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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란 산에 있는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하신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세 제자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34절). 슬픔이 너무나 깊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은 예수님에게도 참으로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느끼시는 슬픔과 고통은 죽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신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겪으실 육체적 고통이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끊어지는 형벌로 인한 고통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겪으시는 고통과 슬픔을 제자들 앞에서 솔직하게 드러내신 이유는 앞으로 제자들에게 닦칠 무서운 시험이 있을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시험을 ‘기도’로 이기십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비껴가게 해주십시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의 죽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임을 보여줍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 돌아오실 때까지 자고 있었습니다.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닥칠 시험을 이기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괴롭고 힘든 시험을 이기려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시험을 이기게 하십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들을 내려놓읍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기를 즐거워합시다. 최후 승리를 얻을 때까지 사탄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우리의 마음이 괴롭고 슬프고 힘들 때 모든 염려와 슬픔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읍시다. 기도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가룟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과 미리 예수님을 잡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시오”
유다는 예수님께로 다가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함께온 무리가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입 맞춤을 배신을 감추는 간교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유다의 배신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모습이 없는 지 돌아봅시다. 예수님을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대상 정도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자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 버린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 물리적인 힘으로 대적들과 대항하여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칼을 빼어 휘둘렀습니다. 위급한 순간에도 용감한 행동을 한 것이죠. 자기 선생님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력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망치는 것임을 일깨우신 것이죠.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얼마든지 그들을 제압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성경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목적 아래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때로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성도는 세상의 원리와 방식으로 되갚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현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처한 형편이 기쁘든지 힘들든지 그 속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4월 8일(수) 찬송가 148장 “영화로운 주 예수의”
막 14:53~72, 불법의 재판정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로 끌려 가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소할 증거를 찾았지만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으로 증언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심문에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쳤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외면하려는 산헤드린 법정에 의해서 정죄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과 모욕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그 때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는데 베드로는 주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이러한 자기과신은 여지 없이 무너졌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자기 과신을 철저하게 깨뜨리십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마음이 굳어진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경험하게 하셔서, 우리를 낮추십니다. 낮추신 후에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읍시다. 실패하고 넘어지는 우리를 붙잡으시고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바라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4월 9일(목) 찬송가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막 15:1~15, 빌라도의 법정에서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의논하고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정치범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어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꾀하는 위험한 인물로 고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힘을 빌어서 자기들의 목표를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계획과 생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결국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악한 계획과 생각들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사람들의 악한 생각이나 잘못까지라도 선하게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과 실수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약한 우리 자신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재판석 앞에 앉아서 기꺼이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우리 대신 정죄 당하셨습니다. 묵묵히 침묵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관한 문제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임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무리에게 환심을 사고 만족을 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내려진 공식적인 정죄와 사형 집행은 사실은 우리의 죄에 대한 공식적인 정죄와 사형 집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땅을 공식적으로 다스리던 로마 총독의 공식적인 사형 선고에 의해서 공식적인 수난과 죽음을 죽으셔서 사실상 그의 죽음이 우리가 감당해야만 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한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무리를 무서워하여 공평하지 않게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다고 정죄하고 내어 준 것은 온 세상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식적인 정죄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공식적인 정죄와 사형 집행을 당하셨습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마음껏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위해 더 큰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4월 10일(금)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막 15:16~32, 조롱받는 왕
본디오 빌라도는 무리를 무서워하여 그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줍니다. 이에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희롱했습니다.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조롱을 다 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갔습니다. 이 모든 조롱과 희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빰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이사야 50:6절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해골)로 가십니다. 율법에 의하면 속죄를 위해 피를 흘리는 제물은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야 했으며 누구든지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로 선언되었습니다(레 6:30, 16:17, 신 21:23). 예수님께서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신 것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히 13:12).
로마 군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었으나 예수님은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는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진통 효과가 있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시고 정신이 분명한 가운데 인류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삼시, 곧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눕니다. 예수님의 옷이 발가벗겨진 것은 그가 그의 의로 우리에게 옷입혀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붙입니다. 그리고 강도 둘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고 희롱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이 모든 모욕과 수치와 조롱은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과 멸시와 고난을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해결해 주셨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자랑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4월 11일(토) 찬송가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막 15:33~47,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당하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두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면서 당하는 고통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조롱하고, 남은 사람들은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는가 보자고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시고 버림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서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대신 버림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은혜의 얼굴빛을 거두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고난을 받을 수 있지만 결코 잃어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주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난 받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친구가 나를 버리고 세상이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죄의 장벽을 다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신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감사합시다. 예배와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외면하지 않으시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4월 12일(주일) 찬송가 160장 “무덤에 머물러”
막 16:1~20, 부활하신 예수님
안식일이 지나고 한 주간의 첫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무덤으로 가면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무덤 입구의 돌을 치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3절).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걱정에 빠져 있을 때 눈을 들어보니까 돌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 입은 한 청년(천사)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천사가 무덤에 있던 큰 돌을 굴려낸 것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빈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사탄과 어둠의 세력이 굴복당하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좌절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자주 불안과 초조에 빠지는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심으로써 부활의 신앙 가운데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역사하였던 부활의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를 맛보면서 동시에 세상에 선포하는 날입니다. 재림과 더불어 있을 최후 승리를 미리 맛보고 누리는 날입니다. 때로 우리가 지치고 좌절하고 걱정하기도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드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지금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키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금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십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서 지금도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은 이미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긴 자로써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사탄과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 심판이 있게 되고, 성도들은 승리의 영광가운데 영원토록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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