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호수는 허구한 날 나를 불러 자기 앞에 앉힌다
“왜 자꾸 불러내”
가장자리로 떠밀려 온 것들은 모두
호숫가 벤치처럼 앉아 있다
마음 한 귀퉁이 털어내고 싶어서
물결 진 얼굴을 하고 땅콩 껍질을 바스러트린다
맥주를 따르면서
이 호수는 일어설 수가 없다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내뱉는 말들마다 잉어 지느러미를 달아
수면 아래로 지나가게 한다
“얜 늙지도 않나 봐”
이 호수는 나이 든 남자의 불거진 뼈를 보여줄 때가 있다
환풍구가 없는데
고인 냄새가 자꾸만 사라졌다
두근거린다와 두려워하다가 서로 다른 온도에서 변질되듯이
이 호수 앞에서는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아주 다르게 듣는다
환기가 안 되는 곳에서도 오염되지 않는 건
너무 오래되어서 새것 같은 단어 몇 개뿐일 거야
내가 만난 호수는 모든 말이 선명하게
흐려져서 좋다
후회하는 싸움들도 좋다
나는 오로지 팔꿈치를 적시려고
당신을 불러다 시를 쓴다
―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사람, 2020.
첫댓글 두근거리다와 두려워하다가 서로 다른 온도에서 변질되듯이
사랑하는 거와 사랑 받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