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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김은호목사/열등감을 극복하라 (고후 12:7-10)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습니다. 영적인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아
버지의 품을 떠난 것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
니다. 그러면 상처는 누구로부터 받습니까? 상처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믿었던 사
람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중의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로부터 받습니다. 그
리고 존경하던 선생님이나 가까운 친구나,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받습니다. 나를 모르는 사
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부터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든지, 나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든지 그것은 별로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않게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의 말 한마디
는 비수처럼 나의 마음에 꽃일 수 있습니다.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의 상처 가운데 가장 많은 상처는 바로 열등감의 상처입니다. 맥츠웰 말츠박
사는 "세상 사람들 중 적어도 95% 정도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물론 열등감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에 보면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열등감을 극
복하지 못하면, 열등감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
합니다. 열등감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그 열등감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낙망합니다.
열명의 정탐군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열명의 정탐군들의 보고를 들은 다음 가나안 족속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기 시작했습
니다. 정말 그들의 성읍은 견고했고 그들은 아낙자손처럼 신장이 장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 집단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혔습
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원망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
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열등감의 상처가 많으면 많을수록 쉽게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또 열듬감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좇지 못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작은 독재자」돌푸스 수상을 아십니까? 그는 나중에 나치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신문 기자가 작은 독재자 돌푸스의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키가 135㎝의 단신이었습니다.그때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하여 이
렇게 말했습니다. "제 아들은 결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돌푸스는 소년시절 사제
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너처럼 키가 작은 사람이 어떻게 사제가 되
겠느냐'고 놀렸지요. 돌푸스는 그때부터 열등감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은 독재자가 된 겁니
다." 이렇게 열듬감이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 성격과 기질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
람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은 반드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열등감의 상처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열등감이란?
그러면 열등감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여 자신을 무능,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만성적인 자기개념이라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건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 자신
과 다른 사람을, 나의 환경과 다른 사람의 환경을 늘 비교 평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
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11평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사는데 아무개 엄마는 94평짜
리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저 친구는 대학원까지 나
왔는가? 내가 가진 물질,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내가 가지고 있는 학력, 나의 능력, 나의
가문, 나의 외모, 나의 자녀를 비교하며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 자녀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 남편을 어떻게 평가할까?를 생각하며 살아갑니
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잘 밖으로 표출되지 않
고 무의식 속에 숨겨 있어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하시켜 자신을 무능,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만성적인 자기개념을 열
등감이라고 말합니다.
□ 모든 사람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사람은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우
리 인간은 보이지 않는 열등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열등감이 높고 능력이 많은 사람은 열등감이 없을 줄로 알지만 실제로 능력이 많은 사람이
열등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
생과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중 누가 자살을 많이 할까요? 실제 통계로 보면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몇 년전 이런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평소에 반에서 쭉 1등을 하
던 아이가 갑자기 성적이 5등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심한 고민을 하다가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65등 한 학생은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았는데 5등한 학생은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열등감은 능력이 없는 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등감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는 잘 하는데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
습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은 있는데 가문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는 자
신이 있는데 언어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가문에 대한 열등감 배우
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듬감, 능력에 대한 열등감, 성에 대한 열등감, 언어에 대한 열등감, 외
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은가? 어떤 사람은 나는 왜 이렇게 눈이 큰가? 어떤 사람은 나는 왜 이
렇게 눈이 작은가? 나는 왜 이렇게 피부색이 검은가? 나는 왜 머리카락이 많은가? 어떤 사
람은 적은가? 왜 나는 주변머리가 없는가? 왜 나는 속알 머리가 없는가? 요즈음에는 머리
가 하나도 없는 사람을 뭐라고 하는줄 아세요? 버르장 머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 나는 ㅂ
르장머리가 없는가? 정말 우리 인간에게는 많은 열등감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40년동안 애굽이라는 나라의 왕자로서 왕
궁에서 생활하던 모세가 어느날 갑자기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40년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
을 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너는
애굽으로 내려가 네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라! 그때 모세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그리고 여러
차례의 대화가 오고 가고 기적을 체험한 후에도 모세는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
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4:10) 13절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4:13절) 하나님의 사
람 모세에게도 언어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열등감은 출신지역과 능
력의 한계로 말미암는 열등감이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
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1:6) 왜 이렇게 예레미야가 반응한지 아세요? 그의
출신지역과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돗
은 예루살렘 성벽 뒤에 있는 작고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기드온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삭개오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바울도 열등감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열등감이란 무엇일까요?
그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은 잘 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또 본문 7절을 보면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
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7절)
그러면 여기서 육체의 가시는 무엇을 말합니까?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
하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한
동안 시력을 잃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채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런데 나중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찾아가 눈에 안수하매 다시 눈을 떠서 보게되었습니
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 아마 눈의 시력이 많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갈라디
아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갈4:15절에 보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
을 정도로 바울에 대하여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육체의 가시를 안질로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가시를 안질이 아니라 간질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
근래에 와서는 이 육체의 가시를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하
여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열등감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은 결코 죄가 아닙니
다.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열등감에 매임을 당하여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지 않음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열등감의 상처를 극복하려면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피상적으로
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안에 있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복음의 사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자기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용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출신지역과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열등감을 극복하고 선지자로 사명을 감당
할 수 있었습니다.
눅19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키가 작은 삭개오가 나옵니다. 그는 키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돈을
벌기로 한 것입니다. 매국노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돈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러던 어느날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몰려와 키 작은 그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래서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원숭이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예
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열등감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열등감이 치유되니까? 더 이상 돈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
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
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19:8)
여러분! 상처가 치유되면 이렇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열등감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
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도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에 없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마세요.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
다. 죠지 뮐러는 5만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통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응답하시
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둘째로, 약점을 붙들고 기도하라.
본문 8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
니" 여기서 이것은 바로 육체의 가시를 말합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가시는
특징이 뭡니까? 찌르는 것입니다. 아픔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하
기 위하여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세 번은 정말 꼭 세 번만 기도했다는 말이 아닙
니다.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뭐였습니까?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9절
상)
우리 주님은 많은 경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는 그 문제를 그대로 놓아 둔채 그
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도를 통해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기도를 해
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육체의 가시를 주셨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첫째는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
단의 사자를 주셨으니"(7절상)
바울 같은 사람은 이런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교만해질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문과 학문도 그렇지만 영적으로도 보면 그만큼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 어디있습니
까? 삼층천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교만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늘 겸손하게 만들었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늘 그 위에 머무
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약함이 곧 강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성도가 가장 강한 때는 돈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발견할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였을 때 비로
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제일 강한 자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골리앗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도함으로 하나님
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게 되
었습니다.
9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
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절하)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맇
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누구에게 머
무릅니까? 겸손한 자에게 머무릅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열등감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열등감을 인하여 주님 앞에서 교만
해지지 않고 겸손해질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분명히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될 것입
니다.
10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
의 약함을 자랑하고 크게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연약함이 벗어집니다. 기도하면 도리어 우리의 약함을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약함을 인하
여 크게 기뻐하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리스
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님 안에서 나의 여러 약함을
자랑합니다. 아니 도리어 크게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약함이 곧 강함이 되기 때문입니
다. 아니 나의 여러 연약한 것들이 나의 승리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헬렌켈러 여사를 보십시오. 태어난지 2년만에 열병으로 보는 것과 듣ㅇ
는 것과 말하는 것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리번 선생님의 도움으로 손가락이 눈과
귀가 되어 보고 듣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구의 몸으로 명문대학을 나온 후
남은 생애를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바쳤습니다.
크로스비여사는 태어난지 6개월만에 눈병을 앓아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는 9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9,000여편의 찬송시를 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
리 찬송가에도 이분의 찬송시가 23곡이나 있습니다.
□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으십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모
든 불행은 비교로부터 시작됩니다. 비교로부터 열등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기준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지 마시고 말씀의 기준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십시오. 아니 주님의
시각으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숨기고 괴로워한다고 해서 열등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죤 이라는 흑인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어린 죤은 검은 빛이 싫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흰데 왜 나만 검다지?' 죤은 목욕탕에 들어가 비누로 몸을 문지르고 수건으로 피가 나도록
밀었지만 검은 살갗은 희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인 아이들이 놀려댑니다. "검둥이 자식" "죤
은 검둥이야!" 죤은 그말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하루는 죤이 밀가루 통속에 들어가 대굴대
굴 뒹구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얘야, 이게 무슨 짓이니?" "싫
어! 싫단 말이야! 검은 게 싫어! 난 검둥이가 싫단 말이야" 어머니는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죤아, 싫지만 검은 걸 어떻게 하겠니? 밀가루에 뒹군다고 검은 살갗이 희어지겠니? 다 소
용없는 일이야.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사는 거야" "싫어 난 싫어!"
"애야, 죤! 까마귀는 검어도 효성이 있는 짐승이야. 사람은 밖이 문제가 아니고 마음이 문제
란다. 하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하얀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란다"
그제서야 죤은 밀가루를 털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 안에 있는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매임을 당하지 마십시오. 가난해도, 배운 것이 없어도, 부족한 것이
많아도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십시오. 겸손했지만 한번도 열등감에
사로잡히신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겼지만 한번도 열등감에 사로잡히신 적이 없
습니다. 때로는 맞고 조롱을 당했지만 언제 열등감에 사로잡히신 적이 있습니까?
이제 우리도 비로 길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이라 할지라도 하루 종일 식당에 들어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지 마세요. 당당하게 사세요. 하나님은 약할 때 강함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