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58
8월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연중 제20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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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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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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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의 보호 아래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아빠스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그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그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당국으로 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는 틈만 나면 외쳤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이 은총의 길이기도 하지만 성모님께로 나아가는 길 역시 은총으로 가는 길입니다. 성모님의 보호 아래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손을 잡고 계실 때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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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QQ1WJlfJZ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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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묵상을 못 하는 이유는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습니다. 율법은 613개뿐만 아니라 관습법까지 합치면 수만 가지가 넘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많은 율법 가운데 ‘정신’이 되는 율법이 두 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과 관련된 수많은 율법 조항이 생기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정신을 잃게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했습니다.
현 시대는 이런 사탄의 계략이 바뀌었을까요? 똑같습니다. 워낙 잘 먹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그것이 소화되어 내 삶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아서 좋은 정보들이 소화되지 않도록 엄청나게 쏟아붓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만 수집할 뿐 그것의 정신을 뽑아내어 내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는 것처럼, 입력하고 이해하고 표출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시험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보만 입력하는 것을 공부라고 여기면 그 정보들은 결국 내가 생각 없이 살게 만드는 독이 됩니다.
묵상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뇌의 앞부분을 이용하여 생각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마치 소가 풀을 뜯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해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요리하지 않아도 항상 남이 해 놓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실력을 쌓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묵상기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이미 정리된 정보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생각하는 노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생각 없는 인간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사탄의 도구입니다. 저는 현대의 ‘666’(그리스도의 적)이 ‘스마트폰’이라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은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이미 정리된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부어 사람이 전두엽을 사용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 전두엽을 퇴화시켜버립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자기가 눈으로 보는 정보는 곧바로 후두엽으로 갑니다. 머리 뒤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정보가 나의 것이 되어 행동으로 표출이 되려면 전두엽으로 와서 분해되고 소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늦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습득된 몸의 반응으로 바로 총을 쏘거나 총알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입력-숙고-표출’의 단계에서 ‘입력-표출’의 단계로 간소화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의 화면은 너무 빠릅니다. 그래서 한 화면의 내용을 깊이 숙고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다음 화면의 정보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화만 보고 산다면 머리가 텅 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 정보가 많아서 하나도 소화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신도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구를 할 때나 테니스를 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공을 끝까지 봐!”입니다. 보는 것이 어떻게 그 복잡한 동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보지 않으면 헛스윙을 하거나 빗맞습니다. 지금까지 연습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말은 “공을 끝까지 보자!”입니다. 이처럼 그것에 통달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 따라올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말 하나를 찾아내고 오직 그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내 전두엽의 작용으로 묵상이 된 것을 단순하게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원래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게 되어있기에 동시에 주의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킬 수는 없습니다. 멀티태스킹을 한다는 말은 빠르게 주의를 여기에서 저기로 옮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것에도, 저것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뇌도 다른 것에 할당한 주의를 하나로 끌어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을 쓸 때, “하나, 둘, 셋!” 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에 힘을 줄 때까지 “하나, 둘!”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이것, 저것 분산해서 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들어 심지어 묵상도 하지 못하는 뇌로 만드는지 그 계략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에 주의력을 가장 분산하게 만드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사용하지 않고 옆에만 두어도 뇌가 힘들어합니다. 그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게 에너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기가 물지 않고 윙윙거리기만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일할 때는 다른 방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카톡에 답을 하는 것도 시간을 정해놓고 한꺼번에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각 없이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게임, 유튜브 동영상 등을 많이 보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 하는 그런 자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반면 책을 읽으면 한 주제에 오래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전두엽이 활성화되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생각 없이 인생을 허비하며 살게 만들기 위해 쓰는 가장 악랄한 방법이 정보의 홍수에 빠져 멀티태스킹 하며 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힘들지만 책을 읽으며 천천히 그 주제를 묵상하는 연습을 합시다. 나의 묵상이 단순한 가르침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원교구 꾸르실료의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꾸르실료는 본래 온전한 교리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던 당시 스페인 교회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안에는 교리를 가르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이미 남이 써 놓은 강의를 그대로 외워서 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에 강의를 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반응은 ‘우리가 어떻게?’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다들 잘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입력된 것만 그대로 반복하는 패턴이었다면 이제는 ‘묵상’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주제로 한 시간 이상 생각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체험과 연결될 수 있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 율법이나 교리가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수많은 정보의 공격들을 꼭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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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34-40 : 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우러러 보았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기려고 한다.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다고 느끼자 무리로 그분을 이겨보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보려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께서 계명을 달리 말씀하시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이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지도 않고도 그분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둘째 계명에 의해 증명 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즉 우리의 가치관의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할 때는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인간-세상 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없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상대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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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율법은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에서 시작됩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약속하시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충실하라.’고 율법을 내려 주십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율법 조항이 613개로 늘어나게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점점 법의 준수 여부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기본 정신은 잊고 법의 준수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하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유다인들은 날마다 두 번씩 ‘쉐마 기도문’을 낭송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그럼에도 이들은 왜 하느님을 잊었을까요?
이는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는 말씀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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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6-40)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는 어떤 율법학자의 질문은, 중요한 계명들만 지키고 중요하지 않은 계명들은 무시하겠다는 속셈이 숨어 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무시해도 되는 계명은 없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이 계명들의 근본정신이다.”라는 뜻이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라는 말씀은,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지켜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나의 사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나에 대한 이웃의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내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간에 수많은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고, 이웃들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천하는 하느님 사랑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우리가 실천하는 이웃 사랑은, 나에 대한 이웃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는 사랑 받은 적 없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랑 받은 적 없다고 생각하니까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사랑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인데, 그 고통은 그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 주고 싶어 하는 마음, 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는 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요한 3,16)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외아들을 내주신 일은 당신 자신을 내주신 일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대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이웃에게 같은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 이웃 사랑입니다. (여기서 ‘이웃’은 ‘모든 사람’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부모에 대한 자녀의 효도도 이웃 사랑에 포함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준다는 말은, 또는 다 바친다는 말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신 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가져가서 자기들이 차지했다는 말이 나옵니다.(요한 19,23) 예수님께서 속옷마저 빼앗기신 일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음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이기도 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사랑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과 헌신의 삶’도 하느님을 사랑해서, 또 사람들을 사랑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사랑의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어떤 가난한 과부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사랑의 모범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바친 돈의 액수를 보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마음과 사랑만 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비교된 부자들은 마음과 사랑이 그 과부보다 많이 부족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봉헌한 뒤에도 여전히 부자였지만,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닢을 봉헌한 뒤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줄 마음이 없으면서도, 또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남겨두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자주 남발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일 뿐인데도 그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실천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과는 차원이 다르고, 소유욕과는 완전히 정반대쪽에 있는 ‘성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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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떨림과 울림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떨림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귀는 울림으로 듣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닌 축복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물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밖에서 인류는 아직 물이 있는 행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 허블 망원경으로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공기, 물, 바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지구가 한 바퀴 도는 것을 하루로 여깁니다.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을 1달로 여깁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을 1년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지구 밖에 있는 어느 행성도 지구와 같은 시간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의 단위는 오직 지구에서만 사용될 뿐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공기의 떨림을 귀의 고막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주파수는 20헤르츠에서 20,000 헤르츠라고 합니다. 그 외의 떨림을 우리는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초음파라고 합니다. 박쥐, 돌고래, 그밖에 다른 동물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떨림을 듣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빛의 떨림을 우리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의 주파수를 가시광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광선은 적외선, 자외선, 감마선, 엑스선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빛의 떨림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과학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소리와 빛의 떨림을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이 울림입니다. 울림에는 ‘공명’이 있습니다. 반딧불이는 어느 순간 모두가 같이 반짝인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수컷들이 암컷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야광봉이나 라이터 응원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고야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떨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나눔의 떨림입니다. 그것은 희생과 봉사의 떨림입니다. 그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와 죽음으로 얻어지는 부활을 체험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롯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늙은 어머니와 함께 하려는 롯의 마음은 사랑의 울림입니다.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14,000명을 자유의 땅으로 탈출 시켰던 마리너스 수사님의 마음도 사랑의 울림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버려진 이를 위해서 꽃동네를 일군 오웅진 신부님의 마음도 사랑의 울림입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과 이웃에게 떨림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떨림이 우리의 이웃을 변화시키면 그것은 공명과 공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변하는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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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재범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계명>
몇년 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라는 무장 테러 단체 때문에 레바논을 무차별 공격한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전쟁이 발발되자 레바논 정부는 평화협정을 맺자고 이스라엘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스라엘은 거부했으며, 급기야 레바논 정부는 이 전쟁이 빨리 종결되도록 교황청에 중재 요청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휴전협정을 맺는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은 그때 그 전쟁에 대한 뉴스를 보고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테러나 전쟁이 사랑으로 표현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은 내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진정으로 네 마음과 목숨,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세속적인 우상들이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둘째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데도 저의 감정과 제 계산에 의해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내 마음 가는대로 판단하고 오만과 편견으로 제게 잘하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느님과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사랑이 아닌 겉으로 들어나는 내 욕심에 의한 사랑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그저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평생을 삯바느질로 해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내어 놓으신 할머니, 고아들을 거두어 드려 택시 운전을 하시며 그 아이들을 돌보시는 부산의 어느 스님, 우리나라 땅도 아닌 일본에서 철로에 쓰러져 있는 일본인을 구하려다 세상을 떠난 이수현님,
고향을 떠나와 30년 넘게 한국인을 위해 사목하시며 누구보다 한국인을 사랑하시고 한국이 고향이라고 말하시는 성 골롬반 선교사 신부님들, 그분들의 모습과 잔잔한 미소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함께 찾고 그 사랑을 함께 실천하고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사랑, 그 첫사랑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이웃에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기 힘들 때 예수님께 기도드립시다. ‘하느님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그럴 때에도 제 몸의 일부가, 제 마음의 일부가 하느님을 향해 있었음을 알아주소서. 이웃을 제 몸같이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했음을 당신께서 알지 않습니까?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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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동시에 발생하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다. (마태 22,23-33)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활신앙을 배척한 사람들이다.
부활신앙이 경전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서 2세기경 사이로서 이 시기에 기록된 예언서(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와 묵시문학(마카베오) 등에 부활신앙이 나타난다.
그들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모세의 율법, 수혼법(嫂婚法; 창세38,8; 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께 괴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세금에 관한 논쟁’(마태 22,15-22)에서 예수의 대답에 탄복을 하고 물러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진다. 이 시험은 어떻게 하든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사실 율법교사들은 모세의 율법 중 248개의 행령(行令)과 365개의 금령(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계명 하나를 집어내라니(35절), 우리가 보기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제시하시고, 이 계명에 버금가는 제2의 계명도 잇달아 제시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 천명하신다.
613개의 계명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계명들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와 이에 버금가는 둘째 계명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기준은 간단하다. 무엇 때문에 계명이 존재하는 가를 따져보면 된다.
계명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이웃)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계명인 동시에 모든 계명의 기본적인 정신, 즉 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사랑과 이웃 사랑인 셈이다. 사랑 없이는 어느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될 수 없고, 빈껍데기로 있을 뿐이다. 사랑이 하나의 계명을 성취시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구약의 율법(613개)을 몽땅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께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한데 묶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사랑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확증된다.” (루돌프 불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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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뒤를 따르려고 고향과 종교를 버리는 룻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보편적인 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에 속하지 않으면서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던 모압 사람 룻이, 과부인 시어머니에게 충실함과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면서, 뒷날 베들레헴의 가정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연결 고리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전개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라삐 학교가 모세 법을 갈라놓았던 613개의 계명을 감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의 본문을 상기시키십니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모든 경건한 유다인이 아침과 저녁마다 반복해서 바치던 ‘쉐마’(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 기도를 인용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레위기 본문(19,18)을 상기하십니다. 레위기에서 이웃의 개념은 친척과 같은 나라 사람만을 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로 확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주는 새로움은 두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법의 핵심이요 본질로 정의하십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법의 전문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서로 달리 구분된 것으로, 그래서 다른 수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던 두 계명을 통합하시고 이를 동일하게 여겨야 할 원칙과 요약으로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 곧 성경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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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며,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로써 각각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할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곧 인격체로서 전환이요, 존재론적인 전환이라 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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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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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https://youtu.be/q4fBbx6v38A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22,40)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 부활 논쟁을 통해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시자,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렇게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율법 규정은 613개 조항이나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준수 규정은 248개 조항, 금지 규정은 365개 조항 이었습니다.
율법 교사는 이 많은 613개 조항 중에서 가장 큰 계명 하나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가장 큰 계명 하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두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22,37-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와 둘째는 서열로써가 아니라, 나열로써의 개념입니다. 이는 곧 첫째와 둘째가 나뉘어질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말씀 안에서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마태7,21; 25,31-46 참조)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는 이 두 계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4,20-21)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뉘어진 반쪽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하나의 사랑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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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만큼 사랑>
마태오 22,34-40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만큼 사랑>
사랑하면
닮는다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닮겠지요
하느님을
닮는 그만큼
하느님처럼
사랑하겠지요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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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신학교에서는 1주일에 한 편의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영화 상영을 담당하는 신학생이 몇 편의 영화 목록을 신부님께 제출하면 그중에서 한 편을 선택해주십니다. 그런데 그때 담당 신학생이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제목 그대로 올리면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영화로 생각해서 거절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했고, 그 결과 저를 포함한 신학생 모두가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일기예보 진행자인 주인공이 어느 마을에 취재를 하러 갔다가 2월 2일 성촉절(Groundhog Day)이 계속 반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2월 2일이 지겹고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만, 다음날 다시 살아나 똑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변하는데 비로소 다음날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블랙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아 블랙홀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 삶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의 삶이 아닐 때, 미래의 희망을 간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사랑은 바로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을 보면 자그마치 613개나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조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딱 두 가지의 계명으로 정리하십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성경에 보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사랑에 비추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똑바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맨 앞자리에 둘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사랑의 실천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의 행동을 할 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만이 미래에 하느님 나라라는 커다란 희망을 둘 수 있으며, 그 희망을 통해 지금을 더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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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어렸을 때 친구들과 모여서 숨바꼭질을 많이 했습니다. 술래는 숨어있는 친구를 열심히 찾아야 했고, 우리는 술래가 찾지 못하도록 꼭꼭 숨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술래가 찾지 못해서 한 사람만 계속 술래를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몇 번의 차례를 넘다 보면 숨는 곳이 뻔해지고, 그래서 술래 교대를 자주 하게 됩니다.
만약 꼭꼭 잘 숨어서 술래가 도저히 찾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정말로 재미가 없을 것이고, 이런 숨바꼭질은 다신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놀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구를 하는데 아웃이 되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축구를 하는데, 골키퍼가 전혀 막지 못해서 계속 골을 준다면 재미있을까요?
삶이 재미있는 것은 실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패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 실패를 받아들이고 있기에, 실패로 즐거움도 얻습니다. 실패를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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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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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랑해서 사람이다-
“천상의 보석이신 베르나르도, 당신께 찬미노래 드리옵니다.
구원의 큰기쁨과 넘치는 은총, 그모두 우리에게 부어주소서.
당신은 주님향한 사랑으로써, 깊고도 깊은상처 입으심으로,
주님은 당신에게 정배인교회, 그방패 기둥등불 되게하셨네.”
오늘 성 베르나르도 축일, 성무일도시 계속 이어지는 아름다운 찬미가가 성인의 거룩한 삶과 풍요로운 영성을 요약합니다. 단테의 신곡중 천국편에 등장하는 성인입니다. 오늘은 우리 가톨릭 교회의 참 자랑스런 성인인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입니다. 만 63세! 한평생 한결같이 참 치열한 사랑의 삶을 삶을 사셨던, 스콜라 학파 이전 신학자로 마지막 교부라 불리는 다방면에 능통했던 불가사의의 성인입니다. 그 다사다망했던 삶과 병약한 상태중에도 아빠스 재임중 2/3의 사목여행에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했습니다.
성인이 남긴 영성 고전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수도자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면서 그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주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22세에 4명의 형제들과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시토회에 입회한 성인은 이어 클레르보(뜻;빛나는 계곡) 수도원의 아빠스가 되었고, 38년 아빠스로 재임중 유럽 전역에 300개의 수도원을 세웠고 그중 65개 수도원은 성인의 책임하에 있었다 합니다.
수많은 영성 저술로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s)”칭호를 얻었던 성인은 늘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Ad quid venisti)”고 자문하며 스스로를 격려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았다 합니다. 바로 이 질문은 우리가 언제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제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마음 아파하던 성인은 1153년 8월20일 오늘 선종하셨고, 1170년 사후 17년 만에 교황 알렉산데로 3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830년 교황 비오 8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오늘 미사중 본기도가 성인의 삶을 요약합니다.
“하느님, 복된 베르나르도 아빠스가 하느님 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라, 교회에 빛을 비추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불타는 열정으로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성인을 닮아 빛의 자녀답게 성인이 되어 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이 아니라 믿는 우리 모두가 보고 배워 성인이 되라 선물로 주어진 성인들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 하나가 바로 본연의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빛나는 계곡’이란 클레르보 수도원의 이름 뜻대로 불암산 계곡에 자리한 요셉수도원도 사랑으로 ‘빛나는 계곡’의 수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으로 빛납니다. 사랑할수록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많아 성인이요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록 자존감 높고 정체성 또렷한 참 나의 성인이 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삶의 궁극의 의미도 사랑뿐입니다. 바로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들같은 무수한 성인들도 끊임없는 전구를 통해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격려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만병통치약이요 만병의 근원은 사랑 결핍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평생학인이요,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이겠습니다. 1코린 13장을 참조한 ‘사랑의 송가’(46장) 성가가 생각납니다. 코로나로 인해 미사중 성가를 못 부른지도 2년째가 됩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하느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있나
사랑이 없이는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지와 허무의 늪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사랑의 빛, 하느님의 빛, 말씀의 빛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기적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무사한 사랑, 이탈의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구약을 근거로 이 사랑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한자로 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613개 율법 조항의 요약이자 성경 전체의 요약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구별할 수 있을 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미워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사랑에 사람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자연 사랑도 덧붙여야 할 절박한 시대입니다. 기후재난으로 인해 하나뿐이 공동의 집인 지구와 더불어 인류의 생존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기에 참으로 구체적 생태적 회개의 실천이 참으로 절실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평생 공부가 성인이 되는 공부인 사랑 공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의 수행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수행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분투의 노력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노력하는 분투의 주님의 ‘사랑의 전사’로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빛나는 모범이 나오미의 이방인 며느리 룻이며, 예수님 족보에도 다말과 라합, 바세바와 나란히 등장합니다. 정말 신의 한 수 같은 룻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바로 다음 룻의 아름다운 고백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룻의 이웃 사랑을 통해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성사요,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얼마전 수도원을 방문했던, 20년 이상 일상의 삶에 충실하면서 하루 3시간 이상 개인기도를 바치는 제 종부宗婦입니다. 70대 할머니 나이에 시부모 댁에 들어가 8년을 90대 노老 시부모를 모신 룻 이상의 며느리였습니다. 8년간 구박하는 90대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온갖 사랑의 정성을 다한 며느리 였고, 마지막으로 “고맙다!”란 임종어를 남기고 97세로 선종한 시어머니요 저에게 큰 댁 큰 형수님이 되시는 분입니다.
눈 만 열리면 곳곳에서 이런 경천애인의 모범이 되는 살아있는 성인들을 발견합니다. 저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수도형제들이 때로 이런 성인들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어제 수도원 본관에서 예초작업을 하던 원장 수사를 사진에 담았고 사진과 더불어 보낸 메시지입니다. 이런 육체 노동 또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표현입니다.
“멋집니다! 주님의 전사! 예초 작업후의 싱그러운 풀내음!
수도승의 순수한 마음의 향기!”
모두가 성인이 되라 불림 받은 신의 한 수와 같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성덕을 더해 주시어 성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편14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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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 족보에 들어온 이방 여인 중 하나인 룻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네 동서는 제 겨례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룻 1,15)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하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모압 출신의 두 며느리와 남게 됩니다. 그녀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두 며느리에게 모압에서 새 삶을 시작하라고 권하지요.
오르파는 모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나오미에게 매달립니다. 그런데 실상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해도 룻에게 인간적으로 별 뽀족한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인 과부인데다 미래를 보장해 줄 아들도 없는 상태였지요. 당장 내일의 목숨을 보장해 줄 재산도 없이 가난하기 그지없는 처지에, 룻은 이방인이기까지 합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 1,16)
룻은 이스라엘을 자기 겨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자기 하느님라 고백합니다. 혈연을 넘어 이스라엘 집안의 일원이 되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여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야훼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네."(화답송)
화답송은 위대한 창조주시면서 약자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신의를 노래합니다. 억눌린 이, 굷주린 이, 잡힌 이, 눈먼 이, 기가 꺽인 이, 이방인, 고아와 과부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음을 기울여 보호하시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들 안에 현존하십니다.
복음에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율법 교사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테 22,39)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한두 명제를 책 한 권으로 풀어내는 것도 실력이지만, 무수한 조항들의 정수를 뽑아 한두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은 탁월한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꿰뚫고 계셨으니까요. 그분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당연합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율법의 다른 조항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이 두 말씀이 다른 모든 계명들의 골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모든 사람의 도리입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충실히 섬기는 이는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내 곁의 사람인 이웃과 형제가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며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이는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하느님의 마음을 나누어 받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 제 몫을 충실히 수행하며 삶을 완성해가는 이에게 하느님과 사람은 통째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개별 옵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가운데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과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적 통합에 들어섭니다. 이 두 사랑은 인격과 양심, 신앙이 무르익고 성숙해질수록 자연스레 균형과 질서를 이룹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람을 관대히 사랑하면서, 그 사랑에 충만히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일상을 채워나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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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rjKXbJIN_Y&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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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 36)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계명은
사랑의 길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사랑을
알게 되는
우리들
시간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통해
참된 자유와
참된 감사를
배우게 된다.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뿐이다.
사랑을
반성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사랑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참된 사랑이
빠져버리면
우리는 더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
더 잘 살다
가기위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사랑하는
오늘의
의미이다.
오늘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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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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