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슬픈 모리츠 씨 [주민현]
아주 슬픈 모리츠씨는
일생에 두번 넘어졌다;
대입 시험에서 한번
고객사 미팅에서 아주 큰 재채기를 해서 또 한번
아주 슬픈 모리츠 씨
양말없이 구두를 신은
해가 뜬 날 우산을 든
그런 슬픈 모리츠 씨
삶과 죽음은 가고 오는 것
모리츠 씨의 할아버지가 가고
조카가 가고
무지개의 빛이 문득
빛나는 머리칼 같다
개를 데려온 사람은 해변의 개를 찍고
아이가 있는 사람은 해변에서 노는 아이를 찍고
혼자 온 모리츠 씨는
해변에 가만히 발자국을 찍는다
그런 모리츠 씨와 나는
메리 에번스*와 함께
저물어가는 해를 본다
시간을 물쓰듯 하던 시절이 있었다**
꿈속에서는 웃었던 기억이 없다
멈추어 있는 게 좋았다
조금 투박하게
겨울이 오고 있어, 말하면
시작되는 음악
눈이 오는 소리로 시작되는 언어
오랜 겨울이 오는 냄새
시작되는 냄새
양말 비누 따위를 사기에 좋은 계절
영원은 꿈 속인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모리츠 씨와 나는
장례식과 결혼식에 간다
세월은
가볍게 등 밀어주는 꿈의 세신사
* 조지 엘리엇의 본명.
** "우리 삶의 저녁은, 사랑이여/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요."
(조지 엘리엇 「달콤한 결말이 왔다 가네요, 사랑이여」)
-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
* 태어날 때는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것일까?
물론 수많은 정자중에 가장 먼저 난자에 근접해 생명체가 되었으니
기적 같은 일이지만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살면서 모든 게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슬픈 모리츠가 될 수 있다.
모리츠의 어머니가 두 손 모아 빌고 빈다고 모리츠가 좋은 대학에 가거나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원망하진 않는다.
자식이 아파서 십자가 앞에 두고 두손 모아 기도한다고
자식의 아픈 부위가 기적처럼 낫진 않는다.
기도발 안먹힌다고 슬픈 모리츠가 될 순 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듯 멀쩡히 나을 수도 있다.
살면서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결혼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낳는다.
긴, 혹은 짧은 삶의 여정의 어떤 한 페이지에서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시인은 세월이 약이라고 말한다.
'세월은 가볍게 등밀어주는 세신사!'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슬픈 모리츠는 세월에게 등 내밀어 맡기고 때를 밀고 있겠다.
사랑이여,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나의 삶이여!
그래도 어딘가에 기대어 두 손 모아 기도하면 등짝이 시원해질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