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내가 좋아했던 혹은 좋아하는
당신들
성상처럼 영혼의 동굴에 보존된 당신들 모두를 위해
주연의 자리에서 축배를 들 듯
나는 시로 가득 찬 해골을 들어올린다.
부쩍 자주 찾아드는 생각-
나의 종말에 총알의 마침표를 찍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별 연주회를 열리라.
기억이여!
뇌수의 연회장에
연인들의 끝없는 행렬을 마련하라
눈에서 눈으로 웃음을 따르라
이전의 혼례식으로 밤을 장식하라
몸통에서 몸통으로 즐거움을 부으라
아무도 이밤을 잊지 않도록 하라
오늘 나는 플루트를 연주하리라
내 등골로 만든 플루트를.
1
내 흔들리는 걸음이 넓디넓은 거리를 짓이긴다
이 지옥을 감추고서 어디로 떠날 것인가!
너, 저주받은 여인을 생각해 낸 것은
천상의 호프만이었던가?!
폭풍이 몰아차기엔 즐거운 거리도 좁기만 할 뿐
축제는 잘 차려입은 군중을 국자로 퍼냈다.
나는 생각한다
핏덩이 같은 생각, 아픈 생각,
말라붙어 딱지가 앉은 생각이 해골에서 기어나온다.
나는 모든 축제를 만들어 내는
기적의 창조자.
그러나 내겐 축제를 함께 맞을 동무가 없다
한 발자국 내밀기가 무섭게 쿵 하고 나자빠져
네프스끼 거리의 돌바닥에 머리통을 꼬라박겠지.
그래서 나는 신을 욕했다
신은 없다고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신은 태산도 두려워 벌벌 떠는 여인을
지옥의 심연에서 끄집어내어
명했다
사랑하라!
신은 만족했다
하늘 아래 절벽에선
고통당한 인간이 몸부림치며 죽어 가는데
신은 손바닥을 비비며
생각한다,
조금만 기다려라, 블라디미르!
정말로 정말로 신은
네가 누구인지 몰랐을까
너에게 진짜 남편을 선사하고
피아노 위엔 인간의 악보를 놓아둘 생각이었을까.
나는 안다-
불현듯 침실 문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십자가 같은 솜이불로 너를 덮는다면
양털 나는 냄새가 진동하고
악마의 육신은 유황처럼 연기를 뿜을 것임을.
그 대신 나는 연인들이 너를 데려갈까 무서워
동이 틀 때까지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고
이미 반쯤 실성한 보석공처럼
내 비명소리를 깎아 다듬어 다이아몬드의 시(詩)로 만들었다.
어디 가서 노름이나 할까!
한숨에 절은 심장은
포도주로 목구멍을 헹구어야 할 텐데.
너는 필요없다!
원치도 않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곧 죽을 것임을
내가 아는데.
당신이 참말로 존재한다면,
하느님
오, 하느님,
당신이 양탄자에 별들을 수놓았다면,
그리고 날마다 더해 가는
이 고통이
당신이 하사하신 고문이라면
하느님, 법관의 쇠사슬을 몸에 두르고
나의 방문을 기다려 주소서
나는 정확한 사람이니
하루도 지체하지 않을 겁니다.
만유의 대심문관이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나는 내 입을 틀어막을 겁니다
꽉 물어 찢어진 입술에서
한마디 비명도 새나가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러니 말 꼬리에 매달 듯 혜성에 나를 매달고
별들의 가시에 옷을 찢기며
데려가 주소서.
아니면 이런 것도 괜찮겠지요
내 영혼이 천국으로 이주하여
생기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당신의 법정에 출두할 때
나, 죄인 중의 죄인을
은하수의 교수대에 매달아 처형하소서.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
원하신다면 능지처참도 좋습니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씻겠습니다.
단-
이것만은 들어주소서!
당신이 나의 연인으로 만들어 주신
그 끔찍한 여인을 저리 치워 주소서!
내 흔들리는 걸음이 넓디넓은 거리를 짓이긴다
이 지옥을 감추고서 어디로 떠날 것인가!
너, 저주받은 여인을 생각해 낸 것은
천상의 호프만이었던가?!
2
푸름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연기투성이 하늘도
피난민의 누더기처럼 구멍 난 먹구름도
폐병 환자의 홍조처럼 선명한
내 마지막 사랑으로 붉게 물들이리라.
가정과 아늑함을 망각한
군중의 노호를
기쁨으로 뒤덮으리라.
여러분,
내 말을 들으라!
참호에서 나오라
못다 한 싸움은 나중에 하라.
바쿠스 신처럼 술 취한 전투가
피 흘리고 휘청거리며
걸어간다 해도
사랑의 말은 여전히 신선하리라.
친애하는 독일인 여러분!
당신에 입술엔
괴테의 그레트헨이 있음을
나는 아오.
트라비아타여,
그대 입술의 키스가
남아 있는 한
총검에 찔린 프랑스인도 웃으면서 죽어 가고
총알에 맞은 비행사도
미소와 함께 산산조각이 날 거요.
그러나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씹어 온
부드러운 핑크빛 살점은 내 입맛에 안 맞아
오늘은 또 다른 발치에 몸을 던지리라!
나는
머리에 빨간 물을 들인
너를 노래하리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
어쩌면 창끝처럼
날카로운 이 시간을
살아남은 이는 오직
너와
너를 좇아 이 도시 저 도시 달려간
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바다 건너 저 멀리
밤의 동굴 속에 몸을 숨기라
나는 런던의 안개를 뚫고
가로등의 불타는 입술을 너에게 넣어 주리라.
대상의 행렬이 길게 늘어지고
사자들도 몸을 사리는 황야의 땡볕,
바람에 찢기고 먼지로 뒤덮인
너에게
나는 타오르는 뺨을 사하라 사막처럼 바치리라.
너는 입술에 미소를 가득 물고
바라보겠지-
얼마나 멋진 투우사인가!
그러나 나는 갑자기
죽어 가는 황소의 눈길로
특별석을 향해 질투의 창을 던지리라.
너는 무심코 다리에 올라서서
생각하겠지
다리 밑은 멋지겠거니
그러나 나는
다리 밑 센 강에 풍덩 빠진 채
썩은 이를 드러내고
너를 부른다.
너는 백마의 열기 속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화살을 쏘거나 매를 잡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산봉우리에 기어올라
벌거벗은 몸을 달빛에 태우며 너를 기다린다
건강한 나는
필요한 인물
사람들은 내게 명령한다,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라!
포탄으로 찢어진 입술에 늘어붙은
너의 이름은
내 마지막 소리가 되리라.
왕관을 쓴 채 종말을 맞을 것인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생명의 거센 파도를 제압한
나는 무엇에든 입후보할 자격이 있다
우주의 황제도
수갑 찬
죄인도 될 수 있다
나는 황제가 될 운명
민중에게 명하리라
태양처럼 빛나는 내 금화에
너의 작은 얼굴을
찍어 놓으라고!
그리고 그곳,
세상은 툰드라로 털갈이를 하고
강물이 북방의 바람과 흥정하는 곳에서
쇠사슬에 릴리의 이름을 새겨 놓고
감방의 어둠 속에서 미친 듯이 쇠사슬에 입맞추리라.
하늘의 푸름을 잊은 자들
짐승처럼 털을 세운 자들이여,
들어라!
이는 어쩌면
폐병환자의 홍조로 표현된
이 세상의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른다.
3
시간도 날짜도 다 잊으리
종잇장을 벗삼아 두문불출
고통으로 빛나는 언어의
위대한 마술이여, 일어나거라!
오늘 나는 너를 찾아왔다
집 안에 감도는 거북한 기운을
금방 느꼈다
너는 비단옷 속에 무언가 숨겼고
공기 중에 향 내음이 진동했다.
그래 기분이 좋아?
<정말>
차갑구나.
이성의 담장은 곤혹으로 무너졌고
오한으로 달구어진 나는 절망을 쌓아올리고 있다
내 말을 들어줘
어쨌든
시체를 숨기진 마.
머릿속에 박혀 오는 무서운 말!
어쨌든
너의 근육 하나하나가
확성기처럼
소리치고 있다,
그녀는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그럴 리가,
대답해 줘
제발 진실을 말해 줘!
(날더러 어떻게 이대로 떠나란 말이야?)
눈동자를 파낸 너의 얼굴엔
두 개의 무덤 구멍.
무덤은 깊어만 간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세월의 단두대에서
그냥 주저앉을 것만 같다
나는 벼랑에 로프로 영혼을 매단 채
말재간으로 속임수를 쓰며 앞뒤로 흔들거렸다.
나는 안다
그는 이미 사랑에 지쳤음을
수많은 징후들이 권태를 짐작케 한다
내 영혼 속에서 회춘하라
육체의 향연을 심장에게 알려 주라.
누구나 여성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쯤
나도 안다
그러나 너에게 파리의 유행 패션 대신
담배 연기의 옷을 입힐 수 있다면
아직은
괜찮다.
그 옛날의 사도처럼
내 사랑을
거리거리에 전파하리
너에게 영원한 왕관이 마련되었고
그 왕관엔 나의 시가
경련을 일으키는 무지개처럼 새겨졌구나.
오랜 옛적에 전투용 코끼리들이
피르 황제의 승리를 완수했듯이
나는 천재의 걸음걸이로 너의 뇌수를 짓밟았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
너를 도저히 빼낼 수가 없구나.
기뻐하라!
기뻐하라!
너는 나를 완전히 죽였다!
이제
운하로 뛰어가
으르렁대는 물 속에
고개를 처박을 수만 있다면!
너는 입술을 주었다
얼마나 거친 입술인가
닿기만 해도 얼어붙는다
차가운 바위에 세워진 수도원에
참회의 입맞춤을 할 때처럼.
우당탕
문이 열리고
거리의 흥겨움을 품고서
그가 들어왔다
나는
비명으로 두 조각이 날 듯이
그에게 소리쳤다,
「좋소!
떠나겠소!
좋소!
당신의 아내는 남을 것이오.
비단옷 속의 수줍은 날개가 부풀어 오르도록
저 여자를 때려 주시오
도망가지 않도록 감시하시오
돌 같은 마누라 목에
진주 목걸이나 걸어 주시오!」
아, 이 밤을
어찌하리!
절망이 점점 세게 조여 왔다
내 통곡과 웃음소리에
밤의 주둥이는 질려 버렸다
그리고 너의 얼굴은 환영처럼 몸체를 빠져나와
눈길만으로 그의 주단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새로운 시인 뱌릭이
시온의 눈부신 황녀를 탄생시켰듯이.
나는 고통 속에서
내가 넘겨준 그녀를 향해
무릎 꿇어 절했다
모든 도시를
넘겨준
벨기에의 왕 알베르트
매수당한 영명 축일의 주인공이 나와 함께 하듯.
태양과 꽃과 풀의 황금빛으로 치장하라!
모든 생명체여, 봄기운으로 약동하라!
나는 오로지 극약만을 원한다
시의 극약만을 마시고 또 마시고 싶다.
내 심장을 훔쳐간 이여,
온통 다 가져간 이여,
꿈속에서도 내 영혼을 괴롭히는
사랑하는 이여, 나의 선물을 받아 주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거요.
오늘이란 날짜를 축일의 색깔로 칠하라
책형에 버금가는 마술이여
일어나거라
보라-
언어의 못이
나를 종이에 박았다.
1915
첫댓글 어마마하네요!
시인 이름부터 범상치 않더니~하하
좋은 시 배람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