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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by the coward Robert Ford>, 이름조차 지독하게 긴 영화입니다. 자고로 옛 영화들을 보면 저런 식으로 긴 제목이거나 혹은 제목이 길지 않아도 긴 부제들이 달려 있곤 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낮선 인물이라고 생각되나 제시 제임스는 미국에서 전설로 남아 있는 유명한 갱 이름입니다. 그에 관하여는 이미 <제시 제임스>(1939)와 <롱 라이더스>(1980)를 통해 영화화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실존인물의 명성(?)에 비해 이 두 편의 영화는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비겁한 로버트.....>에 나타난 제시 제임스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헐리웃 최고의 스타, 브레드 피트가 열연하면서 새롭게 관객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2007년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관객들은 당연히 제시 제임스가 왜, 어떻게 죽었나를 다루었을 거라 생각했던 터라 주인공이 제시 제임스였을 거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실상 이 영화의 주인공은 로버트 포드입니다. 영화의 시작조차 로버트 포드(밥 포드)가 제시 제임스를 찾아가게 되는 그 순간부터였고, 그 결말은 로버트 포드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 영화가 한국에 알려진 것은 제작된 이듬해인 2008년 전주영화제를 통해서였습니다. 국내에 워낙 팬이 많은 보유하고 있는 브레드 피트였기에 당시 전주영화제 라인업이 알려지면서부터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서부시대의 갱에 관한 영화라서 긴장감 팽팽한 총격전과 복수, 빠른 화면전개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내래이션을 통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고요하게 전개됩니다. 전체적인 느낌은 야근을 하고 집에 가는 듯한 피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 왼쪽 밥, 오른쪽 제시
고요하다 못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위에서 언급한 제시 제임스의 일생을, 그의 종말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이 고요함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영화 내내 지속됩니다. 하여튼 아주 독특한 영화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납니다.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에서 명감독인 리들리 스콧과 제작자로도 참여했는데, 악랄하면서도 고민하고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때론 마음이 여린 제시 제임스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배우는 제임스를 암살하는 주인공인 로버트 포드를 연기한 케이시 애플렉입니다. 그는 명배우이자 명감독이기도 한 벤 애플릭의 동생입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어눌하면서도 냉정한 로버트 역할을 맡아 작품 완성도를 한층 높였습니다. 그는 2017년도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한 연기파 배우입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의 또 하나의 큰 미덕은 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앤드류 도미닉 감독의 연출력입니다. 그는 2시간 40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노련한 감독 못지않은 구성력을 보여주었고 카메라 기법과 음악 배치도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중심부는 또렷하면서도 주변부는 흐릿하게 처리한 화면의 빈번함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등장인물의 심리, 극적 긴장감, 그리고 영화 성격에 대한 모호함을 한꺼번에 거뒀습니다. 대사 처리 또한 영화를 쉽게 이해하게 만들면서도 함축적인 내용을 곁들이면서 내레이터 중심으로 흐름에 따른 지루함을 보완했습니다.
또한 닉 케이브와 워렌 엘리스가 구성한 음악은 더욱 훌륭합니다. 몽환적이면서도 스릴있고, 긴박하면서도 느릿한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 기막힌 OST를 낳았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제시 제임스(브래드 피트扮)는 유명한 갱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형 프랭크(샘 셰퍼드扮)과 사촌, 친한 이웃의 아들, 동네 뜨내기들을 한데 모아 갱스터 조직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열차, 은행 등을 털며 미국 내에서 악질적인 갱으로서 이름을 떨칩니다.
그는 남부인들에게는 의적 로빈 훗과 같은 인물로 떠받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19세기 말에 유럽인이 아는 미국인이라곤 마크 트웨인과 제시 제임스뿐이었다.’라는 말이 떠돈다고들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농담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당시 미국 사회에서 2번째로 유명했던 인물이었고, 그의 전기(傳記)를 읽고 크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세의 밥(로버트) 포드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제시 제임스의 전기를 읽고 큰 것으로도 모자라 신문기사나 그에 관련 한 물품들을 모으는, 지금으로 따지면 제시 제임스의 열렬한 광팬이었던 것입니다.
밥은 형인 찰리가 제임스 갱단에 있는 것을 통해 그의 갱단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었으며, 제임스 형제를 제외한 초기 제임스 갱단의 멤버들이 모두 감옥에 갇히는 불상사로 풋내기 신참들을 받아들이던 그 시기에 직접 제시 제임스에게 접촉을 하여 제임스 갱단에 들어옵니다.
* 형 프랭크 제임스
그러나 갱단에 들어온 이후 블루커트에서 기차를 습격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밥이 상상했던 의적의 행동들은 없었습니다. 제시의 형인 프랭크는 제시의 성격에 넌더리를 내며 제시를 쫓아 버렸으며, 밥은 제시와 가까이 지내게 되고 그의 갱단들과 섞이게 되며 제시 제임스에 대한 단점들도 알게 됩니다.
의적이었던 제시의 모습은 언론이나 구전되어지는 말로는 멋있는 인물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시는 신경질적이고 지나치게 예민하며 사람들의 기대에 억눌려 있는데다가 부하들이 언제 배신할지 몰라 늘 불안해하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 밥(로버트) 포드
게다가 그 시기 제시 제임스는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일행 중 자신을 밀고하려다가 적발한 이가 있었고 블루컷에서의 강도 일행 중 4명이 체포가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염과 폐충혈 등으로 점점 몸도 차츰 망가져갔습니다.
미신적 점괘에 완전히 의존하며 제시의 정신까지 무너져버리던 그 때, 밥은 누나(마사)의 집에서 우연히 갱단 동료이자 제시의 사촌 동생이었던 우드 하이트를 죽여 버리면서 자신과 찰리 형제가 제시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제시를 흠모하여 졸졸 따라다니는 밥, 그러나...
게다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던 제시가 마사의 집에 들이 닥치며 제시는 밥이 언젠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것 혹은 이미 배반했다는 것을 눈치 챕니다. 이 과정에서 밥은 완전히 제시에게서 돌아서게 됩니다.
자신이 단지 살고 싶었기에, 게다가 제시에 대한 실망으로 제시에게 벗어나고 싶었기에 밥은 당국에게 모든 것을 고발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마사의 집에 하숙을 하던 갱단의 멤버 딕 리딜이 체포되고 밥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당국에게 덜미가 잡혀 주지사에게 제시를 잡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 제시를 죽일까 말까 고뇌하는 포드 형제, 앞이 형 찰리
기간은 일주일. 그 사이에 더욱 심약해지고 예민해진 제시가 포드 형제를 찾아옵니다. 포드 형제는 제시와 함께 머물게 되고 제시는 포드 형제가 자신들의 눈 밖에서 나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불안해하는 것은 포드 형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찰리는 울면서 잠에 들지도 못하고, 만우절에 갑자기 자신에게 총을 선물하는 제시 때문에 밥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1882년 4월 3일, 제시는 딕 리딜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기사를 접하게 됩니다. 그제야 제시는 자신더 이상 비빌 언덕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늘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총을 포드 형제의 앞에서 풀어놓습니다.
* 밥
액자에 먼지가 끼었다며 일부러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자신들의 부하가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액자 유리에 비친 것을 확인하면서도 그대로 밥의 총을 맞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밥은 제시를 죽이자마자 경찰에 자신이 제시 제임스를 죽였다는 내용의 전보를 치고 그 후 1년 동안 찰리와 함께 제시 제임스 살해 연극을 오픈합니다. 그 연극을 하며 점점 형 찰리는 심한 가책을 느끼면서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찰리는 제시 유족들에게 보내지 못한 장문의 사과편지를 쓴 채 결국 자살을 합니다.
이 후 밥의 인기는 많았으나 그만큼 조롱도 많았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듯 제시의 피해자 가족들을 찾아갈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냉정한 것을 슬퍼했습니다. 차라리 제시 제임스를 죽였던 사실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제시를 그리워할 줄도, 그리고 후회할 줄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습니다.
그리고 제시가 죽은 지 10년 후, 그는 자신과 비슷했던 한 남자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시의 죽음과는 다르게 밥 포드의 죽음은 크게 유명세를 타지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의적을 죽인 로버트 포드의 죽음은 그렇게 쓸쓸하고 의미 없게 사라졌습니다.
* 제임스 갱단, 앞이 제임스 형제, 뒤 오른편 둘이 포드 형제
[ 제시 제임스 형제 이야기 ]
제시 제임스는 미주리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남북전쟁 때는 형 프랭크와 함께 남군에 자원하여, 당시 잔인하기로 이름났던 캔트릴이 지휘하는 게릴라부대에 들어가 미주리주와 캔자스주에서 활약하였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제시와 프랭크는 게릴라 부대의 다른 동료 8명과 합세해 1866년 2월 13일 미주리 주 리버티의 한 은행을 털어 무법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제임스 갱단으로 이름을 지은 이들은 아이오와에서 앨라배마와 텍사스에 걸쳐 여러 은행을 털었습니다. 1873년부터는 열차 강도질을 시작했으며, 이밖에 역마차와 상점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강탈하기도 했습니다.
* 제시 제임스
당시 철도회사인 핑커튼 회사의 창립자인 알란 핑커튼은 제시의 집에 폭탄을 던졌고 제시 가족이 참혹하게 폭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핑커튼은 제시 일당에게 계속 열차 강도질을 당하자 약이 바짝 올라 이런 짓을 했습니다.
이 일로 오히려 제시 제임스 일당은 남부인들의 동정심을 얻었고, 그들의 강도 행각도 어느 정도 합리화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당시 은행과 철도는 거의 북부의 자본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남부인들은 제시일당의 악행에 오히려 갈채를 보내며, '서부의 로빈후드'라고까지 하면서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 영화에서...
갱으로 활약하던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의 행각은 잔혹한 서부의 대담무쌍한 이야기를 원하는 미국 동부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작가들에 의해 이들의 이야기는 과장되기도 하고 낭만적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형제의 고향인 미주리의 오자크 사람들에게 제시 제임스는 남군에 동조했던 과거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려는 당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범죄 세계로 들어선 낭만적 인물로 회자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시와 프랭크는 항상 당국의 박해를 이유로 들어 그들의 강도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그의 소행으로 지목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시를 소재로 한 민요나 다임 노벨(dime novel:10센트짜리 소설)과 서부극 영화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 영화에서...
* 제시의 죽음
1876년 9월 7일 제임스 일당은 미네소타 주의 노스필드에 있던 제일국립은행을 약탈하려다 거의 전멸 당했습니다. 8명의 강도일당 중 제임스 형제만이 도망쳐 죽음과 체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제시 제임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강도를 벌였던 찰리 포드와 그의 동생인 로버트 포드를 데리고 칩거합니다.
1881년 미주리 주지사 토머스 크리튼던은 제임스 형제를 죽이거나 사로잡는 사람에게 현상금 1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시했습니다. 토머스 하워드라는 가명으로 세인트조지프에 숨어 살고 있던 제시는 영화에서처럼 집에서 벽에 그림을 고쳐 달던 중, 현상금을 노린 포드 형제가 쏜 총에 뒤통수를 맞고 즉사했습니다. 포드형제가 미주리 주지사와 모종의 거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달 후 프랭크 제임스는 자수했습니다.
* 영화에서...
형 프랭크는 미주리에서 살인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판결을 받았고, 앨라배마에서 강도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역시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마지막으로 미주리에서 무장 강도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 제시의 시체
아마도 가족이 폭사당했고, 동생 제시도 제거되었으며 스스로 자수했기 때문에 이런 판결이 나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거기다가 남부주의 판결은 남부인에게 유리했을 겁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가족 농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다가 1915년 자신이 태어난 방에서 죽었습니다.
* 영화에서...
*************** 제시 제임스 외에 서부의 무법자들 *************
[ 소년 무법자, 빌리 더 키드 ]
본명은 윌리엄 헨리 매카티 주니어로, 흔히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부 개척시대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무법자였습니다.
서부개척시대였던 1859년에 태어난 빌리 더 키드는 어릴 때부터 살인하는 데는 비범했습니다. 12살이 되던 해, 자신의 어머니를 강제로 범한 남자를 자신이 평소 들고 다니던 접이식 나이프로 찔러 죽였는데 이것이 그의 첫 살인이었습니다.
* 빌리 더 키드
이후 그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후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잡히지 않았습니다.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1877년에 뉴멕시코 주의 링컨 카운티의 존 턴스톨이라는 인물의 밑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사업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바로 경쟁자들을 처단 하는 것이었습니다. 존 턴스톨의 상점은 승승장구 하고 있었으나 그의 사업을 방해하는 두 사람, 10년 전부터 링컨 카운티의 상권을 주름 잡던 로렌스 머피, 제임스 돌런 이 두사람이 눈 엣 가시였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도 존 턴스톨을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1878년 2월 18일에 마을의 보안관이었던 윌리엄 브래디에게 뇌물을 줘서 상거래 문란 혐의로 존 턴스톨을 체포해서 그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존 턴스털은 체포 과정에서 보안관이 쏜 총에 맞아서 숨을 거두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습니다.
* 영화에서...
그리고 여기서 빌리 더 키드가 역사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빌리 더 키드는 곧바로 존 턴스톨이 고용한 다른 총잡이들과 함께 그의 복수를 결심, 보안관을 비롯해 로렌스 머피, 제임스 돌런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보안관 윌리엄 브래디와의 혈투는 역사 속에 남을 정도로 치열했었습니다. 윌리엄 브래디를 사살한 후, 정부 당국에서 나서자 빌리 더 키드는 동료들과 함께 또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이때 내걸린 현상금은 1,000달러. 그의 현상금을 쟁취하기 위해 보안관 두명이 달려들었으나 맨몸으로 이 둘을 제압한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며 빌리 더 키드의 명성은 올라갔고 그 누구도 그를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망할 때까지 총 21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참고로 멕시코인, 인디언을 제외한 숫자로 그들을 넣으면 배로 올라간다는 후문이 돌기도 했습니다.그 후 살인과 강도짓, 경호원 일을 하며 삶을 연명했는데, 그러던 와중 팻 개릿이라는 바텐더와 친해지게 됩니다. 허나 얼마 안 가 팻 개릿이 보안관으로 뽑히게 되고, 빌리는 개릿에게 쫓기다가 1880년 12월 붙잡히게 됩니다.
* 영화에서...
그리고 개릿에게 붙잡힌 지 4개월 후인 1881년 4월 18일, 탈옥에 성공하고 이것이 뉴욕 타임스에 실리면서 유명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 후인 7월 14일, 결국 그를 체포했던 팻 개릿의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불과 22세 때였습니다.
이 또한 의견이 분분한데, 실은 탈옥에 성공해 숨어 지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다 1881년, 그의 은신처에서 그는 친우였던 팻 개럿에 의해 사살당합니다. 그런 그를 기려서 다음과 같은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Truth and History
사실과 경력.
21 Men
21명을 죽인
The Boy Bandit King
소년 악당왕
He Died As He Lived
그답게 살고, 또한 그답게 죽은
William H. Bonney "Billy the Kid"
윌리엄 H. 보니 "빌리 더 키드"
[ 기타 서부의 무법자들 ]
서부시대는 보안관과 무법자들의 총싸움으로 화약연기가 자욱했던 시대였습니다. 보안관이나 지역 치안담당자 그리고 무법자가 모두 종이 한 장 차이였습니다. 그놈이 그놈이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총 놀림이 뛰어난 보안관은 그 스스로가 법의 수호자이자 집행자이면서 동시에 그가 곧 법이 되는 일종의 무법자이기도 했습니다.
아래에서 이런 무법자들 열전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 제임스 밀러 >
제임스 밀러는 1866년 10월 25일 아칸사스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아기일 때 가족 모두가 텍사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조부모에게 양육되었지만 곧이어 조부모도 살해당하고 고아가 된 제임스 킬링 짐 밀러는 고작 13세 때 첫 번째 범죄로 체포됩니다.
기소는 되지 않고 풀려난 밀러는 이후 누이 부부와 같이 살게 되지만 다툼 끝에 매형의 머리를 엽총으로 쏩니다. 그로 인해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재판에서 다시 풀려납니다.
짐은 이후 불린저에서 벌어진 다른 총격 사건에 연루되어 조 타운젠드라는 법관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사건 후에 짐 여행과 술집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페이커스 지역의 보안관으로서 전향을 하게 되지만 보안책임자인 조지와의 불화가 깊어졌고 총격을 당하지만 다행히도 셔츠 안에 껴입은 강철판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합니다. 영화 <황야의 무법자>가 연상됩니다.
짐은 암살자뿐만 아니라 텍사스 국경수비대로도 활약합니다만 1909년 4월 19일 전임 보안관 살해 혐의로 드디어 교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짐은 스스로 51명을 죽였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12명이었다고도 합니다.
< 존 웨슬리 하딘 >
신기에 가까운 그의 빠른 총 솜씨에 대해 당시 신문 기사는 존 웨슬리 하딘은 개구리가 파리를 집어 삼키는 속도보다 더 빨리 권총 6발을 쏜다고 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 출신의 제임스 질렛 역시 존 웨슬리 하딘의 총 솜씨에 대해 말하길 "스핀, 속도, 재장전, 발사 등 마법 같은 속도와 정확성을 가졌다."라고 했습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정확하게 쏘고 재장전하고 심지어는 나뭇가지 사이의 작은 틈으로도 정확히 총을 쏘았다고도 합니다. 이 정도면 정말 서부 영화의 주인공 솜씨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존 웨슬리 하딘은 이렇게 뛰어난 총 솜씨를 주인공이 아닌 악당의 역할로 사용했습니다. 1853년 5월 26일 텍사스에서 태어난 존 웨슬리 하딘은 고작 15세 때인 1868년 첫 번째 살인을 시작으로 일생 동안 27명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인과응보인지 자업자득인지 42세가 되던 1895년 8월 19일 보안관이자 무법자인 존 셀먼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하게 됩니다.
< 댄 보건 >
1860년 앨라바마에서 태어난 댄 보건은 텍사스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카우보이 생활을 시작한 댄 보건은 급한 성격의 소유자로 많은 사건을 일으켜 트러블 메이커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현상금이 붙은 신세로 텍사스를 떠나 와이오밍으로 옮겨갔습니다.
1886년까지 댄 보건은 3명을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1887년 1월 15일에는 텍사스 국경수비대 찰스 건을 살해하였습니다. 당시 총격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은 댄 보건은 거친 눈보라를 뚫고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부상 심해져서 당국에 자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1897년 10월 탈옥에 성공하여 아르헨티나로 도주하는데 성공합니다. 유명한 탐정이었던 찰리 스트링고 등이 댄 보건의 뒤를 쫓았지만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댄 보건을 잡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작가 로버트 데아먼트는 댄 보건을 가장 과소평가된 서부 총잡이라 고 말했습니다.
< 와일드 빌 롱리 >
와일드 빌 롱리로 알려진 윌리엄 프레스턴 롱리는 서부시대의 가장 악명 높은 총잡이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는 성격이 아주 흉폭했고 악랄하여 사소한 이유로도 총질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주 사이코 패스였습니다.
와일드 빌 롱리 본인의 말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건방진 흑인은 망설임 없이 죽여도 된다고 믿었고 17세 때 첫 살인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1851년 10월 6일 텍사스의 오스틴 카운티에서 태어난 윌리엄 와일드 빌 롱리는 리 카운티 근처의 농장에서 자라며 그 곳에서 총 기술을 배웠습니다. 와일드 빌은 44구경 리볼버 두 정을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엽총도 즐겨 썼다고 합니다.
1878년 10월 11일 와일드 빌은 사형 집행을 받으면서 8명을 살해했다고 하였지만 그 이전에는 32명을 죽였다고도 했습니다. 8명이든 32명이든 언론에서는 와일드 빌을 가장 빠른 쌍권총잡이라 칭했을 만큼 악명높고 유명한 총잡이였다고 합니다.
< 하비 로건 >
1867년 아이오와주 타마 카운티에서 태어난 키드커리라고 더 알려진 하비 로건은 어릴 때부터 절도로 체포되기도 했었고 1894년에는 몬태나주에서 광산업자이자 보안관인 파웰 론드스키에게 별거 아닌 일로 유치장에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은 후 술집에서 론드스키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도주하던 로건은 또 다른 범죄자 블랙 잭 케첨과 갱단을 조직합니다. 이후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로 유명한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 의 조직에 합류하게 됩니다.
< 키드 커리 >
*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의 실제 주인공, 뒷편 왼쪽이 선댄스 키드
오른편이 부치 캐시디
위 사진에서 맨 왼쪽이 선댄스 키드, 맨 우측은 부치 캐시디 왼쪽에서 네 번째 서 있는 사람 중 오른 편의 콧수염 남자가 키드 커리입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키드 커리는 가장 빠른 총잡이로 묘사됩니다. 키드 커리는 실제로 사우스 다코다, 와이오밍, 뉴멕시코, 콜로라도 등지에서 부치, 선댄스 키드와 함께 여러 강도 행각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두 번이나 탈옥을 하고 총 9명을 살해한 키드 커리는 1904년 6월 17일 콜로라도에서 총격전 중 총상을 입고 자살을 함으로써 생을 마감합니다.
< 루크 쇼트 >
루크 쇼트는 1854년 미시시피에서 태어났지만 텍사스에서 자랐습니다. 10대에 집을 떠나 잠깐 동안은 카우보이로 일을 하면서 주류 불법 거래와 프로 도박가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후에는 여러 술집들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뛰어난 총 기술이 더 알려졌습니다. 특히 닷지 시 결투‘라고 부르는 유명한 싸움으로 더 명성을 얻게 됩니다. 루크 쇼트가 다지 시티의 Long Branch Saloon이라는 술집을 매입하자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당국에서는 그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결국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쇼트는 유명한 와이어트 어프(황야의 결투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에 응한 와이어트 어프는 무리를 이끌고 다지 시티에 도착합니다. 와이어트가 도착하자 무력 충돌을 우려한 당국은 서둘러 쇼트에게 다지 시티의 Long Branch Saloon의 운영을 허락하였고 그렇게 한 발의 총격도 없이 소동은 해결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쇼트는 짐 코트라이트와의 결투로도 유명해졌습니다. 1887년 2월 8일에 벌어진 이 날의 결투에서 쇼트는 빠른 총 놀림으로 코트라이트를 순식간에 해치웠습니다.
< 달라스 스타우든마이어 >
달라스 스타우든마이어는 1845년 12월 11일 알라바마 주 아버포일에서 태어났습니다. 15세 때는 군대에 지원했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기도 했지만 기어이 남군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이후에는 텍사스 국경수비대로 3년 이상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정확한 쌍권총 실력으로 유명했던 스타우든마이어는 불같은 성격과 특히 술에 취했을 때 더 난폭해지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1881년 4월에는 무법지대로 악명 높은 텍사스의 엘파소 지역 치안 담당자가 되었습니다. 서부시대에는 범법자와 보안관이 종이 한 장 차이였습니다. 근무 3일째에 "5초에 4명 사살"Four dead in Five seconds 이라는 유명한 총격전으로 3명을 죽입니다. 이듬해 2월에는 7명을 더 해치웠습니다.
스타우든마이어가 닥치는 대로 무법자들을 해치운 까닭에 엘파소의 범죄율은 엄청나게 감소하였고 그의 명성은 더욱 더 높아졌습니다. 물론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수많은 적들이 생기기도 했지요. 결국 그의 나이 36세가 되는 1882년 9월 18일 매닝 형제들과의 갈등에서 촉발된 총격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 윌리엄 브로커스 >
1845년에 태어난 윌리엄 브로커스는 애리조나의 가장 유명한 무법자로 "컬리 빌" 브로커스로 불립니다. 그는 1880년 10월 27일 툼스톤에서의 집행관 프레드 화이트와의 우발적인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고, 1881년 3월 8일 딕 로이드라는 카우보이를 죽이는 등 여러 총싸움에 관여하기도 하고 말려들기도 했습니다.
또 브루커스는 1882년 3월 18일 와이어트 어프의 형 모건 어프의 살해사건에 관련되었을 거라고 추정되는데 이로 미루어 그의 총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얘기 중에는 브루커스는 손가락 사이의 동전을 정확히 맞히거나 촛불을 총으로 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건 어프를 살해함으로써(사실이든 추측이든) 6일 뒤인 1882년 3월 24일 애리조나의 아이언 스프링스에서 와이어트 어프에게 죽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툼스톤 등 와이어트 어프를 소재로 한 영화에 자주 나오는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 와일드 빌 >
전설적인 서부 총잡이 와일드 빌은 1837년 5월 27일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와이어트 어프와 더불어 영화화도 많이 된 인물이죠. 어린 시절부터 총 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와일드 빌은 18세이던 1855년 싸움 끝에 자신이 상대를 살해한 걸로 오해하고 서부로 향하게 됩니다.
역마차 마부생활을 거쳐 캔자스와 네브라스카에서 보안관 활동을 하고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 소속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일설에는 스파이로 활동했다고도 합니다. 본명이 제임스 히콕이었는데, 와일드 빌이라는 별명은 남북전쟁 중에 불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1865년 와일드 빌은 미주리의 스프링필드에서 데이빗 터트와의 공개 결투 때 75야드(약 68미터) 밖에서 단 한 발로 상대를 해치움으로써 당시 유명 잡지인 하퍼스(紙)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 영화에서...
도박판의 돈 문제로 촉발되었다는 이 결투 사건으로 인해 와일드 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 졌습니다. 1871년 4월 15일 텍사스의 애빌린에서 보안관이 되었지만 같은 해 12월 동료 보안관(보좌관) 살해 사건에 대한 의심을 받으며 해임되었습니다.
몇 년간 버팔로 빌 코디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따라 다니며 도박을 일삼으며 수차례 사고로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1876년 8월 2일 Dakota Saloon에서 포커를 하던 중 이전의 모욕을 앙갚음하기 위한 잭 맥칼l이 뒤에서 쏜 총을 머리에 맞고 숨을 거둡니다.
유명세에 비해 마지막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생 동안 그가 죽인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포커 실력도 뛰어났는지 그의 일리노이 생가는 기념관이 되었고 1979년에는 포커 명예의 전당에 올려졌다고 합니다.
< 와이어트 어프 >
와이어트 어프는 애리조나주 툼스톤의 보안관이자 집행관 그리고 도박사로 유명합니다. 그는 치안 담당자, 광부, 도박, 술집 운영 그리고 부동산 거래 등을 하면서 서부를 방랑하면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많은 영화에서 보안관으로 정의를 지키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그 자신 스스로가 서부 시대의 엄청난 무법자이기도 했습니다.
와이어트 어프는 신흥 도시 중 위치타, 다지 그리고 툼스톤 등 주로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지대를 다니며 보안관 직책을 수행하며 당시 1800년대에 벌어졌던 대부분의 전설적인 총싸움에 개입하였습니다.
영화로 더 유명한 1881년 10월 26일 애리조나 툼스톤에서 벌어진 유명한 "OK 목장의 결투"는 클랜턴 일당과 와이어트 어프 3형제(닥 할리데이 포함)간의 약 30초에 이르는 총격전 이야기 입니다.
싸움의 결과는 클랜턴 측은 한 명을 제외하고 3명이 사망하고 와이어트 어프 3형제는 한 사람이 부상당하고 닥 할리데이는 총알이 스치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 싸움으로 와이어트 어프는 가장 뛰어난 서부의 총잡이로 알려졌고 많은 영화에서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와이어트 어프에 관하여는 이 시리즈(영화 & 그 역사적 배경) 737편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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