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 [주민현]
깊이 잠들었다 눈뜬 아침에
내 인생이 오래된 영화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오래된 것은 그저 오래된 것
한옥 마을 앞에서 '얼마든지, 얼마든지'
약속하는 두 사람 같은 것
레트로풍의 활짝
벌어지는 주름치마를 입고
인간의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볼 때
활짝 펼쳐진 입체 그림책같이
올록볼록 솟아나는 사람과 풍경들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은유로 가득해
어느 날 우리 집 초인종이 울린다면
시킨 적 없는 택배가 우르르 도착한다면
죽은 택배 기사와 언 손을 문지르며
쿠키를 쪼개 나누어 먹는 고요한 시간에 대하여
아코디언 연주자가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반복하는 것
트럼프 카드를 쥔 마술사가
여러 종류의 카드를 펼쳐두는 것
긴 기억의 회랑을 건너
문지방을 밟고 나의 방을 바라보면
녹색 담요를 두른 작은 개와
어둠에 휩싸인 책들
문지방을 밟고 반대편을 바라보면
할머니가 된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무엇을 먹고 무슨 꿈을 꾸는지
어떤 일과로 하루가
굴러가는지
그 방에는 아직 녹색 담요가 남아 있는지
작은 개가 내 손을 건드릴 때
내 인생이 오래된 레코드처럼
튀었다 흐르기 시작해
활짝 벌어진 주름치마는
무언가 말하려 살짝 벌어진 입술같이
-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
* 꿈을 꾸고 나면 한 편의 오래된 영화처럼 되새겨지는 어린 날이 남는다.
장기를 두다가 뒤집어버리고 투닥투닥 싸우다가 둘 다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는 장면.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만원버스를 탔는데 앉아있는 여학생이 내 가방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는 장면.
여학생의 무릎에 놓인 내가방 안에는 반찬통에 김치가 들어있어 노심초사하는 장면.
광화문에는 박지영 레코드사와 박인희 레코드사가 서로 좋은 음악을 빵빵 틀어주던 장면.
하교하다가 일부러 버스에서 내려 보니엠의 라스푸틴을 끝까지 듣고 다시 버스에 오르는 장면.
한번도 야한 장면은 없었는데도 그게 뭐라고 이덕화와 임예진이 나오는 영화를 보던 장면.
꿈은 늘 오래된 영화와 같아서 일기장이 필요없다.
첫댓글 이 분위기 참 좋네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계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