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에 고드름 주렁주렁 달린 집에서
얼마 전 세상 뜬 친구
선사禪師처럼 결가부좌하고
눈 부릅뜨고 앉아 있는 꿈을 꾸다 깼다.
잘려 나간 잠,이어지지 않는다.
거실에 나가 서성댄다.
그에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서도 풀리지 않을
척진 일 있었던가?
기억 통을 흔들어본다.
무언가 있는 듯 없는 듯,
창밖에선 희끗희끗 눈이 내리고 있다.
아파트의 앙상한 나무들이 두툼한 옷 해 입겠지
바람이 이따금 옷을 벗겨 다시 속 아리게도 하겠지.
고드름 집 마당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눈앞 식탁에는 새로 등갓 씌운 동그란 불빛
반쯤 식은 허브 차 한 잔.
퍼뜩 정신 차려보니, 아침.
창밖으로 내려다뵈는 아랫동네 아파트 공사판
눈 내리다 마니 더욱 어수선하다.
잠깐, 저 크레인들, 젊은 수탉들처럼 목 꼿꼿이 세우고
공사판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네.
가만! 우리도 한때 볏 갓 올린 수탉들처럼
겁 없이 무교동 청진동을 휘젓고 다녔지.
그때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그립다.
있는 그대로?
슬그머니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
꿈 깨기 전 선사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왜 눈 부릅뜨고 있지?
―나는 있는 그대로 죽었어.
―죽은 후엔 바꿀 수 없나?
―있지. 더 있는 그대로로.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
첫댓글 더 있는 그대로... 그리하여 오늘도 카르페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