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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1-14)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사랑하던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금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시험입니다. 이 말을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구약전체의 핵심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예수님의 배반하고 자기 길로 가버렸을 때 예수님은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4)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질문앞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이세상 그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입으로만 주여주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가식적인 고백에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고 행함으로 그 사랑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험한 내용입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있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언약하셨던 약속의 아들 이삭을 드디어 얻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들 이삭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이삭만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뿐 만 아니라 한동안 사라와 하갈의 갈등문제로 가정이 어려웠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습니다.
또한 이웃 나라의 왕 아비멜렉도 아브라함에게 사실상 굴복하고 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아브라함의 삶에 오랜만에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가장 번영과 안정과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때에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의 실체는 1절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시험은 정말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엄청난 시험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까? 시험이 도대체 무엇인데 이런 요구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사용되는 시험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험"이라는 말과 또 하나는 "유혹"이라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test라는 "시험"과 temptation인 "유혹"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조심스럽게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험과 유혹이 어떻게 다릅니까? 일반적으로 유혹이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시험이란 대체로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어느 날 내 삶속에 갑자기 들이 닥치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혹이란 대부분 내 개인의 욕심때문에 출발하고 시작됩니다. 시험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므로 언제나 건설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만 유혹하시지는 않습니다.
야고보서의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는 말씀은 test (시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temptation(유혹)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들을 유혹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종종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학생을 골탕먹이거나 망하게 하려고 시험을 치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통해서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총정리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은 "내가 이 분야에서는 실력이 부족하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자기 평가와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목적 때문에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 1:2-4)"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시험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하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우리자신의 믿음의 실상을 보여 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1.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한 명제를 보게 됩니다. '신앙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익숙한 것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것을 계속 붙잡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믿음의 마지막 테스트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얼마만큼 포기하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는 자식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독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쓸 말이 없어 이렇게 많은 말을 쓴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아브라함에게 이 아들이 소중한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포기의 강도가 높아지면 믿음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포기하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시험은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기보다 더 중요한 존재입니다.
내가 죽어도 내 아들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에게 아들을 너무나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아들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보다 더 신뢰하지 않으면 이 시험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바로 진짜 믿음입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까? 유한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기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이전에 그렇게 자랑했던 가문도 자기 신념도, 지식도, 재산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전념을 다하였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위치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온전한 믿음이 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것을 계속 붙잡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려고 하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른다는 것은 나머지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이삭과 같은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제물을 칼로 자르고 물로 씻고 불로 태워서 전부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앞에 전부를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스러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번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쏟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믿으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이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온전히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릴 때 주님이 우리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2. 순종이 바로 믿음입니다.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번뇌에 휩싸였지만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이삭과 함께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쪼개어 하나님이 말씀하신 장소로 떠났습니다.
결코 망설이거나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처럼 망설이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망설이는 것이지 이미 뜻이 분명하면 망설이는 것은 사탄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이 전제됩니까? 내 생각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데 누구한테 상의하면 묘수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에게 조차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상의했다면 어떤 결론이 나왔겠습니까? 100% 실패입니다. 아마 죽으면 죽었지 못할 것이라고 거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찌기 짐을 싸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하고 집을 떠납니다.
[4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드디어 아브라함은 3일 길을 지나서 하나님이 지시한 산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삼일이란 기간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의 죽음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이삭과 같이 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모리아산의 번제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들을 번제로 드린단 말입니까?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갈등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심정처럼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마 26:38).
아브라함에게 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긴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특별히 비행기를 타면 굉장히 지루합니다.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면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고 밥을 먹어도 지루합니다. 그런데 30분후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방송을 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갑자기 피곤이 사라지고 내린다는 기쁨이 생깁니다. 그것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다릅니다. 목적지에 가까이 갈수록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시간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로서 3일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뇌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백세에 낳은 아들을 달라고 하시는 것일까?', '이삭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등등 그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삼일은 예수님이 무덤에서의 삼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일동안 무덤에 갇혀 있었습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없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드디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 나귀와 사환들은 거기에 머물렀고 이삭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산으로 가야만 합니다. 5절에서 특이한 사실은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이삭과 모리아산에 올라가면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7-8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버지가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 11:18-19,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처럼 그 절망적인 상황가운데서도 믿음의 말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삭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고 하나님의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죽이라고 했을 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순종을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 이삭을 다시 살려줄 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는 '이삭은 다시 산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내 생각이나 환경, 이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내 정신력이나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3. 부활신앙(여호와 이레의 믿음)
당장 보기에는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지만 결국 약속은 지켜지고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그것을 가리켜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죽어도 살고 망해도 이긴다'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겼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악한 권세와 죽음의 권세와 질병과 절망과 좌절을 꺾으시고 영광가운데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의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하자 마르다는 태도를 바꾸어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 만 아니라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인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고난이나 손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승리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는 분이시다'라고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백세에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달라고 요구하실 때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포기할 줄 압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절정은 '포기'와 '순종'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는 '얻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단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였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십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믿음을 보았습니다. (10-12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시험에 아브라함처럼 합격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시험받을 때 드러납니다. 시험가운데 참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호와 이레 양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처럼 그렇게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창22:16-18]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대적의 문을 정복하고 천하만국이 복을 받는 큰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니까 하나님은 준비하셨던 모든 복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시험을 통해 성공을 거둡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삭도 포기해야 합니다. 포기한 만큼 하나님이 행하실 믿음의 그릇이 비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나의 생각, 나의 고집,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여호와 이레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를 포기했더니 100배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길 때 이처럼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믿고 순종함으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여호와이레의 복을 받아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