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23호
오, 마이 캡틴! 오, 마이 탁번
박제영
1.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는다
시가 뭐냐고 물을 때면 선생을 불러댔다
오탁번의 시를 봐라
설명이 필요 없다
얼마나 재밌노?
시는 이런 맛이다
웃다가 배꼽잡고 웃다보면
슬그머니 마음 한 켠이 짠~해지는 것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그게 시다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어댔다
2. 탁본, 오탁번
오탁번 선생님 뵈러 장인수 시인과
애련리 원서문학관 갔던 건데
성과 속을 오가며
시와 문학과 우리말의 정수를 회 뜨시는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시종 울다 웃다 취했던 건데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
“투비 오어 낫 투비”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요렇게 해석하는 놈들은 죄다 가짜여
웃기고 자빠질 일이지
“기여? 아녀? 좆도 모르겠네.”
요게 진짜여
이 대목에서는 그만
배꼽을 잡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는데
돌아오면서 생각하는 거다
탁본을 뜨려면
詩알이
오탁번 정도는 돼야지
아무렴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공공연한 이 바닥의 비밀
어탁語拓을 뜨려면
詩붕語,
시붕어 중에서도
오탁번이지 암만
3. 자네 그리고 오탁번 외 제자
어느 날 선생께 따졌다
― 장인수한테는 인수라고 하면서 왜 저한테는 자네라고 하시죠?
― 인수는 내 직계 제자잖아
― 저도 방계 제자쯤은 되잖아요
― 그놈 참, 자네는 방외도 안 돼
그냥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섭섭합니다. 그냥 써주시면 안 될까요?
― 그럼 넌 내 번외 제자 해라
자네였던 나는
그날 이후 오탁번 외 제자가 되었다
나중에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외外라는 게 시문詩文을 평가하는 등급의 맨 꼴찌였다
자네면 어떻고
꼴찌면 어떠랴 싶었다
그 후로 다시는 따져 묻지 않았다
- 『천년 후에 나올 시집』(달아실, 3024)
***
설 연휴 마지막 날 아침입니다.
이번 설에는 오탁번 선생님께 전화도 못 드렸습니다.
낼모레(2. 14)면 선생님께서 떠나신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지요.
훌쩍 떠나신 선생님이, "자네 왔능가?" 그 목소리가
그립고, 아쉽고, 섭섭하여 졸시를 띄웁니다.
선생께서는 읽지 못하실 터이니
당신이라도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24. 2. 12.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첫댓글 원서헌은 국민학교 건물이었기에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어서 겨울엔 발이 시려웠지요.
시사랑카페의 동송님이 마침 실내화를 한아름 보내주셔서 아마도 그 후에 오신 제자들은 발이 시렵지 않았을 겁니다.
선생님 가시고 누가 거길 지키고 있을까 궁금하고 그 실내화들도 잘 있는지 궁금하네요.ㅠ.ㅠ
시인께서 떠나신 지 1주기군요.
시인은 떠나셔도 시는 남지요.
올해도 월요시편지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