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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이천 년쯤의 수메르 서사시'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 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땽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하잔 더 드시굴랑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나
- 고은 시 ‘선술집’ 모두
* [허공], 창비, 2008.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칼날이
포릉포릉 울었다
흐르는 물이
마침 있어주었다
천행인바
네가 풀다발이 아니라
네가 가여운 암노루 모가지가 아니라
물인 것
아비의 적이 아니라
흐르는 물인 것
너!
물을 잘랐다
잘린 물에
칼자국 없이
피 한방울 없이
아무도 없이
그냥 흘러갔다
1천3백 년 전 검객 이백이 하던 짓거리
1천3백 년 후 내가 한다
다
지지리 못난 상호모방의 짓거리
그런 중에도
그대가 순 한족이 아니라
저 알타이 오랑캐 핏줄로
장안 주작대로
이쪽
저쪽을 으스대던 것
페르시아 작부를 희롱턴 것
그러다가 어찌어찌 신라에서 건너간
난해한 사투리 국서
대번에 해독하던 것
술 만잔에
시 만수이던 것
나 또한 떳떳할 것도 없이
못 떳떳할 것도 없이
칼집에
칼 꽂아 넣어버린 뒤
발밑의 물
천치백치로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술 한모금 없이
만취의 시 한편 기어이 나오고 마는 것
칼집 속
칼끝 으릉으릉 우는 것
-고은 시 ‘이백 이후‘
<시인수첩>, 2016, 여름호
언제인가 온 듯한 곳이 있다
식은 가슴이
좀 더워지면서
온 듯
와서 산 듯한 곳이
나를 기다리는 듯한 곳이 있다
저 마루턱 넘으면
숨어
눈부신 철쭉꽃밭이 있으리라
거기 넘어가지 않고 돌아선다
물러나
개울 건너
누구네 집 얕은 잠 자는 멍멍이
괜히 깨우지 말아야겠지
잠 안 자는 염소나 닭 두어마리도
느닷없이 놀라지 않게 해야겠지
돌아오는 길 지나치는 마을에도
더 삼가고 삼가는 하루이기를
모처럼 길어진 내 그림자도 조심스러워야겠지
저승 따위 없이
이승에서
이런 날이 일곱번 여덟번쯤이라도
되었으면
죽은 사람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나는 살았다
열일곱살에 총 맞아 죽은
내 고향 동무 김봉태를 생각하는 저녁 무렵
지난날 같으면
저 마을의 난쟁이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 드높이 피어오르겠지
- 고은 시 ‘두메에서‘
[초혼招魂],창비, 2016.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루가 저물어
떠나간 사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오 하잘것없는 이별이 구원일줄이야
저녁 어둑발 자옥한데
떠나갔던 사람
이미 왔고
이제부터 신이 오리라
저벅저벅 발소리 없이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 고은 시 ‘하루’
[고은 전집 제5권],김영사, 2002.
두 사람이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어라
- 고은 시 ‘가로되 사랑이어라‘
* 문학동네 『순간의 꽃』 2001년 4월
가을걷이 끝나고도
삼동네 풍장 칠 일 없어요
반장 고갑룡이는
제 집 뒷방에 둔
깽매기 징 장고 들이 궁금해서
그것들 꺼내다 늘어놓고
먼지도 털어주고
잿물 찍어 쇠 닦아주기도 하다가
어디 한번 소리 못낸 깽매기 냅다 쳐보니
그 소리 동네에 다 들려
아닌밤중에 이 무슨 깽매기 소린가
도깨비양반 장난인가
죽은 칠성이 혼백 돌아와 신명나는가
그렇지 젊어서 죽은 칠성이
깽매기 자진모리 한번 눈 지그시 감고 신들렸지
얼쑤 어깨죽지 뛰놀았지
무논갈이 소 모가지 고단하듯 고단한 세월 신들렸지
- 고은 시 ‘깡매기 소리’
[萬人譜만인보2],창작과비평사, 1986.
우리 날씨 하나 천하일등이렷다
맑은 날
물 깨어져 소리나는 날
이런 날에는
일도 손에 철떡 달라붙는다
척척 잘 되는 일에
한나절 가고
또 한나절 가니
이 좋은 날 사는 복 일복이렷다
수동이 할머니하고
수동이 어머니하고
20년 고부 사이 신물나게 안좋더니
요새 함께 늙어
언니 동생보다 더 정내미 들어
고구마 캐는 날
물고구마 밤고구마 캐는 날
시어머니 며느리 함께 나가
고구마 삼태기 뼈빠지게 나르더니
쉴 참
생고구마 하나 깎아
이것 잡수어보셔라우
아나 너나 먹어라
나 입속에 손님 왔는지
뭣 안 댕기는구나
날 팍 저물었는데
아직 고구마 넌출 모아야지
등줄기 땀 식어 으스스 추운 저녁
거기에
어디 시어머니 있고 며느리 있나
- 고은 시 ‘좋은 날‘
[萬人譜만인보2], 創作과批評社,1986.
눈 오신다
눈 오신다
새해 아침 눈 오신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 강산에 눈 오신다
눈 쌓이신다
눈 쌓이신다
내 마음속 눈 쌓이신다
그렇지 않으냐
내달리는 길
내달리기만 한 길
쉬어가라고
눈 내리신다
펑펑 내리신다
밀치고
설치고
앞 다투는 삶
좀 뉘우치라고
눈 쌓여
여기저기 삶의 길 막히신다
눈 쌓이신다
눈 쌓이신다
나뿐인 나
이웃도
세상도 없이
오직 나뿐인 세상 돌아쳐
오손도손 나누던 삶의 날들
찾아보라고
새해 아침
이토록
눈 내린신다
발등까지
무릎까지 쌓여
두메산골 막혀
혹시 양식 떨어지지 않는지
혹시나 먹이 없어 굶어죽지 않는지
내 실낱 걱정에도
눈 내리신다
눈 그치신다
다시 오신다
내 나라 온갖 드렁칡 덮고
온갖 재난 묻고
누구도
누구도
그 누구도
한결의 뜻 이루라고
눈 내리신다
지나온 백년
지나온 60년 30년 10년
뒤돌아다보라고
맞이하는
백년 내일 펼쳐보라고
눈 오신다
눈 오신다
2010년 새해 아침 축복의 눈 이토록 쌓이신다
- 고은 시 ‘새해 눈 오신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창비, 2011.
며칠 전
이양빙(李陽氷)의 [초당집서(草堂集序)]를 펴보니
거두절미하고
안사(安史)의 난 그뒤
이백의 저술
십중기구(十中其九)를 잃었다 함이더뇨
더러 찾아낸 것도 있다 하나
재 풀풀 날려
산지산질(散地散帙)이었을 터
십중일(十中一) 그 가운데
행(幸)이라
주시(酒詩) 177수 버젓이 남아 있어
간밤의 내 만작(晩酌)에
마실 술 177잔에 이르렀으니
끝내 자빠졌으니
허나 아침에 눈 떠
쓰린 흉금으로
맹세컨대
태백사형(詞兄)이여
당신의 잃은 노래
십중구(十中九)를
동방 후생인 나
반드시 여생 대행(代行)하여
써
만년 황해 오가며
어느날은 이구(李句)로
어느날은 고율(高律)로
바람에 돛 팽팽하리니
보소서
당신의 만고수(萬古愁)
나의 상심벽(傷心碧)으로
오늘 창천만리 이루어지이다
당신 청련(靑蓮)이여 나 고조선 이래의 백수광부(白首狂夫)여
금석일신(今昔一身)이여
- 고은 시 ‘옛사람한테‘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창비, 2011.
시시할 것
아주 시시할 것
내 소원
선사 구석기 말 어느날
구름도 좀 있었겠지
그런 날
한 뜨내기 사내로든
한 뜨내기 사내 떠나보낸
한 계집으로든
나 죽고 싶어 그리 죽고 싶어
가을이건
겨울이건
이듬해 유들지는 봄이건
언제건
죽을지도 모르게
나 죽고 싶어
가령 조릿대 푸나무서리에 툭 떨어져 있는
철새 주검
그 옆
언어 이전의 느린 의성어 의태어 잠든 달밤 그쯤
- 고은 시 '나의 소원' 모두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잡기로는 따를 자 없었다
그것들 우는 일조차 천한 일로 여겼것다
슬픔조차도 뒤에 감추고 에헴에헴 했것다
그래서 제 애비 죽은 마당에도
아이 아이 곡이나 한두 번 하는둥 마는둥
하루내내 슬피 우는 건 그 대신 우는 노비였것다
오늘의 지배층 소위 오적 육적 칠적 역시
슬픔도 뭣도 모르고 살면서 분부를 내리것다
울음 따위는 개에게도 주지 말아라
그런 건 이른바 민중에게나 던져주어라
그 민중이나 울고불고 아이고 대고 할 일이다
그런 천박한 일 귀찮은 일은 내 알 바 아니야
하기야 슬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시인아 너야말로 그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우는 천한 곡비이거라 곡비이거라
감옥의 무기수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인생을 노래해 주시오
그 말씀 잊어버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다
- 고은 시 ‘곡비(哭婢)‘
이만한 가슴이면 좋겠네
잔물결 짓는
이만한 가슴속
그리움이면 좋겠네
그대의 반생애 수고 많았네
이만한 마음이면 좋겠네
물수제비뜨듯
물수제비뜨듯
어린시절
동그라미 무늬지는
그 마음이면 좋겠네
그대의 남은 생애 오고 있네
더도 말고
이만한 삶이면 좋겠네
하늘에 달
물에 달
물에 달이면
내 마음에 달 아닌가
그대와 나
이만한 삶이라면 그냥 좋겠네
- 고은 시 ‘은파‘
[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 2011.
시금치 씨 셋 뿌렸다.
시금치 나시면,
하나는 새가 뜯어 잡숫고,
하나는 벌레가 갉아 잡숫고,
하나는 내가 잡수어야지.
낮길,
짚신감발,
짚신 신고 가면
길바닥 개미 죽이지 않지.
지렁이,
어쩌다 나온 굼벵이 죽이지 않지.
밤길,
짐승들 잠 깨우면 안되지.
짚신 걸음 자취 없어,
안성맞춤이지.
벌써 칠성암 남새밭에 시금치들
처녀같이 자라났구나.
요년들,
요년들,
출무성히 자라났구나.
- 고은 시 ‘ 칠성암 노승‘
* 만인보 24권
그이들끼리
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위에도
그이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그이들은
밤 솔바람소리.
바위 보아
비인 산허리.
가을이 오데.
바위를 골라
나앉아 우는 추녀 끝
뜰에 떨어지는 풍경소리에
그이들끼리
살데.
이제, 돌아와 한 번 잊은 뒤,
도로 가고 싶은
그이들의 얼 바람진 산허리
그이들은
살데.
그이들은
살데.
- 고은 시 ‘ 천은사 운(韻)‘
* ‘절을 찾아서’ 중에서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거러운 미움 다하여
한자락 구름이다가
자취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어느 날 죽은 아기로 호젓하거든
또 어느날
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서럽거든
보게
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시절의 누나
내내 그립거든
보게
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
보게
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보게
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
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게
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
- 고은 시 ‘ 허공‘
* [허공], 창비, 2008.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무슨 잔치같이 날마다 차일을 치겠는가
무슨 잔치같이
팔목에
으리으리한 팔찌 끼고 오겠는가
빈손이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험한 세상 피멍 들며 살아왔다
조금은 잘못 살았다
너는 내달리기만 하였고
나는 풀잎 하나에도 무정하였다
인사동에 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어찌 15년 20년 친구뿐이겠는가
인사동에 오면
추운 날 하얀 입김 서러워
모르는 얼굴들
어느새 정다운 얼굴이더라
인사동에 가면
한잔 술 주고받을
친구가 있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얼마 만인가
얼마 만인가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오늘밤은 아직 내일이 아니더라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가운 친구가 있더라
인사동에 가면
- 고은 시 ‘인사동’
[두고 온 시] 창비, 2002.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작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 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 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누구네의 어린 외동딸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한다
- 고은 시 ‘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고은 전집] 제3권 시2 , 김영사, 2002
중국 남방의 보이차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어
그 향내 속에서
하늘 속 노랫소리가 들려야
향내로다
그래서 향내를 듣는다 하지 않는가
봄내 차 잎새 따
땅바닥에 내팽개쳐 두다가
내팽개쳐둔 채 잊어
아들 손자의 세월 이르러서
그 손자가
파헤쳐
한 잔 마시는 날
그 손자의 오랜 친구 온 날
- 고은 시 ‘보이차 한 모금‘
*어느 기념비/민음사,1997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 고은 시 ‘삶’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로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老姑壇)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 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한 채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 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求禮) 곡성(谷城)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 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돌아가서
멀리 있는 노고단(老姑壇) 마루도 깨운다.
깨어있는 것은
이렇게 저무는구나.
보라. 만겁(萬劫) 번뇌(煩惱) 있거든 저 강물을 보라
- 고은 시 ‘섬진강 에서’
여울에 빠져죽지도 않고
그냥 이런 대로
밋밋한 물에 떠내려가는 삶으로
살아온 바를
연보라 등꽃 드리워진 꽃그늘에서 살펴보시나요
아니시면, 초파일날 낮달자국 심심한
해설피 석양머리로 굽어보시나요
부처님
초파일 밤 요 내 가삼 잉잉거리는 수박등 한 덩어리로
세세상상 중생살이 역사의 어느 길목
어둠을 밝혀
겨우 겨우 제 걸음 발등이나마 잘못 디디지 않도록
아흐 등불 하나도 대자대비 아니시나요
- 고은 시 ‘초파일날‘
자 바다가
저토록 날이날마다 조상도 없이 물결치고 있는 것은
오래
하늘이 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저 하늘이 저토록 어리석은 밤낮으로
구름을 일으키고
구름을 지워버리고 하는 것은
바다에 내려오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빈 병같이 나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내 살붙이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내가 단 한번만이라도 남이 되어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나 하나 에워싼
이 세상의 수없는 남들을 모르는 무지를 살 수 밖에 없으리라
사람들이여 소년에게 놀라라 소년의 노래에 놀라라
-고은 시 ‘ 소년의 노래‘
* [두고 온 시] 중에서 , 창작과비평사-
새해 왔다고 지난날보다
껑충 껑충 뛰어
端午(단오)날 열일곱짜리 풋가슴 널뛰기로
하루 아침에
찬란한 세상에 닿기야 하리오?
새해도 여느 여느 새해인지라
궂은 일 못된 일 거푸 있을 터이고
때로 그런 것들을
칼로 베이듯 잘라버리는
해와 같은 웃음소리 있을 터이니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쥔 양반과 다툴 때 조금만 다투고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눈을 부릅떠서
지지리 못난 사내 짓 고쳐 주시압.
에끼 못난 것! 철썩 볼기라도 때리시압.
그 뿐 아니라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우리 집만 문 잠그고 으리으리 살 게 아니라
더러는 지나가는 이나 이웃이나
잘 안되는 듯하면
뭐 크게 떠버릴 건 없고
그냥 수숫대 수수하게 도우며 살 일이야요.
안그래요?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예로부터 변하는 것 많아도
그 가운데 안변하는 심지 하나 들어 있어서
그 슬기 심지로 우리 아낙네들 크낙한 사랑이나 훤히 밝아지이다.
마침내 우리 한 세상 훤히훤히 밝아지이다.
- 고은 시 ‘새해 두어 마디 말씀‘
* 고은시전집2/민음사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셔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셔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 고은 시 ‘가을편지’
드물고 드문 일이었다
애꾸눈인 그는
별돌 한 판을 찍어내는데
30분이 걸렸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인가 다시 찍었다
잠바 입은 사장이 내쫓았다
그는 혼자 벽돌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 벽돌은 잘 팔렸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벽돌 한 장 쌓는데
10분이 걸렸다
쌓은 뒤
몇 번인가 고개를 갸우뚱
다시 쌓았다
십장이 내쫓았다
쫓겨간 그는
집 한 채를 짓고 죽었다
소원성취
오랫동안 탈나지 않는 집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못을 박았다
박은 뒤
영영 빠져나오지 않도록 또 박았다
장도리가 아주 흥이 났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었다
- 고은 시 ‘어느 노동자‘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수많은 꿈이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의 난해
그 난해의 현대였다.
원(圓)보다
각도의 기수였다.
도시의 자식아
도시의 자식아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
할아버지도 뭣도
민족도
정절을 매운 아내 따위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1년에 한두 번 어머이였다.
제1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2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5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12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13의 아이가 달려간다.
달려가도 좋다. 달려가지 않아도 좋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새의 니힐
유리 또는 거울
거울 속의 자아란
난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병든 폐는
의식의 파편으로 푸르렀다.
푸른 절망
그러나 유일한 윤리인 날개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어깻죽지와 겨드랑이에 달리지 않았다.
슬픔 따위보다
홍소(哄笑)하라. 룸펜만이 최선이었다.
당연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식민지 수도 서울을 떠나
그를 모르는 제국의 수도 토오꾜오에 가서 죽었다.
레몬 향기가 맡고 싶다.
이것이 그의 죽은 얼굴에
흰 강보가 덮이기 전의 말이었다.
처음과 끝이 짜여져 있었다.
제15 제16의 아이가 달려가지 않았다.
- 고은 시 ‘이상’
* '시로 쓴 현대 한국시인'13편이 [창작과 비평]
1999년 가을호,
** 고은: 본명은 고은태(高銀泰). 문학적 공로로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와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8년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나 2018년 미투 운동으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제명되었다.
1933년 전라북도 군산시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바야시 토라스케(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최남선, 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했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무렵 고은은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가 근처에서 훈련하던 예비군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이문열 등은 1970년대 초중반 고은의 성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지탄을 받자 순수문학을 하던 그가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돌변했다고 말한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고은은 당시 순수 문학계에 대해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가짜 문인들이라고 비판했다. 참고로 1970년대 초 고은의 성폭력 문제를 거론한 시인들이 주로 순수문학계였다고 한다.
한국 문단은 고은을 전반적으로 박하게 평하며 어디까지나 원로라서 대접을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문학적 담론이나 평론의 대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지도 않을 뿐더러 일반 대중에게도 대표작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도 없다. 예를 들어 다른 문학자의 유명한 대표작으로는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육사의 광야,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등이 있다. 그나마 대중에도 좀 알려진 게 있다면 김연아 헌상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 정도. 하지만 이것도 인터넷 커뮤니티들 반응을 보면 대부분 오글거리고 유치하다며 까는 게 대부분이다. 즉 애송되는 시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1974년 - 한국문학작가상
1988년 - 만해문학상 (시집 만인보)
1991년 - 중앙문화대상
2002년 - 은관문화훈장
2005년 - 노르웨이 국제문학제 비에른손 훈장
2006년 - 스웨덴 동아시아 문학상 시카다상
다만 일련의 사건으로 이들 중 상당수는 박탈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미투 운동 때 최영미가 고은의 과거 상습적 성추행 행각을 폭로하여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거기에 그가 과거 등단 직후인 60~70년대부터 해당 폭로보다 심각한 행각을 벌여 왔으며 이에 대한 폭로가 번번히 묻혀왔다는 것까지 알려졌다. 서울시는 2월 28일 고은을 기리기 위해 3억 원을 들여 서울시청사에 조성한 만인의 방을 즉시 철거하였고# 기타 다른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들도 기념사업을 모두 취소했다. 국내 대표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의 상임고문직에서도 사퇴하고 탈퇴했다. 다만 이미 수여된 은관 문화훈장 및 한신대학교의 문학 명예박사 학위 등은 박탈되지 않았다.#
고은은 성추행 의혹을 부인하며 2018년 7월 25일에 최영미를 상대로 10억 7000만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심 및 2심 소송에서 모두 패소하였다.# 2019년 11월 8일에 내려진 2심 판결 이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간간히 글을 발표한다.
첫댓글 애국시인
민족시인 고은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좋은시
말로에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감사합니다
홍수염님
고은 시인의 시
감상 잘했습니다
‘애국시인, 민족시인’,,. 이라고 적을 수 있을지는 의문 이지만,, 우리세대 에게는 “유명하나 전혀 유명하지 않은 시인”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 라는 말도, 그 근거가 희미하고 시들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고 지금의 세대들에겐 너무 ’읽히지 못하는 꼬임‘이 많아 난해하지요.
고은과 미당의 시를 정리 하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로 정리했지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