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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코를 숨긴
젊은이들 눈망울이
꽃샘에 피어나는
수선화 보듯
봄은 급하게 온다
오늘은
백신 맞으러 간다
다 산 다늙은이지만
추사가 수선화를 보듯
좀만 더 살아보자
그동안 너무 싸돌아다녔다
이젠 위리안치!
새싹 올라오는 마늘밭에서
어정버정하다 보면
다 궁금코 어여쁘다
- 오 탁번 시 ‘위리안치‘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 오 탁번 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사랑하고 싶은날, 시월, 2009
강우식을 보면 오목눈이가 생각난다
젊은 날 다모토리에서 소주 마실 때도
꼭 오목눈이 눈처럼
오목한 눈을 뜨고
빤히 바라보곤 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상투적인 수사도 때로는 심금을 울린다!)
쭈그렁이 백발로
인사동 술집에서 다시 만났다
그의 빤달빤달한 이마에서
꽁지가 긴 오목눈이 한 마리가
찔레 열매 따먹다가 잽싸게 날아갈 때면
북극 빙하의 얼음빛
무지개도 언뜻 섰다가 진다
가짜가 많은 세상에서
강우식 저혼자
꼭 오목눈이의 눈으로
세상만사 오목오목 노려보고 있다
- 오 탁번 시 ‘오목눈이‘
* 미네르바, 2011년 봄호 / 시안, 이천십삼년 가을호
나이 육십
가는귀 먹어
오는 말
알아듣지 못하네
내 핸드폰 벨소리는 듣지 못하고
옆 사람 핸드폰 벨이 울리면
내 핸드폰 꺼내다가
나 홀로 싱그워지네
이해나 분석은 엄두도 못 내고
이냥저냥 지레짐작
시늉하며 웃네
가는귀 먹어
오는 말 들리지 않는
아아
이순耳順의 아침
- 오 탁번 시 ‘가는귀‘
[손님], 황금알, 2006.
마늘밭 씨마늘처럼 왕겨 덮고
춥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온 나는
소쩍새 울음처럼 마늘쫑도 싱그러운
잘 생긴 육쪽 마늘이 된 줄 알았다
참숯마냥 빛나던 머리칼
어느새 다 없어진 오늘,
아뿔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퍼마켓에서 파는
표백제 바른 깐 마늘이 되었음을
나는 이제 알겠다
눈물 날 만치 매운 마늘 맛 다 잃고
염치없이 이 나이를 살았고나
곡필曲筆과 아세阿世 남의 일 아니고
성희롱 강 건너 불 아니었다
자살을 꿈꾸며 살았던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
스스로 개칠하면서 살아온
부끄러운 나의 생애,
기계충 앓은 밤송이머리 큰 눈망울로
창호지문 금간 쪽유리에
☆☆☆☆ 모양으로 종이 오려 붙여
빠끔히 내다보던
천등산 아래 옛마을로
이제 돌아가야겠다
잘못 살아온 생새 이쯤 반납하고
돼지똥 거름 냄새 이냥 풍기는
겨울 마늘밭의 추운 씨마늘로
이제 돌아가야겠다
- 오 탁번 시 ‘마늘‘
[손님],황금알,2006.
지난 겨울 시인들과 정동진까지
눈꽃기차를 타고 여행갔을 때
정동진역 앞 해장국집에 들려
술 몇 잔에 거나해졌는데
목포에서 온 허형만 시인이
그의 아내를 나에게 인사시켰다
평소 형 아우 하는 사이어서
앙똥한 내가 술김에 말했것다?
―내가 시아주비니까
弟嫂씨 큰절 받아야겠소
뽕잎빛 동해바다가 하하하 웃었다
허형만 시인의 아내는
입가에 자란자란 미소를 흘렸다
사람들이 똥그라미를 하고 보는 가운데
나는 큰절을 받았다
지갑에서 돈을 몽땅 꺼내
시아주비는 절값을 냈다
절값으로 준 돈이
한 십이삼만 원은 될라나?
그냥 치레로 사오만 원 줘도 됐을 텐데!
弟嫂씨한테 절값으로 준 돈에
살살 배가 아파오는 나를 약 올리며
뽕잎빛 동해바다가
또 하하하 웃었다
- 오 탁번 시 ‘弟嫂‘
* 우리 동네, 시안, 2010
콧수염과 턱수염을 보름째 안 깎았다
화장실에서 오줌 누며 거울을 보면
잿빛 듬성듬성한 콧수염 아래
턱수염이 純銀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알토란처럼 통통한 여자들이
짧고 더부룩한 수염을 한
텁석부리 내 얼굴을 볼 때마다
異口同聲, 고색창연한 수사법으로
아흔 아홉 명 모두 다 합창하듯
어마! 멋져! 야단들이다
아무렴, 아예 상투까지 틀어 올리고
구레나룻까지 더하면
茶山과도 어깨동무하고
秋史와는 너나들이해도 되겠다
나야 별 벼슬 못했으니까
牧民의 그윽한 뜻은 엄두 못 내지만
올겨울 잣눈이 하루 걸러 쏟아지고
北風雪寒에 대나무 몽땅 얼어 죽은
歲寒을 났는데
松柏의 푸른 기상을 어이 모르랴
옛 선비 흉내 내면서
갈지자 걸음으로 희떱게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아내 앞에서
텁석나룻을 점잖게 쓰다듬으며
―어때?
―에구! 에구!
송곳눈을 한다
여자들이 멋지다고 아우성친다니까
―그런 말을 다 믿어?
천 원권 오천 원권에 나온 퇴계나 율곡보다
엄청 더 할아버지네!
이런 밴댕이 소갈머리 같으니라구!
이젠 반대해도 다 물 건너 갔다
텁석부리로 사는 내 生涯의 法이
99:1로 이미 통과됐다
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최고다
다음다음날 아침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질레트 세 날 면도기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싹 깎았다
텁석부리 내 생애가 이냥 요절났다
- 오 탁번 시 ‘텁석부리‘
* 우리 동네, 시안, 2010
새벽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당뇨가 심하던 진외육촌형이
일흔도 못 넘기고 훌쩍 떠날 때도
지난 동짓달
풍을 맞은 큰형님이
평균수명 간신히 채우고는
그믐달 지듯 눈 감을 때도
꼭두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 메세지가 뜨면
열에 다섯은 동창생 부음이다
몹쓸 병에 지지리 고생하던
동창생 하나 둘 떠나가면서
무슨무슨 병원 영안실 몇 호로
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식에
그만 주눅이 든다
술 담배 아직 그 타령인 나는
저승의 호출이 잘못됐을 것 같아
멀쩡한 배도 쓸어보면서
헛기침한다
동백꽃처럼 동백꽃처럼
질 때도 꽃 모양 고냥 지닌 채
숨 거둘 수 없을까
너부데데한 모습 보이지 않고
마실 갔다 돌아오는 것처럼
한 세상 끝낼 수 없을까
이웃에 마실 가서 친 화투판에서
돈 몇 푼 날리기는 했지만
동치미에 국수 말아 밤참을 먹고
막걸리도 몇 잔 했으니
다 본전은 한 것 아니냐고
혼자 생각하면서
사뿐사뿐 돌아올 때처럼
- 오 탁번 시 ‘마실’
*우리 동네, 시안, 2010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比喩가 있다
그으름 빛 굴뚝새나
뱀눈나빗과의 굴뚝나비처럼
흔해빠진 죽은 비유였지만
초가집 굴뚝 다 없어지고
심야전기 보일러로 난방을 하고
전기밥솥 가스렌지로 저녁을 해서
어머니의 근심처럼 피어오르던
저녁연기 다 사라진 요즘
굴뚝새와 굴뚝나비가
살아서 팔딱이는 비유가 되었다
―굴뚝새……
―굴뚝나비……
눈깔사탕 입안에서 굴리듯
가만히 불러보면
아득한 과거로 되감기하는
흑백 필름이 차르르 돌아간다
죽었던 비유가
눈을 반짝 뜨면서
굴뚝새 굴뚝나비 떼로 날아오른다
누나가 인두로 잘 다린
설빔의 서늘한 옷고름과
옷고름에 흙 묻혀 돌아오면
눈 흘기던 누나의 얼굴도 떠오른다
따듯한 굴뚝의 온기를 훔치는
가벼운 굴뚝새도
거미줄 용케 피해 날아가며
알 까놓고 죽었던 굴뚝나비도
죽었던 비유의 눈을 뜨고
간지럼 태우며 날아오른다
- 오 탁번 시 ‘굴뚝‘
* 우리 동네, 시안, 2010
아침에는 양파밭에서 놀고
낮곁에는 마늘 밭에서 뒹굴다가
저녁 어스름에는
지리산 대나무 숲에 들어가
짠 소금 먹다가 돌아온다
양파즙 한 봉지
흑마늘환 한 옹큼
죽염 한 찻숟갈
아침저녁으로 먹지만
혈압은 귀먹었는지
꿈쩍도 않는다
봄이 오는 소리
아직도 먼 雨水날 아침
평균수명을 향하여
앞으로 갓!
혼자 외치면서
가시오가피즙 하나 따서 마신다
가시오가피 가시오가피
꼭 무슨 별자리 이름인양
呪文처럼 외우면서
나도 한 그루
가시오가피 나무가 되어
날카로운 가시 세우고
아득한 銀河水 물결을
건너갈까 한다
- 오 탁번 시 ’가시오가피‘
* 우리 동네, 시안, 2010
1
당신은 내가 한밤중 홀로 마시는
약간 쓰디쓴 梅實酒 한 잔입니다
빛바랜 습작노트 갈피에 있는
향나무 냄새나는 몽당연필입니다
'껌정거북표의 고무신짝'이라뇨?
'기러기표 옥양목'이라뇨?
이 기막힌 브랜드가
내 前生의 습작노트에 적혀 있던
地上과 天上의 이미지라는 것
용용 몰랐죠?
2
까마득한 新羅의 하늘 아래
옛날옛적 당신의 姨母 한 분이
우리 同福 吳氏 잘생긴 男丁네한테
꽃가마에 놋요강 싣고 시집을 왔을까?
당신의 멀고먼 堂叔 한 분이
우리집 밭 부쳐먹고 賭地도 안 내고
마늘쫑보다 싱싱한 사랑의 혓바닥으로
내 아득한 姑母의 몸을 홀려냈을까?
당신은 왕겨빛 그리움이죠?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맞죠?
- 오 탁번 시 ‘未堂을 위하여‘
[1미터의 사랑],시와시학사, 1995.
'오리알 빛 하늘에 티끌 한 점 없어지고'
―신소설「秋月色」에 나오는 가을 하늘을 묘사한 말이라네
'카페 홀짝 / Cafe One Pair'
―성수대교 쭉 건너 왼편에 있는 조그만 카페 이름이라네
상투 잘리고 목 떨어지는
개화기의 조선 땅
푸르디푸르다 못해 희디희게 물들어버린
스산한 가을 하늘을
오리알 빛으로 바라본
정녕 슬픈 시인이 있었네
한강이 금빛 허리 뒤척일 때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짝이 되어
술 한 잔 홀짝 마시는
카페 홀짝 / Cafe One Pair
시집 이름보다도 더 예쁜
이 술집 이름을
어느 시인이 지었을까
'杏子板 검자주 옻칠 소반에 정갈한 백자 대접 흰 달 같이
놓이고, 다른 반찬 소용없어 간장 한 종지 앙징맞게 동무하여
따라온 것이, 벌써 마른 속에 입맛 돌게 하는데, 간장 한 점 숟
가락 끝에 찍어 흰죽 위에 떨구고 한 술 뜨면'
―「魂불」에 나오는 흰죽 먹는 장면이라네
말 하나하나 고르며 밤 밝힌 최명희는
시 짓는답시고 죽을 쑤는 시인보다
정말 진짜 시인이었네
오리알 빛 하늘 바라보며
술 한 잔
홀짝 하고 싶네
간장 한 점 찍어
흰죽
한 술 뜨고 싶네
- 오 탁번 시 ‘ 詩人‘
[1미터의 사랑], 시와시학사, 1995.
요즘 나는 산사춘만 마신다
이별하면 안 될 사람과
이별하고 돌아오면서
포장마차에서 눈물 감추고 마시던
소주와 맥주는 아예 손 끊었다
싸고 쓴 소주는
너무 간단하게 몸 주고 돌아서는 여자처럼
뛰끝이 없어서 좋지만
여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맥주잔 부딪치며 나눈 추억은
담날 아침 설사로 말짱 도루묵이 된다
찰랑이는 산사춘 술잔에서는
회장저고리에 다홍치마 입고
사붓사붓 걸어오는 여자의
蓮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산사열매 따서 술 담가 마시려고
올봄 산사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밑동이 내 장딴지만한 산사나무를
10만원 주고 사다가 심었다
정성껏 물을 주고 거름을 했더니
산사꽃이 활짝 피어나고
꿀벌들 날갯소리가 따갑다
고추잠자리 날개빛으로
산사열매가 다닥다닥 익어가는
낭창낭창한 산사나무는
산사춘 담그는 나의 釀造場!
박달재 싱그러운 바람도
천등산 간질간질한 안개도
빨갛게 익은 산사열매 속으로
살며시 들어와 깊은 잠을 자는
오오 사랑스런 나의 술나무!
- 오 탁번 시 ‘술나무‘
* 우리 동네, 시안, 2010
수련이 피는 원서헌 연못에는
붕어 가족이 정답게 살고 있다
5년 전 뼘 붕어 여남은 마리 넣었더니
봄마다 산란을 한다
외바늘에 떡밥 꿰어 낚시를 하면
뼘 가웃 자란 어미 붕어도 낚이고
올봄에 부화한 눈썹만한 새끼 붕어와
작년에 태어난 전차표 붕어도
납죽납죽 잘만 잡힌다
원서헌 연못에는
다정한 붕어 가족이 살고 있다
허지만 우리집엔 가족이 없다
아들 딸 결혼해서 집 나가고
직장에 다니는 아내는 춘천에 있다
텅 빈 삼호 아파트 견디지 못하고
왕십리 오피스텔로 나앉은 나는
서울에서는 일단
무주택 독거노인이 되었다
시집 보낸 딸 보고 싶어 울다가도
백일 지난 외손자 생각하면
금세 하하 웃음이 난다
붕어는 IQ가 5밖에 안 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났나보다
- 오 탁번 시 ‘ 붕어’
* 우리 동네, 시안, 2010
―하날때, 두알때, 사마중, 날때
육낭거지, 팔때, 장군, 고드래뽕!
술래를 정하느라고 떠드는 소리가
토란잎 때리는 빗방울처럼 영롱한데
가위, 바위, 보 잘못 내는 바람에
에이 참, 그만 내가 술래가 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가쁘게 외치고 나서
동동걸음으로 숨은 동무들을 찾는데
빨래줄에 앉은 고추잠자리만
제풀에 날아올랐다 이내 앉는다
일렁이는 감나무 그림자도
굴뚝새 날아오는 검은 굴뚝도
이냥 아슴프레해지는 해거름,
저녁놀 반짝이는 장독대 사이로
나붓나붓 순이 머리카락이 보인다
까치걸음으로 몰래 다가서서
바둑머리를 톡 때리자
혀를 날름대며 나를 놀린다
―일부러 잡혀준 거야! 메롱!
숨을 데를 찾으며 생각해 본다
―쟤처럼 나도 그냥 잡혀줄까?
뒤안으로 뛰어가 토란잎 뒤에
궁둥이가 다 보이게 숨었는데도
순이는 나를 단박에 잡지 않는다
나 혼자 괜히 좀이 쑤시는 사이
나비 한 마리 내 뺨에 살포시 앉는다
- 오 탁번 시 ‘술래잡기’
* 우리 동네, 시안, 2010
일부변경선 건너가서
이제 두 돌 지난 손녀랑
며칠 잘 놀다 왔다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쁘지?
―하버지!
평생 국어교사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나보다
流音 ㄹ과 한 음절을 축약하여
'할아버지'를 '하버지'로
절묘하게 변환시키는
내 손녀가
진짜 국어교사인가 보다
씨엔 타워에 올라가
온타리오 호수를 보고 온 날
곰 인형 하나 사다주니까
'하버지' 부르며 달려오는
손녀를 보면서
나는야
文法이나 族譜 냄새나는
딱딱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두루마리 한지마냥 가볍고 서늘해서
맺음도 받침도 없이
이냥저냥 다 좋은
'하버지'가 된다
- 오 탁번 시 ‘ 하버지‘
* 우리 동네, 시안, 2010
가로 : [명][부] 옆으로 된 방향, 횡橫.
세로 : [명][부] 양쪽 끝이 위에서 아래로 놓인 상태. 종縱
밀물 : [명] 조수가 육지를 향하여 밀려오는 현상 또는 그 조류.
썰물 : [명] 바닷물이 밀려가서 해면이 낮아지는 현상, 또는 그 바닷물.
pull : [vt.] 끌다, 당기다, 끌어당기다, 잡아끌다.
push : [vt.] 밀다, 밀치다, 밀어서 움직이다, 밀어내다.
아무리 외워도 늘 소용없다
가로 세로 언제나 헷갈려서
라디오를 켤 때 안테나가
가로로 올라가는지 세로로 올라가는지
밀물때 조개를 캐는지 썰물때 캐는지
제부도 바닷길이
물보라 속으로 잠길 때가
밀물 때인지 썰물 때인지
정말 모르겠다
pull에서 밀고 push에서 당기고
르네쌍스 호텔 커피숍 약속이 있는 날
무거운 문 밀고 들어가다가
그만 또 헷갈린다
pull이라고 써 있는데도
문을 힘주어 밀다가 서양인한테 들키면
국위손상이 되고 벌금도 내는 것 아닐까?
내가 바보일까?
중학교때 가끔씩 1등도 했었는데?
첫사랑 여자의 왼쪽 눈썹 위에
주근깨가 다섯개 있던 것도 기억하지만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다
사랑하는 여자와 그리움을 나눌 때는
위에서 아래로 놓인 상태라야 되는지
옆으로 된 방향이라야 되는지
당겨야 할지 밀어야 할지
밀물처럼 하는지 썰물처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이 간단한 어휘들이 내 앞에 와서는
왜 해체되어 무의미가 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 오 탁번 시 ‘어휘에 관한 명상‘
[1미터의 사랑], 시와시학사, 1995.
무당새가 우편함에 또 알을 깠다
올해는
큰 우편함 작은 우편함
양쪽에 다 둥지를 틀었다
주근깨 나란한 하늘빛 알이
다섯 개씩
앙증맞은 둥지 안에
반가운 편지처럼 다소곳하다
무당새가 우편함에 둥지를 틀면
우체부 아저씨는 골치 아프지만
할아버지는 싱글벙글한다
우편함 대신으로
대문 옆에 갖다 놓은 항아리 안에
편지를 넣던 우체부가
우리 할아버지 흉을 본다
―어르신은 꼭 애들 같아요
예쁜 무당새가
아기자기 봄소식 전해주는
애련리 198번지
우리 할아버지 집
- 오 탁번 시 ‘ 봄 편지’
* 우리 동네, 시안, 2010
바람결에 자늑자늑 흔들리는
곱슬머리 백발을 한 부처님들이
단체사진 찍고 계신다
부처님들이 떼를 지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애련리 원서헌으로
朔風을 오셨나?
하나 둘 셋, 김치!
가지가 척척 휘도록
부처님들의 곱슬곱슬한 머리통은
참 예쁘게도 크기는 크다
점심공양 알리는 雲版이 울면
모란꽃 산목련 이팝꽃
자밤자밤 골고루 넣은
점심공양 맛있게 잡수신다
黃砂 날리는 날
눈썹도 예쁜 나비보살들이
佛頭花 송이송이
수련이 벙그는 원서헌 연못물로
머리를 감겨드리면
부처님 큰 머리통에
연못물이 하냥 넘쳐서
실크로드 건너
天竺의 설산도 다 적시겠다
- 오 탁번 시 ‘佛頭花‘
* 우리 동네, 시안, 2010
장터 골목
간판도 다 떨어진
호젓한 별다방을 보면
그냥 쑥 들어가고 싶다
대덕산 임야도를 보여주며
한 오천 평쯤
희떱게 뚝 떼어주면
낙낙한 마담은
싹싹하게 내 품에 안겨올까
살별처럼 흘러간
옛사랑 다시 만난 듯
'그냥커피' 홀짝 마시면서
눈흘레나 하고 싶다
- 오탁번 시 ‘별다방‘
* 우리 동네, 시인, 2010
앙당거리고 서 있는
冬柏나무는
1·4후퇴 피란길에
찰가난한 어머니가
무명 포대기에 싸서 업고 가던
눈깔이 화등잔만 한
연약한 내 어린 몸 같았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천등산 박달재의 강추위 속에서
小說, 大雪, 小寒, 大寒
사나운 눈보라에 마주서서
호젓이 겨울을 견디는
안쓰러운 冬柏나무는
피란 갔던 尙州땅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겨우겨우 숨을 이어가던
손님이 든 어린 나 같았다
소소리바람 아직 차가운
立春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冬柏나무 보러 나갔다가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눈에 띌락말락 좁쌀만 하던
冬柏나무 꽃망울이
어느새 강낭콩만큼 자라서
길둥근 冬柏잎 사이로
거먕빛 볼을 반짝 쳐들고 있다
목숨 부지한 冬柏나무여
호되고 하전한 生涯를 견디는 것이
이토록 찬란하다
- 오 탁번 시 ‘ 冬柏 2‘
* 우리 동네, 시안, 2010
부엌 바람벽에 걸린
국자나 채반이나
부뚜막에 놓은
종지나 보시가 같은
재 냄새도 좀 나는
그런 여자가 좋다
부싯돌을 치면
제 몸을 태우는
부싯깃 같은 여자
그런 여자가
좋다.
- 오 탁번 시 ‘ 그런 여자‘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숫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지난 해 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줬나?
줄잡아 몇만 평도 넘을 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었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김지헌 시집 보냈나?
—서석화 시집 보냈나?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 오 탁번 시 ‘시집보내다‘
* 시집 <시집보내다>에서
1
왼쪽 머리가
씀벅씀벅 쏙독새 울음을 울고
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
나뭇가지 휘도록 눈이 내린 세모에
쉰아홉 고개를 넘다가 나는 넘어졌다
하루에 링거 주사 세 대씩 맞고
설날 아침엔 병실에서 떡국을 먹었다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가
첩자처럼 병실을 드나들었다
수술받다가 내가 죽으면
눈물 흘리는 사람 참 많을까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비로소 저를 미워할까
나는 새벽마다 눈물지었다
2
두통이 가신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언어 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 버렸다
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
- 오 탁번 시 ‘죽음에 관하여’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 오 탁번 시 ‘해피 버스데이‘
[우리 동네],시안 ,2010.
혼자 있을 때
내의와 양말을 빨면
환한 바깥에다 내다 걸기 뭣해서
화장실 벽에 숨겨놓듯 걸어놓는다
비알밭 쥐옥수수도
메뚜기처럼 살이 오르는
한여름 어느 날
감곡에서 놀러온 여류시인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빨래를 걷어서 들고 나온다
-빨래가 햇볕을 못 보면
곰팡이가 슬고 냄새가 나요
잠자리 떼 앉았다가 제풀에 날아오르는
심심한 빨랫줄에다 훨훨 넌다
-햇볕이 너무 좋아서
빨래들이 깔깔깔 웃겠네요
햇볕 한 번 받지 못하고
칭얼칭얼 보채던 빨래가
자늑자늑 흔들리는 빨랫줄 위에서
빨주노초파남보 눈부신 햇살을 마시며
깔깔깔 웃는 소리가
그날 낮곁 내내 들려왔다
- 오 탁번 시 ‘하일서정(夏日抒情)‘
<동리목월>,창간호
[오늘의 좋은 시],푸른사상, 2011
아내와 함께 스포티지 몰고
홍쌍리 매화마을로 매화구경을 갔다
한창 피어나던 매화는 꽃샘추위에
엇, 추워! 하면서 올스톱,
피다만 매화만 싱겁게 구경하고
내친김에 핸들을 꺾었다
장흥에서 제주 성산포행 카페리를 탔다
사람은 3만8천원, 자동차는 6만8천원
넘실대는 푸른 봄바다는 공짜!
이중섭의 아내같이 생긴 수선화도
추사의 족제비붓 같은 솔잎도
재재재재 춥다
한라산 산록을 재는 측량기사인듯
몇 번이고 돌고 돌았다
黑石英처럼 빛나는 까마귀떼와
눈 쌓인 한라산이
浮雲처럼 다 하릴없다
이틀을 묵고 떠나는 날 아침
조천 바닷가에 있는
조붓한 '시인의 집'에 차 마시러 갔다
손세실리아 시인이
꼭 어는 낭만 시인의 아내인듯 사는 곳
방명록에 한 줄 쓰라는 말에
나는 붓펜으로 일필휘지했다
-시인의 집에서
손세실리아와 사랑을 나누다
2012년 立春
그걸 받은 시인이
내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웃었다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얼른 한쪽으로 치워놓을 줄 알았는데
나, 원, 참!
내 아내에게 냉큼 보여주다니!
차를 마시고 일어설 때
아침 요기하라면서
치즈 토스트까지 챙겨주었다
배 타고 바다 건너오면서
토스트 냠냠 잘 먹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내 답장이 왔다
-다녀가신 순간이 춘몽 같기도.....
그렇기도
아무렴, 一場春夢이긴 해도
이쯤 춘몽이면 썩 괜찮은 것 아냐?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히힛히힛, 봄바다가 자꾸 웃었다
- 오 탁번 시 ‘ 春夢‘
지난겨울에는
마종하가 갔다
여름엔 이기윤이 갔다
엊그제는 신현정이 갔다
잘 가라
새끼들!
未堂文學賞이
末堂文學賞이 되고
알음알음으로
돌려가며 賞 타먹는
이 풍진 세상 버리고
1등으로
저승 테이프 끊었다고
누가 賞牌 주냐?
焚香,
再拜,
大醉,
슬픔의 테이프도 몽땅 끊기고
늬들 때문에
이제 내 肝은
간도 안 맞는다
새끼들!
- 오 탁번 시 ‘送友人曲‘
* <詩로 여는 세상> 2009년 겨울호.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떵거미가 질때 발소리 죽이고
뒷산에 올라가는 할머니 얼굴은
손자놈 콧물보다 진한 생의 때
잿빛 머리칼은 한줌도 안되지만
소나무의 아픔은 옛짐작으로도 안다
해 넘어가고 첫잠든 소나무가
은하수 멀리까지 단꿈 꿀 때
살며시 솔잎 따야 아프지 않다고
솥에 들어가도 뜨거운지 모른다
말없이 솔잎이 숨을 거둘때마다
젊은날의 사랑처럼 송편이 익는다
소나무의 슬픔과 솔잎의 아픔을
헤아리며 발소리 죽이시는 할머니는
그 옛날 단군 할아버지의 예쁜 애인
노루피 조금 마시고도 시셈만 하여
큰 꿈 이루는 단군 할아버지 애태우다가
이제는 훨훨 타는 마음도 식은 재 되어
수숫대처럼 가벼운 사랑만 남아서
당신의 옛날 애인 제사상에 올릴
손가락 자국 선명한 그리움 빚는다
가만가만 발소리 죽이며 솔잎이나 따는
다 저문 가을 들녁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 같은 서러움의 눈빛에는
푸르고 싱싱한 까칠까칠한 솔잎이
할아버지 한창때의 수염과도 같고
골이나서 일어서던 비밀의 가장자리
서로 맞부비며 엉킨 그것과도 같아
- 오 탁번 시 ‘솔잎’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 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뛰어오느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 오 탁번 ‘저녁연기 같은 것‘
1.
청계산 등산로 가에 있는
찻집 알프스 샬레의 토요일 오후
베란다 난간의 수세미외 넝쿨에서
수세미외 하나 뚝 따서
눈빛 서늘한 여인에게 주었다
"수세미외가 무슨 상징일까?"
여인은 대꾸를 하지 않고
청계산 가을 나뭇잎들만
뺨 붉히며 웃어댄다
"암 암 알고말고"
정말 쓸쓸한 마음이 되어
수세미외 하나 뚝 따서
쓸쓸한 여인에게 건네주는 일이
썩 괜찮다는 듯
2.
밤마다 지아비의 그걸 꼭 잡고 자던
하늘가로 날아가 버린 어느 아내가
예쁜이 수술받고 입원했을 때
플로로이드 카메라 받쳐놓고
입원실에서 지아비와 사랑을 나누었것다?
" 아파? 아파? 안 아파? "
지아비의 말에 배시시 웃던
한쪽젖이 작은 그 아내는
이젠 플라로이드 천연색 사진 속에
사랑의 추억으로만 남았다
" 안 아파요 안 아파 "
저승으로 간 예쁜 그 아내의
가만가만 속삭이는 소리에
아주 크고 잘 생긴 수세미외가
눈물 뚝뚝 흘리고 있다
- 오 탁번 시 ‘토요일 오후 ‘
< 한국문학, 1996, 겨울 >
오늘 나는 170원을 공짜로 벌었다
회신용 우표를 동봉하여 배달되는
그렇고 그런 우편물이 가끔 있는데
회신 안해도 되는 것들이 많다
인물백과사전을 내는 출판사나
데이터뱅크를 차려놓고
시인 작가와 대학교수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신문사나
여론조사를 하는 단체에서
회신용 봉투에 우표를 붙혀서 보내지만
나는 우표만 뜯어내어
요긴할 때 써먹는다
더듬이가 예쁜 물방개 우표는 100원
늦털매미 우표는 150원
하늘거리는 수선화는 130원
오늘은
조선백자 그림이 예쁜
170원짜리 우표를 공짜로 얻었다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내 마음 모두 전해줄 우표를
침 발라가며 잘 뜯어내어
지갑 속에 넣었다
나는 아주 기분이 좋다
퇴근길에
생맥주 500cc 마셔야겠다
- 오탁번 시 ‘우표 한 장의 행복‘
* [1미터의 사랑] 1999 시와시학사
** 오 탁번: 1943년 7월 3일, 충북 제천시
사망, 2023년 2월 14일 (향년 79세)
데뷔,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8.~2010.제36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1998.~계간 '시안' 창간
1993.~1994.고려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1983.~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2020. 제28회 공초문학상
2020. 제18회 유심작품상 특별상
2010. 은관문화훈장
2010. 제6회 김삿갓 문학상
1997. 정지용문학상
1994. 동서문학상
1987. 제12회 한국문학작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