍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라는 말씀에서 마음의 눈빛도 신비해 집니다.
나의 존재, 나의 주소가 지상에서 영의 세계로 여행하는 기분이 느껴집니다.
마치 사이버 세상에서 놀 듯, 영적세계의 엄청난 공간이 약간 감잡히네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오 5,23~24)”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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