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일 토요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둘째 미사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에스파냐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사셨던 부모님
돌아가신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생각하면서 혼자 많이 우울해 합니다. 아버지 두 분께서 하느님과 같이 계실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위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이어서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고 그 분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아버지는 위암으로 치료 한번 제대로 못하시고 8개월 동안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세례를 받으시고, 어린아이 같이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그 아픔을 전혀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픔을 전혀 표현하지 않으시고, 혼자서 그 아픔을 술로 달래시고,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나중에는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시고 매일 꿈을 꾸시듯 어린아이처럼 공상으로 지내셨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아 죽을 뻔 하셨던 그 고통을 기억하시고, 견디시기 위해서 훨훨 날아가 당신을 부대자루에 넣고 때리고, 때리려고 하였던 사람들을 원수 갚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을 소망하시다가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장인어른은 혈압이 높으신 데도 그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중풍이 갑자기 찾아오시어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장인어른은 공산당이 싫어서 북한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임진강을 밤으로 건너시며, 군인들에게 들킬세라 어린 처제의 입을 틀어막아서 배 안에서 질식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월남하신 분이시라 정말 외롭고 모든 가족과 떨어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산가족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에는 밤새워 눈물을 흘리시며 몇 달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으나 가족을 아무도 찾지 못하시고 안타까워하시다가 병을 얻으셨고, 북한에 두고 내려온 다른 가족들을 그리워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그 긴 3년 동안 장모님은 심한 경우는 소 대변을 다 받아내시며 고생을 하셨습니다. 사위들이 와서 무릎을 주물러 드리면 행복해 하시던 장인어른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의식이 또렷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두 분은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다 너무 외로우신 분이었습니다. 외롭다는 표현은 두 분 모두 부모님을 일찍 이별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두 분 모두 믿음이 깊지는 않으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중에 계시면서 언제나 열심히 믿음 안에 계셨고, 봉성체를 기다리셨으며, 편찮으신 와중에도 기쁨과 행복으로 웃고 행복해 하셨습니다. 죽음을 앞두시고 죽음을 준비하시는 두 분의 모습은 정말 가슴 가득히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정말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신 분이었답니다. 마음을 모두 비우고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히 채운 사람들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린 때지만 그렇게 죽고 싶은 생각이 나를 가득히 감싸주었습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아픔과 고통과 병으로 괴롭게 돌아가셨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위령의 날 그 마음을 잠시 가슴에 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두 분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자식으로서 불효하였던 잘못을 용서 청한답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도록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안배하심에 의지해서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모두 버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은 죄를 뉘우치고 슬프게 울며 통회하는 사람들입니다. 슬피 우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슬피 우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은총을 주시니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죽음까지도 가난하게 마음을 비우시고, 주님께서 불러 가시는 것을 잘 받아들이며, 살아생전에 잘못한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는 그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가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삶이며, 지금 슬피 우는 삶이고 정말 행복하도록 축복을 받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소박한 생각들을 가져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순간순간은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봄 뿌리를 내리며 새순을 밀어 올리던 힘으로 잎을 무성하게 피우고 그 잎들은 이제 고운 색색들이 옷을 한창 갈아 입고 있습니다. 그늘을 만들어 내던 잎들은 그림자를 뒤로하고 과감히 물러서는 계절 앞에 숙연해지는 요즘입니다. 우리가 잘 사는 것(Well-Being)이 잘 죽는 것(Dying Well)이 어떠해야 하는지 위령의 날에 자연과 함께 묵상하게 됩니다. 살아생전에 그 어떠한 모습이든 간에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 깊이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위한 오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나의 죽음도 깊이 생각하는 날이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