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박순재 몬시뇰을 비롯한 사제 6명이 20일 각각 마지막 임지 성당에서 동창, 선ㆍ후배 사제들과 공동으로 은퇴 감사미사를 집전하고 원로사목자로서 제2의 사목 인생에 들어갔다. 교구 사제로서야 '정년'을 맞지만, 사목 인생엔 정년이 없다는 소신으로, 남은 삶도 그리스도의 참된 목자로서 직무를 충실히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박순재 몬시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립니다"
▲ 박순재 몬시뇰과 사제들이 20일 대치동성당에서 은퇴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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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성당에서 은퇴 감사미사를 봉헌한 박순재 몬시뇰은 "주님의 뜻이 있었고 성모님이 도우셨기에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며 지난 세월을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으로 돌렸다. 또 신자들에게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은 은혜롭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며 "여러분 가정에 주님 은총이 넘치길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승균(의정부교구 주엽동본당 주임) 신부는 미사 강론에서 "오늘은 사목 은퇴를 선언하는 날이 아니라 연장전에 돌입하는 날"이라며 "연장전을 기쁜 마음으로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이어 "신자들은 몬시뇰을 자주 찾아뵈며 식사를 함께할 것"을 당부하고 "몬시뇰은 찾아오는 이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지갑을 활짝 열어야 한다"고 말해 은퇴미사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신자들은 주임사제로서 본당을 이끌어 준 박 몬시뇰에게 감사를 전하며 묵주기도 24만 단, 사제를 위한 기도 1만6000단, 평일미사 7000회를 영적 선물로 드렸다. 또 박 몬시뇰 강론을 책으로 엮어 은퇴미사에 참례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서병기(보니파시오) 사목회장은 "몬시뇰께서 보여준 신앙모범과 성모신심은 신자들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면서 "신자들 모두 몬시뇰 애인으로 남아 몬시뇰께 변함없는 사랑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1965년 12월 사제품을 받은 박 몬시뇰은 서울대교구장 비서, 동성고 교장, 교구 3ㆍ4지구장, 교구 참사위원, 절두산 성지ㆍ대방동ㆍ혜화동ㆍ불광동 주임 등을 역임했다. 2001년 몬시뇰에 서임됐고, 2002년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를 지낸 뒤 2006년부터 대치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해왔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주상배 신부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주상배 신부 은퇴미사가 봉헌된 광장동성당은 주 신부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넘쳐흘렀다. 전 신자와 수도자 등 600여 명은 모두 일어나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주 신부 얼굴에도 아쉬운 미소가 가득했다.
"부족한 사제생활을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저 모든 분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주 신부가 논현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시절 사목회장이었던 임도원(베드로)씨는 축사에서 "순수하고 활달한 모습으로 신자들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살아오신 사랑이 넘치는 가난한 신부님이셨다"고 회고했다. 또 "신부님이 깊은 밤 홀로 성당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며 "날마다 새벽 2시 성체조배실로 향하는 신부님을 본 동네 주민이 경찰서에 신고를 해 신부님은 간첩이 아니라고 해명한 적도 있다"고 털어놔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이어 주일학교 초등부 어린이들의 축하 노래와 해금ㆍ색소폰 연주로 축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939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주 신부는 1965년 12월 사제품을 받고 미아리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1967년 군종사제로 부임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어 당산동ㆍ논현동ㆍ동작동ㆍ풍납동ㆍ도림동본당 주임을 거쳐 2005년부터 광장동본당에서 사목해왔다. 초대 서울 ME 대표 지도신부로도 활동했으며, 앞으로 본당 신자들이 십시일반 마련한 광장동 아파트에서 사제로서 삶을 이어간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양홍 신부
#"인터넷 사목상담실 운영에 힘쓸 터"
○…6년 6개월간 심혈을 쏟아부은 노량진성당에서 정년 감사미사를 봉헌한 양홍 신부는 인터넷 사목상담실 운영을 통해 제2의 사목적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지난해 8월 사목일선에서 물러난 동창 안충석 신부는 "양홍 신부님의 사목인생 43년은 본당 사목에 헌신하며 이땅의 민주화와 교회 쇄신을 위해 반대받는 표적이 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인터넷 사목 상담실을 준비 중이라니 그 사목적 열정은 양 신부님을 영원한 현역으로 기억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 신부'인 홍성학(가톨릭출판사 사장) 신부도 "신부님께서 초대장을 만들면서 '은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정년'이라는 표현을 굳이 넣으신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사제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으로 보인다"며, 아버지 신부의 영육간 건강을 기원했다.
양 신부는 답사를 통해 "여러 본당을 다니며 함께해온 모든 분들, 그리고 사목이 참으로 소중했다고 느껴지고 그동안 행복했다"면서 뒤이어 "앞으로도 행복하겠다"고 말해 축하식장에 폭소를 자아냈다. 이어 "앞으로도 다른 각도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뤄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1940년 서울 태생인 양 신부는 1967년 12월 사제품을 받았으며 서울 구로1동본당 주임, 성령쇄신봉사회 대표, 잠원동 주임을 거쳐 노량진동본당에서 정년을 맞았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장덕필 신부
"인정 많은 우리 신부님, 영원히 기억할 것"
○…성수동성당에서 봉헌된 장덕필 신부 은퇴미사에는 동료, 선ㆍ후배 및 신자 등 내외빈 1000여 명이 참례해 장 신부의 영육간 건강을 축원했다.
가톨릭경제인회 전 회장 박광순(대건 안드레아)씨는 송별사에서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행사,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서울대교구장 착좌 30주년 기념미사 등 굵직한 행사를 오차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건 신부님의 뛰어난 기획력과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뜨거운 가슴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가톨릭중앙의료원장 재임시 병원 발전과 서비스 향상을 위해 쏟으신 열정은 오늘날 병원 발전에 큰 초석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어 박씨는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속내는 한없이 여리고 인정 많은 우리 신부님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 마음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장 신부는 답사에서 "사제가 된 것은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었고, 또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의 기도와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수많은 신자들의 힘이었음을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 신부는 1969년 12월 사제품을 받고 명수대본당(현 흑석동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영등포동본당 주임, 성모병원 관리부장, 명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중앙의료원장, 둔촌동본당 주임 등을 지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김영환 신부
"죽는 날까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 김영환 (가운데)신부와 김운회(오른쪽), 조규만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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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큰 과오 없이 38년 간 사제로 살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죽는 날까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은혜를 갚아 나가겠습니다."
서원동성당에서 주임신부로서 마지막 교중미사를 주례한 김영환 신부는 신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김 신부는 "제 직선적인 성격과 말투 때문에 상처 받은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청한다"면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청했다.
신학교 동창인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축사를 통해 "김 신부님은 강해 보이지만 누구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고 나면 야단 맞은 사람보다 더 많이 아파하는 여린 마음을 지니신 분"이라며 "40여 년을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한결같이 살아오신 신부님께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조규만 주교는 "김 신부님은 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마음은 한 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외강내유(外剛內柔) 신부님"이라고 "은퇴 후에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제로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신부는 1973년 사제품을 받고 신당동ㆍ명동 보좌, 대림동 주임을 거쳐 1980~85년에는 가톨릭중앙의료원 관리부장으로 봉직했다. 이후 장위동ㆍ화곡2동ㆍ대치동ㆍ도곡동 주임을 지내고 2005년부터 서원동 주임으로 사목했다.
평화신문 2011.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