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한 首] 한식 풍경
春城無處不飛花(춘성무처부비화),
봄날 장안성 도처에 흩날리는 꽃,
寒食東風御柳斜(한식동풍어류사).
한식날 봄바람에 일렁이는 황궁의 버들.
日暮漢宮傳蠟燭(일모한궁전납촉),
저물녘 궁전에서 촛불을 건네주니,
輕煙散入五侯家(경연산입오후가).
가벼운 연기 고관대작 집안으로 흩어져 들어가네.
―‘한식(寒食)’·한굉(韓翃·생졸 미상·당 중엽)
* 春城(춘성) : 봄날의 장안성을 말한다.
* 御柳(어류) : 궁궐 안의 버드나무를 지칭한다.
* 漢宮傳蠟燭(한궁전랍촉) : ‘漢宮(한궁)’은 한대(漢代)의 궁궐인데, 당시(唐詩)에서 ‘漢’은 唐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한궁’은 당나라 궁궐을 말한다. ‘傳蠟燭(전랍촉)’은 《西京雜記(서경잡기)》에 “한식은 불을 금하는 날인데, 제후의 집에 초를 준다.[寒食禁火日 賜侯家蠟燭]”는 기록이 보인다.
* 輕煙(경연) : ‘靑煙(청연)’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 五侯家(오후가) : 《漢書(한서)》 〈元后傳(원후전)〉에 “한(漢) 성제(成帝)가 같은 날에 왕담(王譚)을 평아후(平阿侯)에, 왕상(王商)을 성도후(成都侯)에, 왕립(王立)을 홍양후(紅陽侯)에, 왕근(王根)을 곡양후(曲陽侯)에, 왕봉시(王逢時)를 고평후(高平侯)에 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五侯(오후)’는 동시에 侯에 봉해진 다섯 사람을 지칭하는데, 역사적으로 五侯는 상당히 많다. 여기서는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宦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西京雜記(서경잡기)》에 “한식은 불을 금하는 날이기 때문에 제후 집에 납촉을 준다.”고 하였다. 또 《漢書(한서)》에 “성제(成帝)가 여러 외삼촌을 봉하여 왕담(王譚) 등 다섯 사람이 같은 날 侯가 되니, 세상에서 이들을 오후(五侯)라 하였다.”라고 하였고, “환제(桓帝)가 환관들을 봉하여 단초(單超) 등 다섯 사람이 같은 날 후가 되니, 세상에서 이들 역시 오후(五侯)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 寒食(한식) : 절기명으로, 《荊楚歲時記(형초세시기)》에 “동지로부터 105일째인데, 이때는 바람이 거세고 비가 와서 한식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 불에 타 죽은 진(晉)나라 개자추(介子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은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寒食卽事(한식즉사)〉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한식에는 술·과일·국수·떡·탕·포 등 여러 음식을 만들어 산소에 가져가서 제사를 지낸다. 또한 보자기에 싸간 낫으로 벌초(伐草)를 하거나 무덤에 잔디를 새로 입히기도 한다.
<한식의 유래>
중국 춘추 시대 진(晋)나라에 문공(文公)이란 왕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죽고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19년 동안 함께 망명 생활을 하며 고생하며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되었다. 충성스런 신하 개자추(介子推)는 문공의 허기를 채워 주기 위하여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내어 구워 먹이기도 하였다. 나중에 임금이 된 문공은 개자추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문공이 개자추를 불렀으나 개자추는 면산(緜山)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그래도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불타 죽었다. 문공은 너무 가슴이 아파 해마다 이날이 되면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충성심을 기리고자 불을 때지 말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한식날이 되면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고자 불을 지펴서 따끈한 밥을 해 먹지 않고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한식은 양력으로 대개 4월 5일이나 6일쯤 되므로 식목일과 비슷한 때이다. 이 무렵은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기에 알맞으므로 특별한 놀이를 하지 않고 조상의 묘를 찾아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낸다.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건조기인데도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가 내리는 한식을 '물한식'이라 하며, 이날 비가 내리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 한굉[韓翃] : 당나라 등주(鄧州) 남양(南陽, 河南에 속함) 사람. 자는 군평(君平)이다. 천보(天寶) 13년(754) 진사에 급제했다. 시를 잘 지었고,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의 한 사람이다. 안사(安史)의 난 이후 후희일(侯希逸)이 치청(淄靑)을 지킬 때 불러 종사(從事)로 삼았다. 그 후 사직한 뒤 10년 동안 한거(閑居)했다.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이면(李勉)이 다시 불러들여 막료로 삼았다. 덕종(德宗) 건중(建中) 초에 시로 덕종 이적(李適)의 칭찬을 받았고, 가부낭중(駕部郎中)으로 지제고(知制誥)에 발탁되었다. 당시 한굉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자사(刺史)였다. 재상이 누구를 말하느냐고 물으니 황제가 시인 한굉을 가리켰다고 한다. 관직은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이르렀다. 원래 문집이 있었지만 전하지 않고, 명나라 사람이 편집한 『한군평집(韓君平集)』이 있다. 『전당시(全唐詩)』에 시 3권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한식날 장안의 한가로운 풍경을 스케치한다. 봄바람에 성 안 가득 꽃잎이 날리고 궁전에는 버들이 나부낀다. 온종일 불을 지피지 않고 찬 음식만 먹도록 한 한식날의 금령(禁令)이 해제되는 일몰 시간에 맞추어 황제는 측근 대신들에게 이제 불을 써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게 바로 촛불, 시인의 눈에는 황제의 은총처럼 옅은 연기가 저들의 저택으로 스미는 장면이 인상 깊게 비쳤나 보다. 말투는 무덤덤하고 소박하지만, 이런 궁중 의례가 퍽 색다르고 고상하게 보였기에 이 순간을 담아두려 하지 않았을까.
전혀 다른 해석도 있다. 황제가 한식날 금령을 어긴 채 몇몇 세도가들에만 특혜를 베풀고 있음을 풍자했다는 것이다. 그 실마리는 시의 원문에서 찾을 수 있다. 번역에서는 ‘저물녘 궁전에서 고관대작에게 촛불을 건네준다’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저물녘 한나라 궁전에서 오후(五侯)에게 촛불을 건네준다’가 정확하다. ‘오후’는 후한(後漢) 시기 환제(桓帝)에 의해 제후로 봉해진 다섯 환관. 황제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의 대명사처럼 쓰이곤 한다. 시인이 황실의 비리를 대놓고 비판할 수 없었기에 부득이 한대의 사례를 빌려 우회적으로 비꼬았다는 해석이다. 이러나저러나 당시 덕종(德宗)은 이 시를 좋아하여 오랜 기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인을 중용했다고 하니 굳이 풍자시로 읽을 필요는 없을 듯.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首(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4년 04월 05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