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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성자(聖者)가 되고 싶었던 아이!
나는 삼십대 중반까지 성자(聖者)가 되는 꿈을 꾸며 살았다. 성자 중에서 성 프란시스코를 사모하였으며 나의 소명을 21세기 성 프란시스코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그의 청빈과 공동체 생활에 대한 염원을 담아 노동과 은수(隱修), 침묵과 절제,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훈련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러나 나의 성자에 대한 열망과 강박관념은 1993년 가을에 산산조각이 났다.
나의 성자(聖者)에의 염원은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 6월 어느 날 아침 나는 갑자기 너무 열이 나고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고열에 시달리며 맥을 못 추는 나를 업고 유강리 담배집에 가서 약을 사서 먹였다. 그리고 나를 안방에 눕혀 놓고 모를 때우러 가셨다. 나는 고열로 온 몸이 땀투성이가 된 채 복통으로 아픈 배를 부여안고 뒹굴었다. 찢어진 문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이 흘러가는데 하얀 상여처럼 보였다. 하얀 구름 상여가 나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움과 슬픔으로 울다가 오빠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윗방에 있는 몸을 숨길만한 작은 틈새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어린이 잡지 만화에서 보았던 어느 가족의 기도를 떠올렸다. 그 가족은 코로나 택시 응모에 온 가족이 껌 포장지를 보내고 각자 당선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나는 의미도 모르는 채 그 가족들이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께 바친 기도를 모아서 드렸다.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저를 고쳐주세요. 그러면 세 분께서 살라는 대로 살겠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세 분의 가르침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바쳤다. 약속 아닌 약속을 하였다. 어쨌든 나는 기도 후에 열이 내렸고 통증이 가셨으므로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확신하고 그분들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후부터 세 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나의 일상을 아뢰며 나의 마음과 생각을 인도해주시길 구하였다. 그리고 세 분을 알기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고등학교 시절에 소원을 성취하였다.
당시 어렸지만 나는 맏이로서 하는 일들이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물에 가서 온 가족의 세숫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리고 돼지 밥과 개밥, 닭 모이를 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찬장 아래에 묻혀 있는 큰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마당에 널어져 있는 짚을 다시 묶어서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싸놓고 마당을 쓸었다. 방 청소를 하고 빨래를 개고 저녁 밥을 짓는 어머니를 도와서 불을 때고 서둘러서 개밥과 돼지 밥을 주고 닭 모이를 주었다. 이런 소소한 일들을 기쁨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믿었고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불평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기.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하기, 학교에서 놀림당하는 친구들과 함께 하기, 교실을 청소하고 쓰레기 줍는 일에 앞장을 섰다.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머니가 말하기도 전에 아기 업기, 마당 쓸기, 나락 담기, 콩 말리기. 풀무질 등을 열심히 하였다.
5학년 때 목천포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당시 우리 5학년 분반공부 교사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내 머리 속에 새겨지도록 아주 선명하게 말해 주었다.
“굶주린 사람이 길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를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인간으로 알고 도덕적 훈계를 잔뜩 늘어놓고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잔다고 생각하여 그를 흔들어 깨워 빨리 집으로 가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일으켜 앉히고 물을 마시게 하고 음식을 먹고 기운을 내게 도와주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인가요?”
선생님은 예수님의 사랑은 말이나 이론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생명의 나눔, 생명 살림이라고 하였다. 그는 분반공부 시간에 링컨, 슈바이처, 나이팅게일처럼 사랑을 실천한 위인들의 사례를 소개해주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의 영혼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체, 성탄의 의미, 그 핵심을 명쾌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절대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나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였고 그 깨달음이 나를 구도자의 길로 인도하여 마침내 성자(聖者)를 엿보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자가 되고 싶어 주일학교에 열심히 나갔지만 어머니가 대문을 지키고 있는 날에는 교회에 가지 못하였다. 그런 날이 길어져 교회에 가지 못하는데 중학교 도서관에서 예수 위인전을 발견하였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 생애”를 다 읽었다. 예수의 사랑에 감동된 나머지 예수님을 더 알고자 하여 기드온성서가 배포한 쪽 복음서를 구하여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읽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대표로 자유교양경시대회 준비를 하면서 사 복음서를 읽었다. 약자, 작은 자를 위하는 그의 사랑이 내 가슴에 불을 지펴 나로 하여금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만들었다. 나는 무엇보다 예수 닮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열렬히 소망하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 집에서 요한 웨슬리와 성 프란시스코에 대한 소책자를 발견하였다. 그 책을 읽는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 산 두 분의 삶에 감동되었다. “웨슬리”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하고 “성 프란시스코”처럼 청빈과 순결로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삶을 모방하며 두 성자(聖者)처럼 살기로 다짐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예수를 닮은 사람의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평생 내 삶의 일부가 된 기도, 성경 읽기와 묵상, 독서 및 글짓기, 일기 쓰기는 중고 시절에 확고하게 내 안에 둥지를 틀었다. 신앙생활을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고 집에서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성경을 읽고 하루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 시나 세계 명시를 읽고 고전으로 알려진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하루를 돌이켜 보며 일기를 쓰고, 시와 독후감을 썼다. 경건한 신학생도 아니건만 매일 성경읽기를 정해진 분량대로 읽으며 학교에서 내가 행한 말과 행동을 반성하며 나의 꿈과 가족들, 마을 사람들, 친구들과 선생님들, 나라와 민족, 그리고 통일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대략 시오리였는데 나는 걸어서 등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당시는 차량통행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도로를 걷는 일이 불편하지 않았고 목천포에서 솜니 입구까지는 하천 둑을 걸었기 때문에 더없이 좋은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었다. 한 시간 내내 기도를 바치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무상의 황홀감에 빠지곤 하였다. 절약한 교통비는 대부분 그 날 걷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걸인들에게 주거나 아니면 헌금으로 사용하였다.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려고 닭 모이, 돼지 밥, 개밥을 열심히 주었고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벼와 보리, 콩, 깨, 고추 말리기는 아침에 멍석을 펴고 저녁에 가마니나 자루, 소쿠리에 담아서 마루에 옮겨 놓고 멍석을 말아서 처마 밑으로 옮기는 것까지 묵묵히 감당하였다. 모내기철과 추수철의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하루에 12번, 15번 밥상을 차리거나 설거지를 하였다.
어쨌든 성자처럼 사는 길에 필요한 노동 훈련과 근검절약, 소박한 삶은 부모님을 따르다 보니 저절로 되어 버렸다.
성자가 되려 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저절로 따라 주는 것은 아니다. 중고시절부터 나는 몇 가지 문제와 씨름을 해야 했다. 자고 깨는 시간에 리듬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정한 시간에 자고 새벽에 깨기를 작심하여도 나는 책을 너무 좋아하여 밤 세워 읽고 새벽에 잠드는 버릇을 끝내 고치지 못하였다. 이것 때문에 어머니에게 자주 꾸지람을 들었는데 그것보다도 적은 수면 때문에 오는 정서적인 불안감과 피로감이 누적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또한 어머니가 아프면 내가 어머니 대신 아프겠으니 어머니를 살려주시라고 기도를 바쳤던 순진하기만 하였던 아이가 교회에 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어머니의 반대와 폭언을 직면하여 어머니를 경원시하게 되는 것이 나에게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 거기에다 거짓말까지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이리시 남녀학생들의 모임인 고전독서회에 가입하였다. 본 수업과 문학 산책 시간에 토론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오면 오후 4시, 5시가 되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어머니는 나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 다투지 않으려고 독서회 활동에 대하여 일체를 숨기고 입을 다물었다. 때로는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왔다고 하거나 친구 집에 다녀왔다고 둘러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 주마다 늦게 되어 거짓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고 우겼다. 어쨌든 원하지 않는 두 가지 습관과 어머니와의 어긋난 관계는 계속 나를 좌절시켰고 나를 비웃었다. 그럼에도 나의 성자(聖者)에의 꿈은 좌절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생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금식기도를 더 하였고 나라와 민족,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도를 절박한 심정으로 더 자주 더 많이 하였다. 그리고 침묵과 감사, 사랑과 용서와 인내에 대하여 강도 깊은 훈련을 받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니 어머니와 부딪힐 일은 없었고 따라서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크게 진보하며 성자를 닮아 간다는 만족감은 없었다.
나는 교회로 들어가면서 재가 프란시스코회와 같은 수도 공동체를 만들 것을 염두에 두며 장차에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덕목을 철저하게 훈련하기로 하였다. 교회는 프란시스코의 수도원의 덕목인 순명, 순결, 청빈을 나름 내면화하는 장으로서 나를 가다듬어 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규칙적인 수면생활을 철저하게 훈련하기로 하였다. 새벽기도에 늦지 않으려면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정한 새벽 시간에 일어나야 하므로 독서삼매에 빠지는 것은 나에게 위험하였다. 밤에는 책을 가까이 두지 않기로 하였고 책을 읽다가도 10시가 되면 덮었다. 나는 개인의 유익과 진보보다 우선적으로 교인들의 신앙과 진보, 공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공인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나 자신에게 주지시켰다. 아무리 좋은 성품의 목회자라 할지라도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지각하거나 아예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교우들이 볼 때 불성실한 삯군 목회자 일 것이었다. 나는 공인으로서 시간 관리에 들어갔다.
신앙공동체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인 순명을 철저하게 배우기로 하였다. 그 동안 집이나 학교에서는 신앙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영적인 순명의 대상이 없었지만 교회에는 목사님과 교우들이 있어 순명의 훈련을 충분히 받을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 순명하듯이 목사님과 교우들에게 순명하면서 이끌림 받는 신앙의 자유와 성화되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가장 큰 덕목인 청빈의 실천은 나눔보다 더 근원적인 삶의 핵심, 본질의 문제다. 교회 공동체에 나의 삶이 전적으로 위탁되지 않았지만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기 위하여 생활비는 주는 대로 받고 조금이라도 남으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기로 하였다. 최소한의 삶, 단순한 삶을 유지하며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병들고 가난한 이웃은 돌보면 될 터였다.
수도원을 세속과 가름하는 정적과 고요, 평화로 감싸는 침묵 또한 수도자에게 성자(聖者)에게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침묵은 사물과 사건과 사람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그것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그들의 선함과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침묵은 사물과 사건과 사람에 대하여 자기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의사표현을 삼가는 것이며 좋던 나쁘던 이웃에게 들은 그 어떤, 그 누구의 말도 이웃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자신이 불의에 피해자가 되고 악에게 희생을 당할 때조차도 변명하거나 해명하지 않는다. 하나님 그 분이 나를 알고 그 분이 나의 변호자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침묵을 깨는 시시비비는 불신과 조급함에서 나오며 사탄이 틈 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영적다툼과 파벌을 만들어 공동체를 파괴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정의를 위하여 타인의 억울함과 부당한 고난에 대해서는 침묵을 깨야 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침묵훈련을 하였으며 가능한 오전에는 주로 듣기에 집중하였다. 타고난 천성이 뒤 담화를 싫어하므로 나는 사람들 속에서 말이 없는 내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교회에서 딱 13년만 섬기고 14년째에 되는 해에 평신도수도공동체를 출발하기로 하였다. 아마 당시에 13년 정도면 성자로서 갖추어야할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추었을 것이고 그 즈음에는 인적 드문 시골에 적당한 집과 적당한 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던 것 같다. 13년 후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성자(聖者)로서의 삶, 존재로서 메시지가 되는 삶, 있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삶,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되는 삶을 자연스레 살게 될 것으로 낙관하였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수도공동체를 출발하려고 하였던 13년이 되기 전에 성자(聖者)가 될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님도 내가 흠이 없이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하며 불평하고 다투고 상처받으며 기다리며 침묵하고 울고 웃으며 감사하며 다시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자(聖者)에의 꿈은 어린 아이의 동경과 꿈으로 끝이 났다. 그런 의미에서 베다니집은 그 때까지 드러나지 않은 나의 속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해준 수련 장소였다.
강동구 둔촌동과 하남시 경계에 있는 은퇴 여교역자들의 생활공동체인 베다니집은 교회와는 달리 서로에게 스물네 시간 그대로 열린 공간이었다. 나는 그 동안 훈련 받은 모든 것을 그 곳에서 테스트 받았으며 스스로 불합격 판정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그곳의 관장직을 맡았을 때 나 자신이 성자는 못되어도 어느 정도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하였고 관장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확신하였다. 교회에 있는 동안 청빈, 순명, 순결, 노동, 기도, 묵상, 금식과 금욕 그리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영혼에 각인시키며 살았던 터이므로 어르신들과 함께 사는 것은 수도원을 방불케 하는 경건한 아름다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초창기 한국교회에서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고 섬긴 그 분들의 노고와 헌신, 희생을 기리며 나는 그분들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모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 달도 못되어서 나의 기대와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다른 곳으로 보내주시라고 징징거리며 보채기 시작하였다.
신앙의 대 선배님들! 선교사들과 함께 초기 한국 교회를 개척한 바이블 우먼인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예우하는 마음이 유감스럽게도 너무 빨리 사라졌다. 너무 가까이에서 일상의 일로 부딪힐 때 거기에는 아무런 양보도 이해도 없고 고집과 시기심뿐이었다. 애초 나는 그 분들의 뜻을 모아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그 분들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였지만 일치가 되지 않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방법이나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중에 좋은 생각을 가진 분의 의견대로 하려고 하면 다른 분이 이의제기를 하였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서로 충돌하는 어른들의 뜻을 다 따를 수가 없어 내 뜻대로 결정하고 시행을 하였다. 그러자 어느 분이 바깥사람들에게 내가 자기들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일한다는 소문을 냈다. 그 말을 에둘러서 듣게 된 나는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고 이상한 자존심과 고집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 속에서 거하는 것이 불편하고 구차하게 느껴졌다. 베다니집은 더 이상 구도의 장소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의 장이 아니었다. 나를 배척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알았으므로 사임 기도에 박차를 가하였다.
겸허하고 소박하고 따스한 어른들, 나를 진일보된 수도공동체의 길로 인도해줄 어른들로 기대하였던 분들이 보통 여염집의 평범한 아낙네들보다 더 편협하고 말이 많고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들은 성자를 꿈꾸는 나의 스승이 되기에는 너무 세속적이었다. 그들은 새벽기도회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내고는 나의 아침 기도와 성경묵상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아침마다 나를 불렀다.
“관장! 해가 뜨면 풀 뽑기 어려워. 지금 나와서 풀 뽑아.”
어른들의 성화를 못 이겨 기도를 접고 이슬에 발을 적시며 잔디밭의 풀을 뽑고 있으면 작고 까만 모기들이 따끔하게 물었다. 모기 몇 방에 온 몸이 가려지고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이 나도 통과의례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요구가 날마다 계속 되어 아침마다 모기에 물리며 풀을 뽑아야 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주문이 늘었다. 어른들의 묘한 심리는 일꾼을 사서 해야 할 일도 내가 손수하기를 바랐다. 밭두둑을 만들고 무와 배추 씨앗을 심고 가동이 멈춘 모터 펌프를 살리러 이슬이 선득한 밭 가운데로 호박넝쿨을 제치며 들락거려야 했다.
이것은 약과였다. 만날 때 마다 같은 레퍼토리로 ‘잃어버린 과도를 찾아 달라’고 하는 어른이 계셨다. 나는 매일 아침 마다 그 분이 백 번을 물어도 공손하고 친절하게 “알았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기로 다짐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까지는 처음 듣는 것처럼 대답을 하다가 백 번째가 되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전도사님, 이것이 백 번째요. 백 번째! 그만 물어보세요!” 그러면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몰라서 묻는데 왜 화를 내? 내가 무엇 잘못했어?” 하며 문을 탁 닫고 돌아섰다. 또 같은 레퍼토리로 고향 이야기를 하는 어르신이 계셨는데 나만 보면 붙잡으셨다. 이야기를 듣다가 마음이 바빠지면 나도 모르게 그가 할 이야기를 앞질러 해버리곤 하였다. 그러면 그는 얼굴이 벌개 지면서 “관장님이 우리 고향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요?”라고 반문하였다. 만약에 그 때 내 심기가 불편하면 “이번이 백 번째요. 백 번째!”라고 큰 소리로 대꾸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향은 다 비슷하잖아요.”라고 얼버무렸다. 또 한 분은 내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 소리가 나면 방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다가 간밤에 들은 온 세계 뉴스를 전하며 “말세!”라고 탄식하곤 하였다. 그리고 간밤에 있었던 이웃 방 동료들의 다툼이나 언행을 미주알고주알 전해주었다.
날마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거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일상 속에서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고 경멸감이 올라왔다. 한 집에서 함께 지내는 어른들을 무시하고 산다는 것은 괴롭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친절하게 대하여도 속으로는 앝보고 경멸하는 나의 마음가짐, 이중성이 나를 괴롭혔다.
어른들이 아무리 화를 내도 나는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데 나도 그 분들과 똑같이 화를 냈다. 그들이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평화를 유지하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선대해야 하는데 지지 않으려고 기싸움을 벌였다. 루머로 나를 억울하게 만드는 그 분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관대하게 품어야 하는데 품고 싶지도 않았고 품어지지도 않았다. 그 때 까지 사람들을 미워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내 편을 들으며 나 자신을 변명하여도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거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품었던 성자(聖者)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럼에도 그토록 갈고 닦으며 성자가 되려고 노력한 시간들이 베다니집 한 두달로 허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 불평과 미움이 나를 흔들었다. 싸워서 어르신들을 승복시키든지 아니면 사임을 하고 빨리 나가는 것이 대수인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뜻하지 아니한 곳에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어른이 영적 리더십이 없는 새파란 것이 오랫동안 교회를 섬긴 어른들을 함부로 마구 대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지도하지도 못해서 불편하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기가 생겼다. 관절이 아프고 삭신이 쑤시는 어르신들을 골탕 먹이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 날로 바로 아침 새벽기도회 체제를 내 중심체제로 바꾸었다. 아침 5시 30분에 시작하여 두 시간 동안 통성으로 새벽기도를 인도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폼을 잡는 것으로 생각하였는지 콧방귀를 꾸었다. 그러나 새벽 두 시간 기도회를 이년 째 계속 이끌어 오자 모두 다 손을 들었다. 특별히 은근히 배후에서 불만과 이간질의 불을 지피는 분의 기운이 탁 꺾였다. 새벽기도회 중심으로 베다니집 운영의 틀이 자리 잡혔을 때 나는 어르신들이 돌아가면서 사회를 보고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보기도 대상과 기도제목을 적어 드려 기도가 다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개인 기도는 공기도회가 끝나고 드리면 되었다. 이후로 더 이상 나의 영적인 리더십을 운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나의 사임을 청하는 기도는 계속되었다. 나의 사임 신청 이유는 사랑 부재였다. 관장이 자신의 양떼인 어르신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였다. 사랑하지 못하므로 오는 양심 가책이 무겁고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또한 어르신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도 서러울 나이인데 나에게 진정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예우를 받으며 마음이 상처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어른들을 위해서도 나는 그곳을 떠나야 했다. 더구나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이 언제 열릴지도 모르고 성자(聖者)가 되려는 생각도 없으니 베다니집이 감옥(監獄)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종아! 너는 고치고 싶은 성격이나 못된 습관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 않으냐?”
“예, 가지고 있어요. 부단히 노력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못 고치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계속 노력은 하고 있어요. 그러나 …”
“종아! 내가 그 것 때문에 너를 사랑하지 않더냐? 너를 미워하더냐?”
“아니요. 아닙니다. 없습니다.”
“종아! 너에게 문제가 있어도 너를 사랑하고, 네가 부족하여도 너와 동행하고, 네가 쓸모가 없어도 너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아느냐?”
“예. 예. 잘 압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내가 그들이 문제가 있어도 사랑하고, 부족하여도 동행하고, 쓸모가 없어도 사용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며 인정하지 않느냐? 나는 여전히 고집불통이고 문제투성이고 분별력이 없는 그들을 사랑하고 축복한다. 내 자녀이고 일꾼인 그들이 노력하는 대로 변화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그런데 너는 그들이 못된 습관과 나쁜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함께 살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겠다고 말하는구나. 종아! 내가 만약에 너에게 그렇게 요구하면 네가 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와 동행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나의 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음성이 핏줄을 타고 진동하였다. 심장이 떨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임요청 기도를 바치던 중에 나는 하나님의 망치에 두들겨 맞고 소나무 언덕에서 고꾸라졌다. 하나님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종아! 있는 그대로 사람들을 사랑해라. 있는 그대로 사람들을 인정해라. 있는 그대로 사람들을 존중해라. 네가 변하지 않아도 너를 사랑하듯 그들이 변하지 않아도 그들을 사랑한다. 이것이 내 사랑이다.”
하나님은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서 그분들에게 변화되라고 요구하는 내 문제의 핵심을 잘 짚어 주셨다. 나는 옳고 당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의 문제점을 정확히 보게 해주셨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분들을 찾아가 넙죽 엎드렸다.
“하나님께서 어르신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답니다. 변하지 않아도 사랑하신답니다. 문제가 많아도 사랑하신답니다. 그러니 저도 어르신들이 달라지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습니다. 부디 그대로 가지고 살아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르신들을 저의 선생님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앞으로 부족한 저를 잘 이끌어 주시고 위해서 계속 기도해주십시오.”
영문을 모르는 어르신들은 눈물이 얼룩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럼요, 우리가 처음부터 관장님 위해서 기도하였어요. 이제 앞으로 더욱 열심히 기도하지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사임 취소 간청 기도는 끝이 났고 성자처럼 살며 은수자가 되어 세상 너머로 도피하고 하는 성자(聖者)병이 어렵사리 떨어져 나갔다.
하나님은 그 동안 성 프란시스코, 에크하르트,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토마스 머튼, 루이 에블리, 미쉘 쿠오스트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사막 교부들의 단순한 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홀로 별빛 쏟아지는 광야와 사막으로 가는 길은 닫으셨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베다니집의 13,200평의 산과 밭을 관리하는 상머슴이 되었다. 농사를 짓기 위하여 3월에 이천에 가서 계분을 한 트럭 사오는 것으로 시작하여 11월 초 김장이 끝날 때 까지 발품을 팔아 밭농사를 지었다. 농약과 제초제는 일체 사용하지 않고 계분만 사용하니 금방 잠자리와 나비, 메뚜기 천국이 되었다. 2년, 3년 동안 농사에 몰입하니 굳이 잊고 지냈던 평신도수도공동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저절로 정리되었다.
재가수도공동체를 만들어서 월, 화, 수 삼일은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노동이 필요한 집에 가서 무료 봉사를 하고 목, 금은 공동체 유지를 위하여 유료 노동을 하고 토요일에는 공동체 전원이 함께 모여서 예배와 나눔의 시간을 가지고 일요일에는 새벽 묵상예배를 드리고 각자 자유의 시간을 가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철저한 농업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적당히 떨어진 농촌 지역에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는 집과 작은 땅이 있어야 하였다. 아직 몇 년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 모든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당시 얼마나 열심히 일하였는가? 일하다 보면 노동 삼매에 빠져서 방문객들이 나를 찾으러 와도 그들이 오는 것을 몰랐다. 방문객들은 나를 찾으러 왔다가도 내가 관장처럼 보이지 않으므로 품팔이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였다. 그럴 정도로 농업 전문인이 되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였다.
교회와 함께 세상을 선도할 재가수도공동체에 대한 꿈을 다시 꾸면서 나는 공동체를 섬길 지도자로서 기도와 묵상, 영적 독서, 금욕과 고행, 절제, 나눔과 비움의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꿈도 야무지게 하나님께서 13세기에 프란시스코를 사용해서 교회를 개혁하신 것처럼 21세기에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서 써주시길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일찍 자고 일어나는 수도공동체의 성무일도에 나의 삶을 맞추었다. 나에게 마약과 같은 늦은 밤의 독서를 끊음으로 가톨릭 수도사들의 일과를 따라가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무상의 행복감을 누렸다. 나는 머잖아 성자는 아니지만 이름 없는 노동수사로서 가난한 마을과 거리에서 필요한 손길이 될 터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존재로 증언할 터였다. 무상의 노동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터였다. 아빌라의 테레사보다 더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길 날마다 간구하였다. 그리하여 타인을 위한 존재로 충분히 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천만원을 빌려서 시작한 사업이 망하고 빚만 쳐졌다.
공황상태!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하였다. 무엇보다 나를 압박하는 것은 빚이었다. 그러나 빚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에 대한 증오와 분노였다. 사람을 향하는 분노와 증오를 삼키며 베다니집 밭지기로 몇 년을 더 살기로 하였다. 다행히도 분노와 증오는 악마처럼 나를 오래 물고 늘어지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모든 꿈이 사라지고 비울 것이 하나도 없는 공(空)의 상태에서 삼여 년을 보내야 했다. 꿈과 희망이 없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계획도 세울 수 없는 자리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자의 자유와 희열을 맛보았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거꾸로 하나님의 아픔과 상처를 엿보는 삶이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 몇 년 후, 하나님을 믿고 배낭하나 둘러메고 인도로 떠났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라진 성자(聖者)와 수사(修士)가 인도 광야에서 나와 동행한 것이다.
2026년 7월 10일 금요일 유시 완성하고
7월 16일 목요일 자시에 전문 올리다.
우담초라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