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촛불 하나가 등대처럼
윤기묵 지음|푸른사상 시선 174|128×205×7mm|120쪽|12,000원
ISBN 979-11-308-2025-5 03810 | 2023.4.19
■ 시집 소개
강파른 삶의 현장에서 캐낸 인생의 금언
윤기묵 시인의 시집 『촛불 하나가 등대처럼』이 <푸른사상 시선 174>로 출간되었다. 윤기묵 시집은 이기적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자본주의와 반역사적 폭력으로 인해 파편화된 개인을 깊게 들여다봄으로써 공동체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다. 시인이 강파른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사랑의 시편들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등대처럼 밝혀준다.
■ 시인 소개
윤기묵
2004년 『시평』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역사를 외다』 『외로운 사람은 착하다』 등과 역사 에세이 『만주 벌판을 잊은 그대에게』가 있다. 정선 폐광촌에서 수제맥주 양조장 ‘아리랑브루어리’를 운영하고 있다.
■ 목차
제1부 천국의 서비스
이제 거의 다 왔다 / 하늘을 본다 / 천국의 서비스 / 피었으므로 진다 / 발치보단 존치 치과 / 악력(握力) / 바람의 공양 / 수행 소믈리에 / 사진 찍을 나이 / 내가 된다는 것 / 강물 되어 강물이 되어 / 가을 아침 / 추암 / 만항재 / 잠버릇
제2부 그 사내만 웃고 있네
그 사내만 웃고 있네 / 장기판 / 에콜로지 선생님 / 땅에 떨어진 밀알 / 이게 나라냐 / 유일한 나라 / 민도(民度) / 눈높이 / 술주정의 정의 / 파생 / 왕릉뷰 아파트 / 청구동 / 전쟁은 미친 짓이다 / 소나무 / 때는 오지 않는다
제3부 역사의 쓸모
역사의 쓸모 / 피난선 / 뼝대 / 어수리 나물밥 / 규간(規諫) / 편지 / 금고 / 누군가 온다 /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 넥타이 / 금연 단상 / 무게 / 우리 동네 / 미소 / 엽과비(葉果比)
제4부 인생 재발급
달력 / 기억의 변증법 / 노인들의 수다 / 몸살 / 신음 소리 / 빈대떡 / 어떤 위로 / 아픈 눈으로 보는 세상 / 오줌을 누다가 / 지금이 좋은 때 / 딸꾹질 / 아내의 봉투 / 조강 물참 / 인생 재발급 / 책을 사면
작품 해설 : 타자 지향의 깨어 있는 시선들 - 정연수
■ '시인의 말' 중에서
30년도 더 된 헌책을 샀다
책 제목이 ‘예수라는 사나이’다
책장을 넘기는데 여백마다 메모가 빼곡하다
메모를 몇 줄 읽다가
본문보다 메모가 더 눈에 밟혀 책을 샀다
책방 주인은 가격이 없는 책이라 했다
20년 넘게 자리만 차지한 책이라
먼지 값만 내면 된다고 했다
먼지 값은 손님이 알아서 내라는 의미
참 어려운 책을 샀다
열심히 메모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믿을 수 없으니까 종교가 아니냐며
푸념하듯 낙서하듯 그래도 밑줄을 그어가며
반듯하게 자기 마음을 고백한 사람
왜 그 마음을 헌책방에 팔았을까
읽고 고백했으니 이제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까
책은 지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은 사람의 것이라는데
지은 사람도 읽은 사람도 그 누구 것도 아닌
30년도 더 된 헌책을 샀다
책 제목이 ‘예수라는 사나이’다.
책장을 넘기는데 책갈피마다 내가 있었다
밥값을 아껴 시집을 샀던 그 젊은이는
헌책 한 권으로 30년 세월을 샀다
■ 추천의 글
윤기묵 시인의 제3시집은 강파른 삶의 현장 속에서 캐낸 존재의 아포리즘이자, 인생의 금언(金言)이다. “이를 갈며 견뎌온 세월”(「발치보단 존치 치과」) 속에서 “냇물보다 더 낮은 몸짓으로 살았다”(「내가 된다는 것」)던 그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뒤를 돌아보지 않는다/하늘을 본다”(「하늘을 본다」)라는 생의 에스프리를 설파한다. 아울러 “먼 데서 흘러온 강물은/모래알 하나/눈물 한 방울도 속이지 않는다”(「강물 되어 강물이 되어」), “빈대떡을 뒤집어가며 부치듯 세상도/자주 뒤집어야 골고루 행복한 세상 되겠다”(「빈대떡」)라는 윤기묵의 실존적 시학은 “역사는 한 번도 침략자의 손을 들어준 적이 없다” “더 이상 싸워서 이기는 전쟁은 없다”(「전쟁은 미친 짓이다」)라는 역사의식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를 헤쳐 온 윤기묵 시인이 천길 바닷속에서 길어 올린 청태 같은 목소리는 삿된 세상을 향해 내려치는 죽비소리처럼 우리네 가슴을 울리고 있다.
― 이승철(시인·한국문학사 연구가)
윤기묵 시인은 30년도 더 된 헌책을 품을 정도로 시간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다. 기억되는 것을 더 바라는 나이라고 할지라도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사진 찍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젊은 날의 분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책을 사는 일을 책 읽을 시간도 함께 사는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를 시간의 존재로 인식하는 시인의 자세는 겸손하고 진지하면서 노나메기 세상을 지향한다. 시인에게 “세월의 발자국 따라/당신이 온 것처럼”(「누군가 온다」) 사랑도 인생도 역사도 강물이 되어 오고 있다.
―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 작품 세계
스토아학파는 운율 외에도 ‘지혜로운 사고’를 시의 미적 형식으로 보았다. 이를 계승한 호라티우스는 시가 즐거움과 유용성을 지녀야 한다고 여겼다. 즐거움과 유용성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으나 고대-중세-근대 미학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적 미학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심리학이 강화되는 오늘날엔 시의 치유 효능에 관한 연구도 활발한데, 마음에 위안을 주는 시의 가치는 즐거움과 유용성의 합치점으로도 볼 수 있겠다. 윤기묵의 시에서는 자본주의와 문명이 빚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치유하는 대안의 본질을 담고 있다. 시집 『촛불 하나가 등대처럼』에 수록한 작품들은 ‘사람-사람이 이루는 사회’, ‘시간-시간이 빚은 역사’, ‘장소-사회의 구체적 역동성을 지닌 장소성’을 근간으로 한다. 다양한 시적 모티프가 ‘사람-시간-장소’를 용해하면서 타자 윤리학의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중략)
이번 시집에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는 온기,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잇는 힘, 사람이 이루는 사회의 본질 등이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 “그래도 당신 손만은 꼭 잡아주고 싶어/나의 악력은 그 손 놓지 않는 힘이라 하겠네”(「악력」) 같은 말랑말랑한 감성은 사람의 마음을 잡으려는 손의 힘이다. 타자를 향하는 악력은 이인칭 ‘당신’에서 삼인칭으로 확대하여 사회를 이루면서 타자 윤리학의 길은 확장된다. “부치는 사람이 행복해야 빗소리처럼 들린다고/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빈대떡을 뒤집어가며 부치듯 세상도/자주 뒤집어야 골고루 행복한 세상 되겠다”(「빈대떡」)라는 일상의 고백을 보면, 윤기묵이 지향하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골고루 행복한 세상’을 위해 타자 지향의 마음이 생기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길만이/다 같이 살길임을 알고 있었다”(「내가 된다는 것」)처럼 아래로 흐르는 물길의 실천이 나오는 것이다.
― 정연수(시인· 문학박사)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하늘을 본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하늘을 본다
하늘의 푸르름과 눈부심을 본다
그리고 하늘과 가까워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 돌아갈 곳도 없다
하늘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우러름을 위해
생의 여백을 눈부심으로 채운다
세상의 공백을 푸르름으로 채운다
추암
능파대 촛대바위 근처에서
딸 둘이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살아서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엄마를 영정 사진으로 모신 두 딸은
추암 바다에서 그리운 엄마를 보내드렸다
한 해 지나 그 바다에 다시 가서
엄마를 닮은 하얀 국화 몇 송이를 파도에 띄웠다
파도를 능가한다고 하여 능파대라 불린 바다였다
죽음도 능가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파도 위를 걷는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 뜻하는 바다였다
영정 사진 속 엄마가 그 바다를 걷고 있었다
국화는 한참을 추암에 머물다 먼 바다로 흘러갔다
촛대바위에 작은 촛불 하나가 등대처럼 켜 있었다
누군가 온다
산에 큰 불이 났다
산불은 처음엔 나무를 태우지만
이내 생태계 숲을 태우고
문명의 대지를 태운다
다 타버려 재만 남은 산과 대지는
황량한 사막이 되기도 하고
다시 울창한 숲이 되기도 하는데
그 차이는 단지 바람이 불어간 흔적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사막이 되고
세월이 지나갈 길이라도 남겨놓으면
그 길을 따라 분명히 누군가 온다
이천 년을 맨발로 걸어온
세월의 발자국 따라
당신이 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