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정재율]
소란스럽다
세수를 마치고 나왔는데 수건에서 유칼립투스 냄새가 난다 창밖엔 아이들이 모여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자세히 보니 개미굴을 보고 있다 큰 개미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아이들 사이로 지나간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줄 몰라 제자리에 멈춰 서 있다 먹을 것을 주고 싶은데 개미는 너무 작고 차는 너무 위험하게 달린다
조용히 해야 해
숨을 죽인 채로 한 명이 말하자 작은 목소리로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개미가 구멍에 들어갈 때까지 아이들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다 아이들은 책가방을 들어 조심 조심 이동하고 코너를 돌 때까지 계속해서 이쪽을 뒤돌아본다
아이들이 다 사라지면
어느새 거리는 조용해지고
밤이 되자 밖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맨홀 뚜껑이 열려 있다 그 속으로 긴 케이블 하나가 들어가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따라 들어간다 이렇게나 깊게 들어갈 수 있나 싶지만 아이들이 개미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나는 맨홀에 들어간 사람들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들이 안전하게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언제나 구멍 안쪽은 위험천만해 보이고 안전모를 쓴 사람들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 온다는 믿음, 현대문학, 2023
첫댓글 돌아보면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잘 때 여기저기 고장난 곳을 고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에는 막장 지금은 맨홀 아니 그냥 언제나 구멍
구멍은 빠져나와서 쉬는 숨이 더 무섭습니다 또 들어가야할 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