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의 존재 [주민현]
가방을 잃어버리고
어제와는 내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들어
명함은 비에 젖어 부드럽게 찢어지겠지
간밤의 메모 뭉치는
자동차 바퀴 아래를 구르고 있을 거야
카드사의 전산망에서 사라진 내가
나인지 모르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국수를 먹는다
집에서 개는 나를 몰라보고 꼬리를 치며
멍멍 짖는다
개집에는 내가 잃어버린 머리끈과 볼펜 뚜껑,
고지서 겉장이 찢어진 채 있다
주워, 네 거잖아
어떤 것들은 사라진 때부터
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
작아진 도트무늬 블라우스 가볍게 날아가고
풍선 같은 고무공 같은 꿈을 불어넣어줬던 선생님들도 함께 가고
이제는 인생의 고전이 되지 못하는
책들에 불이 붙어 날아가고
책상은 어쩐지 내가
모르는 내가 죽은 듯 낯설다
버려진 코카콜라 병을 모두 모아 두드리면
무질서한 음악이 되는 것처럼
수백 개의 썩은 달걀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이
놀랍게도 부화해 한꺼번에 삐악거리기도 하는*
나라는 가방
지구라는 가방 속으로
무엇이든 던지면
무엇이든 나의 새로운 가구가 된다
* 조지아의 마르네울리시 쓰레기 처리장에서.
- 킬트, 그리고 퀼트, 문학동네, 2020
* 해외에 나갔다가 가방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거나 다름없다.
가방이 아니어도 지갑을 잃어버려도,
일기장을 잃어버려도,
핸드폰을 잃어버려도 마찬가지다.
나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거나 다름없다.
그럴 땐 머리가 갑자기 하얘진다.
탈탈 털려버린 나의 영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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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의 존재 [주민현]
joo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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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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