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가을호 반경환 {사상의 꽃들}에서
아주 작은 유언
조 성 례
저녁거리 쌀을 씻어놓고 식탁에서 책을 펼친다
텅 빈, 동굴, 정적
어느 곳에선가 톡톡
연이어 노크하는 소리
귀 기울여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
소리의 길을 찾아 들어가니
살가죽을 불리면서 내는 물속의 쌀이다
거죽이 터지는 아픔의 소리 낼 때마다
쌀은 조금씩 순간이동을 하고 있다
소리만큼이나 작은 움직임
고 작은 몸이
저처럼 고통스러운 소리를 낼 줄이야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생의 마지막 길에서
무언가 말하고 있는 쌀을 본다
다시 책으로 들어가 보지만
톡톡톡
다시 귓전을 두드리는 소리
오늘은 저 마지막 말씀이나 새겨들어야겠다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자연은 먹이사슬의 형태로 되어 있고, 그 어떤 생명체도 이 먹이사슬의 구조를 벗어나 존재할 수는 없다.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크나큰 중죄이지만, 그러나 이 원죄 자체를 너무 신경 쓰거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먹는 자 역시도 꼭, 그만큼 자기 자신의 육체를 먹이로 제공하고 죽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죄 중에서 가장 고약하고 뻔뻔스러운 중죄는 이 자연의 법칙(생명의 법칙)에 반하여 다른 생명체들을 노리갯감이나 장난감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더욱더 나쁜 것은 자기 자신의 부채를 상환하지 않기 위하여 수명을 연장하거나 자기 자신의 시체에 방부처리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과연 우리 인간들이 동물원의 쇠창살에 갇힌 수많은 동물들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과 그 심리 상태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었고, 또한, 우리 인간들이 맑은 공기와 대자연의 숲과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하는 동물들의 모든 권리를 다 박탈한 채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학대와 조롱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제대로 반성을 하고 그 동물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려는 노력을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오늘날의 동물원의 수많은 동물들과 인간 가정의 수많은 반려동물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된 동물들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 60의 수명연장’을 위해 그토록 엄청난 자연환경과 생태환경을 파괴한 것은 물론, 레닌이나 스탈린, 또는 모택동이나 김일성 등과도 같이 그들의 시체를 방부처리하여 한사코 부채상환을 거부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며, 우리 인간들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방자함으로 간섭하지 않을 때, 동물과 동물, 식물과 식물, 인간과 인간, 산과 들과 바다 등이 저절로 균형을 이루며 이 지구촌의 평화를 이룩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성례 시인의 「아주 작은 유언」은 쌀의 유언이며, 시인이 쌀로 분장을 하여 그 ‘고통의 신음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매우 아름답고 멋진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쌀의 신음과 고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조성례 시인의 아주 섬세하고 여린 마음과 ‘아주 작은 유언’을 들려주는 시인의 앎의 깊이가 너무나도 시적이고, 너무나도 인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녁거리 쌀을 씻어놓고 식탁에서 책을 펼”치며, “텅 빈, 동굴, 정적/ 어느 곳에선가 톡톡/ 연이어 노크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 “소리의 길을 찾아 들어가니” 쌀이 “살가죽을 불리면서 내는” 소리였고, 그 “거죽이 터지는 아픔의 소리 낼 때마다” 쌀이 “조금씩 순간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조성례 시인은 “고 작은 몸이/ 저처럼 고통스러운 소리를 낼 줄”을 미처 몰랐던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러나 쌀이 이 생의 마지막 길에서 그토록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로 유언을 남기고 있었던 줄은 몰랐던 것이다.
조성례 시인의 「마지막 유언」은 우리 한국인들의 주식主食인 쌀들의 유언이며, 그 쌀들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함을 노래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살가죽을 불리면서 내는 쌀의 소리, 그 거죽이 터지면서 조금씩 순간 이동을 하며 그 아픔이 내는 소리, 쌀도 생명이며, 그 최후의 순간에 그처럼 아픈 유언의 소리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명예를 위해 살았고, 오점 없는 생애를 마친다’고 하는 것일까? ‘나는 농부의 보살핌에 따라서 너무나도 즐겁고 기쁜 삶을 살았다’는 것일까? ‘이 세상의 삶은 다 부질없고 허무하다’는 것일까?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곧바로 죽는 것이 차선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조성례 시인은 쌀들의 유언을 들으며,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톡톡톡/ 다시 귓전을 두드리는 소리/ 오늘은 저 마지막 말씀이나 새겨들어야 겠다/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라는 시구에서처럼 너무나도 경건하고 엄숙하게 쌀들의 마지막 유언을 받아 적는다.
쌀도 살아 있는 생명이고, 쌀 한 톨과 밥풀 하나라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쌀 한 톨을 먹는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쌀의 에너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조성례 시인의 머리에는 깊이가 있고, 그의 가슴에는 열정이 있다. 시인의 머리로는 쌀의 유언을 받아 적고, 시인의 가슴은 쌀의 고통의 소리를 더욱더 크나큰 사랑으로 감싼다. 시인의 언어는 영혼과 영혼, 사물과 사물의 교감 끝에 얻어진 언어이며, 아주 극소수의 시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예술품 자체가 된 언어라고 할 수가 있다.
쌀도 생명이고, 나무도 생명이다. 풀도 생명이고, 수많은 돌멩이들도 생명이다. 유기체와 무기체, 즉,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함부로 구분한 것은 우리 인간들의 오류 중의 가장 큰 오류라고 할 수가 있다. 땅도 신음을 하고, 강도 신음을 하고, 돌멩이와 모래와 금은보석도 신음을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범죄는 인간에게 좋은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어떤 생명체와 자연마저도 다 파괴할 수 있다는 인문주의라고 할 수가 있다. 하루바삐 자연을 함부로, 제멋대로 파괴하고 살생을 일삼은 죄를 뉘우치고, 자연의 법칙에 따른 순리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학과 생명공학, 모든 제약회사들과 병원들을 다 파괴하고 해체할 때, 이 지구촌의 평화와 행복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