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오늘 독서는 어제 독서에 이어진 말씀입니다. 어제 남편과 아내에 대한 교훈이었고 오늘은 자녀, 종, 주인에 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라 가르쳤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 종은 주인에게 순종, 주인은 종처럼 섬길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기본도 못하는 예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마지막 주인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주인 여러분, 여러분도 종들을 이와 같이 대해 주십시오.” 마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처럼, 종이라 할지라도 섬기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예외가 안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어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이 와서 종처럼 시중을 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함께 연상이 되지요. 바오로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하시는 내용입니다. 좀 동문서답처럼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하고 가르치십니다. 옛날 우리나라 집들의 문들은 대부분 작게 만들어졌었습니다. 대문부터 말 그대로 대문이 아니라 소문처럼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고, 집안의 문들도 안방, 건넛방, 부엌 할 것 없이 죄다 낮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이라는 것은 당연히 그보다 더 작고 좁은 것으로 얘기됩니다. 이 문은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모습으로 들어가는 차원으로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깨어있는 모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주인이 문을 닫으면 사람들은 밖에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라고 해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친교를 나누고 주님의 가르침을 자기 동네에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문입니다. 주인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무엇이 불의일까요?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자기가 사는 길거리에서 듣기만 하는 것이 불의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 것처럼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실천이 없고 주님의 가르침을 그저 편안하게 듣기만 했다는 것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장례미사 때에 종종 읽혀지는 복음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한 구절이지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이러한 실천이 우리가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천주교 4대교리 중에 하나인 상선벌악은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이에게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분히 그 사람의 행실, 실천으로 결정지어지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 머리에만 쌓여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손과 발을 향한 말씀으로 듣고, 사랑의 실천이 우리의 본능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말씀을 들었다고?
착한 이라고?
주님과함께 먹고마셨다고?
...
착한 일을 한 자.
종을 대접한 자.
말씀을 실천한 자.
행실과 실천으로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아멘.♡♡♡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 머리에서 가슴으로... 아멘...
인생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좁은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하는 희망의 순례,
성경읽기와 기도, 그리고 봉사로 더욱 풍요로워지는 삶이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