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60)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39) – 야고보서 강해(1)
야고보서 강해(1) – 야고보서 1장
야고보서는 야고보 사도가 아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편지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다가(요7:2-5)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고전15:4-8), 회심을 하고, 마가의 다락방 기도 모임에 참여하고, 성령을 받아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된다.(행1:12-14)
시험을 이겨내는 검증이 축적되면서 인내심이 강화되고 다음 시험도 감당하게 된다(1-15)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인 수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야고보는 이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행8:1) 열두 지파(퓔레)에게 먼저 인사를 전한다. (여기서 바리새파처럼 신념을 공유한 집단을 나타내는 단어인 하이레시스를 쓰지 않고 혈족관계를 나타내는 퓔레를 사용했다는 것은 수신자들이 혈족 공동체보다도 더 하나가 된 자들이 아닐까 짐작하게 있다.)
그러면서 그대들이 이런저런 시험(페이라조-test)을 만날 때마다 그것들을 모두 기뻐하라고 권면를 하고 있다. 그대들의 신뢰함에 대한 검증(도키마조-prove)이 인내심을 길러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시험을 당할 때마다 시험을 이겨내는 검증이 축적되면서 인내심이 강화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음에 오는 시험(유혹)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시험은 계속 오기 마련이다. 그 시험은 형벌 때문에 오는 것이며, 우리의 싸르크스가 죽지 않기 때문에 계속 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내심 강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인내심이 온전히 작동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누구든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고, 신뢰함 속에서 구하고 조금도 망설이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망설이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서 모든 가는 길이 변덕스럽기 때문에 주께로부터 무엇이든지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험을 당할 때 인내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검증이 되면 주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화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면류관이 아님)
그리고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싸르크스의 에피듀미아, 즉 자기의 욕망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또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욕심이 지배하면 죄를 낳게 되고 죄가 완성되면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진 자들은 말씀을 실천하게 된다(16-27)
하나님은 선한 은혜와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데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도 일관되게 은혜를 주신다고 설명하면서, 아버지께서는 의도하신 대로 당신의 창조물들 중에서 첫 열매가 되게 하시기 위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노는 여러 감정 중에 하나지만 그 뿌리는 자기에게 피해가 오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분노하는 것이다. 즉 호불호와 유불리 판단에서 분노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분노든 정당화 될 수 없다. 분노는 불결함과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들의 목숨을 구원할 수 있도록 마음에 새겨 주신 말씀을 온순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즉 수신자들은 새 언약이 성취되어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심겨진 자들이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그대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1:22)
주석이나 해설서들을 보면 야고보서가 이신칭의와 충돌하기 때문에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가 오독한 것은 로마서이다. 율법을 실천하는 자가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도(롬2:13=1:22 사도 바울은 야고보서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을 주장한다고 오해한 것이다.
들음과 실천 사이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새로운 창조가 있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동의하고 소망하게 되면 회개와 간구하는 가운데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실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7:26-27)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 중에서 마리아가 더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말씀을 모르는 상태, 즉 진리를 모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리아가 남인 것이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는 실천을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마리아가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예수님에게 불평을 한 것이지만 마리아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눅10:38-42)
그러나 이것은 첫 발이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동의하고 소망하게 되면서 회개와 간구를 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하시고, 그리고 나면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말씀, 오직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첫 문을 연 것이고, 마르다는 그냥 정상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야고보도 사도 바울도 그 순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오직 믿음으로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광신자가 되라거나 도덕 군자가 되라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광신자나 도덕 군자가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하나님의 은총에 기댈 수밖에 없고, 그 결론으로 이신칭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도 하나님의 계명이 네 입고 네 마음에 있으면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예수님도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을 줄 테니까 하나가 되어 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을 주시면 하나님의 명령인 하나 됨이 쉬운 것이다.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네 마음에 심어 주신다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도 기독교도 율법의 여섯 조항을 시민법으로, 즉 윤리 도덕으로 해석을 했는데, 그것은 전부 남이며 경쟁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6가지 조항이 안 지켜지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저 거울로 자기 얼굴이 생김새만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나서 거울을 떠나서는 곧 그 모습이 어땠는지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하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듣고 나서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않고 실천하는 자가 되며, 그 실천함으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누가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싸르크스가 원하는 대로 막말을 하게 되고 억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온 새 마음(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새 마음이 온 사람들에게 쓴 편지인 것이다. 새 마음이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편지이며 그들은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하고 순결한 경건은 이것이니 환난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 흠결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세상 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며 세상 원리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고아와 과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은 환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고아와 과부가 대표적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과 예수님의 말씀들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된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엄숙 자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