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과 남이장군의 유래
Ⅰ. 남이(南怡)장군의 출생
남이장군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서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조선 3대임금 태종(이방언)의 네째딸 정선공주가 의령 남씨
남휘와 결혼하고 부친 남빈을 낳았다.
부친 남빈(南彬)은 조선 7대임금 세조(수양대군)와는 고종 4촌간으로.
지금의 군수급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남이장군은 태종임금의 진외가 증손자 관계이다.
결혼은 세조가 7대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한 공신 권람의 딸과 결혼
하여 명성을 떨쳤다.
선착장에서 남이섬을 향히는 유람선
Ⅱ. 남이장군의 북정가(北征歌)
세조 3년 1453년에 나이 17세의 최연소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함경도 일대에서 터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3개월 만에 평정하였
고, 바로 이어서 만주 요동의 노략자 여진족을 '강순'장수와 함께 출
전하여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와같이 남이장군은 용맹하고 지혜로우며 기개(氣槪)가 보여 7대
세조(수양대군) 임금의 사랑을 받아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兵曺
判書) 자리에 임명되었다.
◆ 남이장군의 북정가(北征歌) 백두산석 마도진 (白頭山石 磨刀盡) 두만강수 음마무 (豆滿江水 飮馬無) 남아이십 미평국 (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수칭 대장부 (後世誰稱 大丈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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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磨 -- 갈마. 刀-- 칼도. 盡 -- 다할진. 飮 -- 마실음
馬 -- 말마. 無 -- 없을무. 平-- 평평할평.
誰--누구수. 稱 -- 말할칭. 丈--어른장.
※ 북정가 풀이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 시는 남이장군이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 이다.
웅장하고 대담하며 기상이 넘치는 시이다.
그렇지만 이시가 나중에 후환(後患)이 된다.
남이섬 모형은 북한강에 떠있는 반달 모형
Ⅲ. 남이장군의 죽음.
남이장군이 27세때의 일이다.
밤 하늘의 혜성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남이장군이
"묵은 것이 가고 새것이 나타날 징조다"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병조참지인 간신 유자광(柳子光)이 듣고 이말의 뜻을
역모하기 위하여 장군의 담대하고 나라사랑의 기상을 나타낸
북정가(北征歌)의 셋째 구절중 '미평(平)국의 평평할 (平)을
미득(得)국의 얻을 득(得)으로 고쳐 당시 조선 8대 예종에게
거짓 진언하여 나라를 찾이하려는 "역모죄'로 몰아 1818년
병조판서 14개월만에 참수(斬首)를 당한다.
男兒二十 未平國을 → 男兒二十 未得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을 →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예종은 유약(柔弱)하여 정사에 능하지 못하고, 한명희, 신숙주, 유지광,
등 조정의 원로들과는 남이의 젊은 패기와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 참수(斬首)의 방법
기록에 의하면 한강가에서 두팔과 두다리 그리고 머리를 별처럼 5개
방향으로 우마차에 묶여 참수를 당했다 한다.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강순(당시 영의정. 80세)도 같은날 함께 참수를
당했다 한다.
남이장군의 묘 (1973년, 경기도 기념물 제 13호)
Ⅳ. 남이장군의 묘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낙향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710
년 (숙종36년) 10월 9일에 쓴 책 <남이장군 묘제문>에 의해 묘소가 확
정 되었다.
※ 남구만의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갈려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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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400여 년이 지난 후인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의 주청으로 관작(官爵)이 복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지금은 충무공 남이장군으로 부르고 있다.
위치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천리.
묘소 입구의 길 : 잘 정비가 되지 않은 소나무의 숲길.
묘의 모습 : 묘소는 2단으로 쌓인 석축 대 위에 2개의 봉분이 있다.
봉분은 사성(沙城)으로 둘러 싸였으며 부인과 쌍분으로 호석을 둘렀다.
묘비와 상석이 있고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배치 되어있다.
묘는 1973년 경기도 기념물 제 13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이섬에 있는 장군의 묘는 가묘로 섬 이름의 의미를 부각시켜 장군을
기리기 위한 뜻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남이섬에서 방향과 관람 안내도
Ⅴ. 남이장군의 설화.
가. 남이 장군의 탄생 설화
경기도 이천 백족산 의 굴바위 근체에 큰 사찰이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안개가 끼더니 승려한분이 사라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많은 승려들이 사찰을 떠나고 마침내 승려 한사람
만 남았다.
이분은 마지막 친구를 찾아 이별을 하려고 하산하였다.
친구는 절을 떠나도록 권유했으나 끝내 절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한다.
친구는 하는 수 없이 '무명옷 한벌'을 내놓고 비록 때가껴 냄새
가 난다 해도 꼭 이옷을 입도록 권했다.
다음날 동이트자 사찰을 찾았으나 승려는 온데간데 없고 굴바위 앞에
커다란 지네 한마리가 입에는 무명옷을 물고 죽어있다.
지네는 승려를 삼키려다 담배 진 냄새에 질식 하여 죽은 것이다.
그 순간 백족산(경기도 장호원에 있는 산) 허리에 오색 빛 구름이 일고
그 기운이 개미실(충북 음성군 감곡면)에 있는 남씨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달 후 태어난 아이가 곧 남이장군이다. 라는 설.
나. 남이장군 결혼에 관한 설화
남이장군이 어렸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작은 상자를 보자기
에 싸서 들고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보자기 위에 '분바른 여자귀신'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
히 여겨 따라갔더니 권람의 집으로 들어간다.
잠시뒤 그집에서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린 남이는 급히 달려가 자초지정을 묻고 허락받아 들어가 보니
['분바른 여자귀신'이 낭자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
"야 ·· 이 귀신아 썩 물러가지 못할까" 고함을 치자 허겁지겁 달아나고
낭자는 일어나 숨을 쉰다.
그 모습을 본 권람의 가족들도 모두 놀랍고 믿어지지 않았다는 설.
이로 인해 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권람의 딸과 결혼한다.
다. 무속인들이 자신의 신으로 모시는 자가 많다..
남이장군의 죽음이 유자광의 모략으로 젊은 나이에 비참한 참수를 당
한 수모를 장수(남이장군 지칭)는 소원을 들어주는 효험(效驗)=좋은
보람)을 밝게 해준다고 믿어 자기들의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가)와 (나)의 사례는 서울 관악구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의 탄생설화
와 귀신을 쫓아내어 생명을 구하는 설화가 매우 흡사하다.
지명 '낙성대(落星垈)"는 유성의 별이 떨어진 곳이 장군의 집이고,
지금도 유허터는 관악구 인헌동(仁憲洞)에 보존되어 있고 동명도
장군의 호=인헌(仁憲)에서 비롯된 동명이며 귀신을 쫓아내는 사례도
업적에 나타나 있다.
남이섬 선착장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북한강변로 1024번)
사진의 상단 북한강 가운데 남이섬이 보인다.
남이섬 내에 있는 장군의 묘 앞의 추모비
Ⅵ. 남이섬의 유래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남이섬길 1번.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198번지)
남이섬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빙하리에 붙어있는 육지인데
홍수때만 섬이 되었다가 1944년 청평땜이 만들어 지면서
온전한 섬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섬의 모양은 반달모양이며, 넓이 약 46만m²,
둘레는 약 5km로 여의도 면적의 5분의 1쯤 된다.
전설 속의 돌무더기, 남이장군묘?
남이섬은 남이장군묘의 이름을 따서 남이섬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고 전해진다.
섬 북쪽언덕에 남이장군 묘라 전해오는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이 돌을 옮기거나 집으로 가져가면 액운이 낀다는
전설이 있다. 고 한다.
1965년에 섬을 매입한 수재 민병도 선생이 봉분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우며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글을
김충현 선생의 글씨로 각인하였다 한다.
한때는 겨울연가의 찰영지로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남이섬에 들어가기 위한 선착장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북한강변로
1024번(가평읍 달전리 144 - 11번지)에 속하여 남이섬이 경기도
가평에 있는 것으로 잘못 말하기도 한다.
2020년 09.02 윤재문 다시 보냄<인터넷>
조사. 요약. 구성 / 학헌 양규봉
첫댓글 전통 유래는 마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