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 신혼여행 일지 - (1)호놀룰루 출발
신랑은 미국인이다.
이민을 와서 미국 시민권을 딴 미국인이 아니고 미국에서 태어난
토종 미국인으로서 아버지는 일본인, 어머니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난 백인이다.
일본계 혼혈아인데 토종 미국인이라는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신랑을 비롯해 신랑의 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미국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쪽 친척들 중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미국인에 가깝다.
그래도 신랑에겐 동양적인 면이 생각보다 많아서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데 아마도 신랑과 그 집 식구들이 모두 하와이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하와이에서 3년 가까이 살아봤는데 혹시 미국의 다른 지역은
가보지 못하고 신혼 여행 같은 걸로 하와이에만 와 본 사람들이
있다면 절대 그것만으로 미국을 봤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하와이는 굉장히 미국화 된 동양의 어느 도시라고 하는 편이 더 맞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백인이 차별을 받을 수
있는 곳이 하와이이다.
내가 하와이에 살던 98년부터 올 여름까지도 하와이 주지사는
필리핀 사람, 주 대법원장은 한국 사람, 그리고 연방 상원 및
하원 의원의 대다수가 동양계였다.
2000년 3월에 신랑과 결혼을 했다.
신랑은 대학을 나와 같이 워싱턴주에서 다녔을 뿐 외국은커녕 미국
여행도 나보다 적게 한 사람이었다.
나는 미국에 온 지 10년 동안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한국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또 결혼을 했으니 친지들께 인사도 해야할 것 같아서
신혼여행을 한국으로 가자고 꼬셨다.
사실 한국으로 신혼 여행을 가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결혼 앨범
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결혼 앨범 만들어 가지고 오는 신
혼 부부들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미국에서 그 정도 크기의 앨범에, 액자, 드레스, 메이크업까지 하려
면 한국 왕복 비행기표를 빼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해주는 곳도
없지만...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LA에는 있는 것 같다)
신혼 여행 기간은 10일.
결혼 앨범을 해주는 스튜디오에 물어보니 촬영하고 앨범이 나올 때까지
15일에서 한달 정도는 걸린다는데 외국에서 왔다니까 최대한 빨리
해주겠다고 해서 예약을 했다.
결혼식 다음날 호놀룰루 국제 공항에서 대한 항공을 탔다.
10년 전 미국에 올 때 빼고는 처음으로 타보는 국제선이다.
신랑은 비행기가 출발하자마자 잠이 들어서 세상 모르고 자기
시작했다.
중간에 식사가 나왔는데 신랑은 비빔밥을 먹어보더니 여태까지 먹어
본 기내식 중에서 제일 맛있다고 좋아했다.
기내에서 나누어 준 조그만 메뉴표에는 대한항공 기내식이 맛있는 걸로
1위에 뽑혔다던가 하는 말도 적혀 있었는데 그 말이 맞다면서 칭찬을
하는 것이다.
입맛 까다로운 신랑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불고기와 비빔밥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밥을 먹고 신랑은 다시 잠이 들었고 (신혼 부부들은 신혼 여행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무지 닭살이라던데 우린 왜 이런지 몰라...)나는
잡지를 보다가 시작한 지 한참이 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끼고 듣는데 영어와 한국어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미국 영화였으므로 영어를 선택해서 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깼는지 신랑은 내가 영화를 보고 있자 자기도 이어폰을
끼고 옆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디즈니에서 심심하면 만들어서 내 놓는 동물 사랑의 주제로 만든
영화였다.
어린 아이가 곰과 친구가 되는 내용이었는데 중간에
어른들이 아이와 곰을 떼어놓는 장면이었다.
아이는 어른에게 업혀 끌려가면서 "No! No! No!"를 외치고 있었다.
갑자기 신랑이 내 이어폰을 내리더니 귀에 대고 한국말을 한다.
신랑: 시로, 시로
싫어?라는 말은 신랑이 알아듣는 몇 안 되는 한국말 중에 하나이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신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신랑은 더 신이 났는지 시로,시로를 한번 더 하는 것이었다.
신랑이 꿈을 잘못 꾼 게로군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내 생각을 모르는지 신랑은 내 어깨를 톡톡 치더니 한번 더
시범을 보인다.
신랑: I know 시로, 시로, 시로
자기가 싫어 라는 말을 안다는 게 새삼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더니 내가 끼고 있던 이어폰을 자기 귀에 대보고는 갑자기
놀라는 표정이다.
신랑: 왜 니 이어폰에서는 영어가 나와?
니나: 뭐? 그럼 여태 뭐 들었어?
신랑 이어폰을 대보니 한국말이 나오고 있었다.
니나: 왜 한국말로 듣고 있어? 채널을 2번에선 영어가 나오는데.
신랑은 영어 채널이 있는 줄은 모르고 대한항공이니까 한국말만
나온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못 알아듣는 한국말이지만 귀에 꽂고 영화를 보는데
싫어, 싫어, 하고 알아듣는 말이 나오니까 신이 나서 내게 자랑을
했나보다
시로, 시로 때문에 웃다가 영화를 마저 보고 나서 신랑은 다시
잠이 들었다. (우리 신혼부부 맞냐?)
열 한 시간 정도 비행기를 탔는데 타자마자 식사를 한번 주고는
내리기 직전까지 식사가 나오지 않아서 너무 배고팠다.
곯아 떨어졌던 신랑은 배가 고파서 잠이 깼을 정도였다. (너무하는군)
두 번째로 나온 기내식은 배가 무지 고픈 상태에서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맛이 없었다.
신랑이 아까 최고라고 했던 말을 취소했다. (-_-)
김포 공항이 가까워오자 비행기는 점점 낮게 날기 시작해 아파트
단지들과 도로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신랑은 벌써 질린 표정이다.
어떻게 된 도시가 끝도 없냐고 했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그렇겠지만 LA같은 큰 도시도 조금만 운전하면
허허벌판이 나와서 도시의 끝임을 알게 되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정말이지 끝이 안보이게 빽빽했다.
하와이 좁은 섬에서만 살았던 신랑 눈에는 더욱 서울이 크게 느껴졌
을 것이다.
사실 하와이 섬 중에서 우리가 살던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섬은
마우이나 빅 아일랜드 보다도 작다.
호놀룰루를 제외한 동네는 인구도 적다.
우리 시댁에서 내가 일하던 직장까지 운전하면 15분 정도 걸리고
백화점까지는 3분, 우체국 3분, 바닷가 10분, 공원 10분, 공항 20분,
와이키키 10분 정도가 걸린다.
차에 기름을 꽉 채우면 한 열흘에서 2주일 정도는 쓰는 것 같았다.
공항에 내리자 걱정했던 것만큼 춥지 않아서 우선 다행이었다.
마중 나오신 작은 아버지, 어머니 말씀이 어제까지만 해도 무척
추웠는데 오늘은 날이 풀렸다고 했다.
딱 알맞은 만큼 싸늘한 바람이 상쾌하고 좋았다.
내게는 10년 만에 오는 한국, 그리고 신랑한테는 처음 오는 한국.
앞으로 열흘 남짓 신혼여행도 딱 이정도로만 상쾌하길...
[니나]신혼 여행 일지 - (2) 서울 도착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작은 아버지, 어머니께 부탁을 해서
스튜디오부터 들러야 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바로 촬영을 들어가야 하와이로 돌아가기 전에 앨범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 도착하자마자 드레스 고르고 장소 정하고 치수도
재야 했던 것이다.
한복은 자기 걸로 가지고 와야 한다고 해서 결혼식 때 입었던 것을
싸가지고 갔다.
울 신랑도 한복이 있냐구? 물론 있다.
하와이에서 치수를 재서 한국에 보냈더니 이모가 맞춰서 부쳐 주셨다.
스튜디오에서는 무엇보다도 신랑의 체격에 놀란 것 같았다.
한복을 맞출 때도 천이 더 들어가서 돈을 더 내야 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미리 예상을 했었기에 하와이에서 전화로 예약을 할 때 신랑의 키가
190 센티미터라고 말했었다.
그랬더니 기함을 하면서 바지는 맞는 것이 없으니까 까만색으로 자기 것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신랑 키가 190 센티미터라는 말에 놀라는 한편 역시
미국 사람은 키가 커, 라고 생각하겠지만 미국 사람이라고 다 키가 큰 건
아니고 신랑이 그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한다.
시아버지 키가 175쯤 되시는데 미국에서 태어나셨으니까 우리나라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전쟁 땜에 못 먹어서 키가 덜 자란 게 아닌 이상
특별히 큰 키는 아니다.
시어머니는 오히려 우리 엄마랑 비슷한 백 오십 몇 센티미터 수준이다.
신랑이 어쩌다가 키가 이렇게 자랐는지 모를 일이다.
얼마전 시아버지 친구 분이 놀러오셨다가 신랑을 보더니 얘가 이렇게 컸었나,
하고 놀라면서 시어머니한테 이렇게 말했다.
"우체부 키가 컸나보죠?"
시아버지랑 무지 친한 사이인가 보다. 그런 농담을 다하다니... -_-
스튜디오에서 일을 마친 뒤 다음날 아침에 촬영을 하기로 하고
큰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10년 만에, 그것도 막 결혼해서 신랑과 함께 한국을 들어온다니까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신랑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한국어로 연습시켰는데
친척 어른들을 부르는 호칭도 연습시켰다.
근데 이게 무지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 쪽이 아홉 남매, 아빠 쪽이 다섯 남매인 대가족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은 아빠 쪽 어른들만 뵙게되었다.
아빠한테는 형제가 둘, 자매가 둘이다.
신랑에게 할머니, 큰아빠, 큰엄마, 작은 아빠, 작은 엄마, 큰고모, 작은 고모...
하는 식으로 열심히 연습을 시켰더니 곧잘 외웠다.
얼마나 잘 하는 보려구 테스트도 했다.
니나 : 우리 아빠의 형님을 뭐라구 하지?
신랑 : 컨 아바 (큰 아빠)
니나: 그럼 우리 아빠의 누나는?
신랑: 코우모 (고모)
니나: 그럼 우리 아빠의 남동생의 와이프는?
신랑: ......
니나: 힌트! 작은 아빠의 와이프라고도 할 수 있지.
신랑: 촨 오마 (작은 엄마)
생각보다 잘했다. 아이구 이뻐라,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이쁘다는 소리는 한국말로 해도 알아듣는다)
근데 막상 큰아버지 댁에 당도하니 연습한대로 먹혀들질 않았다.
어른들 외에 친척 오빠들과 동생들 5명도 모여 있었고 친척 오빠 2명은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자 우르르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 그 때는
세어보지 않았지만 지금 계산해 보아야 겠다 -....... 17명이나 되는 것이었다.
친척들이 반가와서 한국말로 막 떠들어대고 수선을 피우자 신랑은 벌써 넋이
반쯤 빠졌다.
어른들은 신랑이 한국말을 못 한다는 것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우리를 보며 마구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신다.
신랑은 말투나 억양으로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눈치로 때려잡으려는 듯
정신이 없었다.
어떤 감정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도만 대충 알아듣는 것 같았다.
어른들 : 우와~ 이 녀석은 왜 이리 키가 큰 거냐? (놀라움)
니나 : 좀 훤칠하죠.... 호호호 (우쭐~)
어른들 : 아이구 너무 보고싶었다, 얘야 (만남의 기쁨)
니나 : 저두요, 저두요... (감동)
어른들 : 미국에 식구들은 다 잘 있지? (그리움)
니나 : 네. 모두 건강하시죠 (뿌듯)
어른들 : 어쩌다가 이렇게 잘생긴 신랑을 만났냐? (호기심)
니나 : 아니, 뭐 잘생기긴요.... 호호호 (겸손)
어른들 : 니가 정말 신랑이랑 영어로 말이 통한단 말이냐? (의심 -_-)
니나 : 그, 그럼요...... Really! (당황 -_-;)
어른들 : 니가 먼저 좋아서 꼬셨지? (추궁)
니나 : 뭘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아, 배고프다.... (회피 -_-;;;)
한국 사람들 목소리 큰 거야 유명하지만 가뜩이나 우리 식구들은 목소리가
더 카랑카랑한 편이라서 아파트 복도가 진동하는 듯 했다.
할머니께 절부터 올리라고 끌어당기자 신랑이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결혼할 때 폐백 드리면서 무수히 했던 절도 잊어버렸나 보다.
힐끔힐끔 날 쳐다보며 흉내내느라 여자가 하는 절을 하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다가 갑자기 식구들이 웃는 소리에 옆을 보니
190 센티미터의 거구가 다소곳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절을 하고 있었다. -_-
큰절을 안한게 다행이었다.
공항에서부터 배가 고파했던 우리는 정말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친척들은 신랑이 한국 음식도 잘 먹고 젓가락질까지 잘 하는 것이
신기했던지 저녁 식사보다는 신랑 구경에 더 정신이 없었다.
(신랑은 한국 음식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고 실제로 하와이에는
한국 음식이 널리 퍼져 있어서 Yummy라는 한식 패스트푸드 점도 있다.
호돌이 마크가 로고인데 하와이 전역에 체인이 펴져 있다.
하와이 여행 가서 한국 음식 그리우면 꼭 한번 드셔보시길... 값도 괜찮고
먹을 만 하거든요...)
신랑은 정신 없이 저녁을 먹더니 얼마 못 가 몸이 불편해서 비비 꼬기 시작한다.
매일 소파 아니면 카페트가 깔린 푹신한 곳에 앉다가 딱딱한 마루에
책상다리를 하고 밥을 먹으려니 다리는 저리고 엉덩이와 허리는 쑤시는 것이다.
고모가 금방 신랑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더니 편하게 다리 피고 먹으라고
하시길래 내가 다시 다리 펴도 된다고 통역을 해주었다.
(내 영어로 말이 통한다는 걸 보여줄 수도 있었다. 뿌듯~ )
그랬더니 이제는 긴 다리가 상 반대쪽 끝에 계신 할머니한테로 빠져나왔다.
신랑은 발에 할머니가 닿자 놀라서 다시 굽히려 하지만 한번 쥐가 난 다리는
수습이 잘 되지 않는다.
긴 다리를 굽히려 하자 이번에는 상 가장 자리에 끼어 나오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괜찮다고 하시며 옆으로 돌아 앉으셔서 그제야 조금은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롱다리라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나를 숏다리라고 맨날 놀리더니...
(숏다리라는 한국말을 신랑에게 가르쳐 줄 때까지는 설마 신랑이 그 말을
나한테 써먹을 줄은 몰랐다. -_- )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하와이에서 사온 선물들을 꺼냈다.
하와이 특산물이 마카데미아 땅콩과 코나 커피 등등이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여행 다녀와서 주는 선물들은 쇼핑해서
사 가지고 가져오는데는 무지 신경 쓰이면서도 막상 나눠줄 때는
별로 생색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 들어갈 때 선물 다 생략하고 그 돈으로
차라리 찾아가는 집 앞에서 그냥 과일 같은 걸 사가지고 들어간다고 한다.
들어보니 편하고 괜찮은 방법인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난 왠지
그러는 게 찔린다.
조금씩 밖에 못 나눠가져서 감질이 날 망정 그래도 멀리 하와이에서부터
특별히 염두에 두고 뭔가를 챙겨왔다는 게 얼마나 정겨운 일인가 말이다.
선물을 나누고 나니 어른들께서 결혼식은 참석 못했지만 축의금이라며
봉투를 여러 개 주신다.
눈물나게 고마웠다.
집 앞 가게에서 과일 사가지고 들어오는 대신 무겁고 귀찮아도 하와이에서
선물 사가지고 오길 백 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액수를 보니 더욱 눈물이 났다. -_-
역시 한국 어른들은 손이 커서 좋다. 신랑 쪽에선 이만큼씩 준 어른이
없던데... ^^
식구들과 밀린 얘기를 하며 그 동안 많이 못했던 한국말을 신나게
하고 있는데 옆을 돌아보니 신랑은 몰골이 말이 아니다.
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눈은 충혈 됐고 딱딱한 마루 때문에 아픈 엉덩이는
계속 쑤시는지 몸을 비틀고 있다.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든다.
명색이 신혼여행 첫날인데 별 다섯 개 짜리 고급 호텔은커녕 생전 처음
보는 딱딱한 마룻바닥에 앉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말을 듣고 있다니...
신랑을 보니 그만 쉬러 가는 게 구해주는 것 같았다.
니나 : 신랑이 엉덩이가 아픈가 봐요. 일어서야겠네요....
그랬더니 친절한 큰어머니가 방석을 가져다 주셨다. (-_-)
어쨌든 그럭저럭 밤이 늦어 모두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간다니까 신랑도 언제 다리가 저렸냐며 날아갈 듯 가볍게 일어선다.
오늘과 내일 밤은 일산의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자기로 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분명히 당신들 신혼 부부 맞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왜 계획을 그 따위로 짰는지 심히 궁금하다.
어쨌든 오늘은 일찍 자야 했다.
내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한국 3월의 차가운 바람을 뚫고 앨범촬영을
해야 했으므로...
(그저 앨범이 죄다.... 계획이 이렇게 된 것도... 남자들이여 결혼
앨범만큼은 무조건 신부가 하자는 데로 하시길.... 여자들 정말로
앨범에 목숨 건다.)
그리고 내일 밤을 여기서 자고 나면 진짜 신혼 여행지인 경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병아리 골골 하는 모습으로 일산에 도착한 신랑은 그대로 깔아놓은
요 위에 쓰러져 버렸다.
그래, 푹 자라... 하고 나는 신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진짜다. 신랑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하는 자장가를 다 알아듣는다.)
그러나 신랑은 몇 분 안되어 다시 일어나 울상을 짓는다.
난생 처음 딱딱한 방바닥에 요를 깔고 누웠으니 등이 배겨 누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랑은 슬픈 강아지 눈을 하고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더니 샤워를
한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자 신랑은 몸이 좀 개운한 모양이었지만 욕실을
나오는 표정은 무지 혼란스러웠다.
한국의 욕실 구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신랑 : 왜 욕조에 샤워 커튼 없어?
미국의 욕실은 마루나 장판이 깔려 있어서 침실이나 거실처럼 맨발로
들어가게 되어있고 욕조나 샤워실은 커튼을 쳐서 물이 밖으로 튀지
않게 되어있다.
당연히 욕실 바닥에는 물이 빠지는 개수구도 없다.
니나 : 물이 튀어도 괜찮아. 바닥에 물이 빠지도록 돼있어.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니까
신랑 : 왜 그렇게 해?
니나 : 뭐가 왜야, 그럼 안 돼?
신랑 : 커튼만 치면 되는데 왜 바닥을 다 젖게 만들어? 귀찮게 신발까지 신고....
(하와이 사람들은 대부분 동양에서처럼 집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니나 : 욕실에서 빨래를 할 때도 있단 말야
신랑 : 집에 세탁기 있던데...
니나 : 어쨌든 굉장히 편리한 구조야
신랑 : 편리한 ....
니나 : 이렇게 편리한 욕실을 첨 보는 게로군?
신랑 : ......
나는 괜한 오기 같은 게 있어서 신랑이 행여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할 때에도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척
하다가 결국은 한국 것이 더 좋다고 무조건 못 박으며 끝내곤 한다.
가끔은 그게 정말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주는 지 회의를
느낄 때도 있다....
오히려 한국 여자 성질 드럽다고 알려지지는 않을지......
고쳐야 할 버릇이다.
신랑은 이해할 수 없는 듯 했지만 피곤했는지 욕실에 대해선 더
이상의 질문이 없었고 대신 수건이 작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항상 샤워를 하고 나면 비치 타올 정도의 큰 타올을 사용하는데
할머니가 주로 쓰시는 그 욕실에는 조그만 세면 타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랑 : 타올이 너무 작아
니나 : 할 수 없어
신랑 : 왜 큰 타올 없어? 이걸로 모자라. 한국 사람은 샤워 안해?
니나 : 욕실에 새 타올 넣어둔 곳에서 더 꺼내서 써
신랑 : 다섯 개도 넘게 꺼내서 썼어. 근데 아직 축축해.
니나 : ......
가뜩이나 체격이 큰 신랑이 할머니의 조그만 수건으로 열심히
물기를 닦는 광경이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신혼 여행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앞으로 9일 동안 신랑이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불쌍한 강아지 같이 낑낑거리며 잠든 신랑은 밤새 등이 배겨 뒤척거렸다.
[니나]신혼여행 일지 - (3)앨범촬영
오늘은 앨범 촬영을 하는 날.
3월 말이니까 따뜻한 봄 날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지 추웠다.
변변한 겨울옷도 없는 신랑과 나는 셔츠와 스웨터를 여러 장 껴입어야 했다.
정말 촌스러웠다.
한복은 직접 가지고 가야 한다고 했더니 할머니께서 보자기에 싸주셨다.
한복 보따리를 들으니 더 촌스러워졌다.
신혼 여행 때는 원래 커플 티 같은 거 이쁘게 맞춰 입고 그러는 거 아닌가?
우린 색깔도 안 맞는 옷들을 겹겹이 입고 보따리를 든 채 집을 나섰다. (-_-)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오늘 가방순이 지원자들이 나와 있다.
신랑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해 보였지만 사진 촬영을 좋아하기
때문에 신이 나 있었다.
신랑은 사진 찍는 걸 무지 좋아한다.
왕자 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배우 겸 모델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얘기는 나중에...)
머리하고 화장하고 스튜디오 촬영 하니까 벌써 점심시간이다.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야외 촬영 장소인 덕수궁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이 쌩쌩 분다.
내 웨딩 드레스는 팔도 없이 어깨 끈만 달려있어서 얼어죽기 십상이었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덕수궁으로 향하는 데 그야말로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차선은 분명 4차선인 거 같은데 때에 따라서 5차선이 되기도 하고
3차선이 될 때도 있다.
신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택시에서 내리자 날 얼려죽일 줄 알았던 찬바람이 오히려 반가왔다.
살아남아 보게 된 세상은 아름답기만 했다.
평일이어서 고적한 덕수궁을 상상하고 들어갔는데 우리처럼 촬영
나온 커플이 스무 쌍도 넘는 것 같다.
게다가 각 커플마다 카메라 기사, 드레스 잡아 주는 아줌마, 가방순이들,
조명, 비디오 촬영 기사까지 따라다니니 덕수궁이 아니라 시장 바닥이다.
단체 일본 관광객들은 왜이리 많은지 가는 곳마다 마주치고....
앨범 촬영하는 신랑 신부를 위해서 탈의실까지 만들어 놓았다니 덕수궁
인기가 좋긴 좋은가 보다.
풍경 좋은 곳에 가서 사진사 아저씨가 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는데
신랑이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계속 통역을 해야 했다.
이게 생각보다 고역이다.
도대체 수줍은 새색시처럼 내숭을 떨 수가 없다.
다른 커플:
사진사: 자, 신랑이 신부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세요
신랑: 자기야, 이리 와.... (신부를 사랑스럽게 안으며 바라본다)
신부: 어머, 몰라.... (부끄....)
사진사: 좋습니다. 찰칵!!!
우리 커플:
사진사: 자, 신랑이 신부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세요
신랑: ......(멀뚱멀뚱)
신부: 날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 봐
신랑: Ok...
사진사: 이번에는 신랑이 신부에게 입맞춤을 해주세요
신랑: ...... (멀뚱멀뚱)
신부: 나한테 뽀뽀해
신랑: Ok...
정말 무드 없었다.... (-_-)
이제 한복 입고 촬영할 차례다.
신랑은 한복이 참 잘 어울린다.
아마 머리 색깔이 까맣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어디서 찰칵 찰칵 카메라 터지는
소리가 한 대도 아니고 계속해서 난다.
돌아보니 단체 일본 관광객들이 우리 사진을 마구 찍어대고 있었다.
오호라~ 우리가 모델인 줄 아는 게로군.... 잠시 뿌듯했다. (^^)
하와이에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일본 사람들은 사진 못 찍어서 안달
났는지 가는 곳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쉴 새 없이 찍어댄다.
아마 신랑이 한복 입고 포즈를 취하니까 신기했나 보다.
궁중복 촬영도 했다.
근데 이게 또 고역이다.
신랑: 이 모자 작아
니나: 쑤셔 넣어봐
신랑: 이 가운은 팔이 짧아
사진사: 하하... 뒷짐 지고 찍어야 겠네요....
니나: 쫌만 참아봐.... 이쁘게 나올거야. 나도 이 가발 써야해. 헉!
왕비 가발 정말 무거웠다.
목을 가눌 수가 없어서 가방순이하러 온 친척 동생이 카메라에 안 보이게
뒤에 숨어 내 머리를 받치고 있어야 했다.
이걸 매일 쓰고 살다니.... 조상님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고생 고생해서 촬영을 마치니 벌써 오후 5시.....
정말 하루종일 걸렸다.
궁 밖으로 나오는데 신랑이 갑자기 소리친다.
신랑: 앗! 저기 봐! 테러리스트 들이야!
니나: 뭐!!!! 어디어디?
신랑이 가리킨 곳은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었다.
신랑: 저것 봐. 모두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겨울에 보온 겸 감기 예방을 위해서 마스크를 쓴 것을 보고 신랑은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젊은 청년들도 아니고 아줌마들을......(-_-)
니나: 저 사람들은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야. 아님 추운 사람들이거나...
신랑: ??????
니나: 저렇게 하면 감기를 옮기지도 않고 추운 바람도 안 마시니까...
신랑: 머리 스타일도 한결같이 아프리카야......
니나: 그건 아줌마들의 특권이야...... (-_-)
신랑과 나 가방순이들 (친척 동생들) 이렇게 다섯 명이서 종로
거리를 구경했다.
신랑은 엄청난 간판의 숫자에 놀라더니 이 골목이나 저 골목이나 똑같이
생겼다고 혀를 찬다.
길이름도 없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목적지를 찾느냐고 했다.
한국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 지 일장 연설을 해줄 수 있었다. ^^
배가 고파서 오방떡을 사서 나눠 먹었다.
신랑이 기겁을 하게 좋아한다.
한 입만 맛보겠다고 그러더니 친척 동생이 양보한 것까지 다 먹어 버렸다.
(예전에 들은 바로는 캐나다에서 어떤 한국 아저씨가 오방떡과
팥빙수 장사해서 무지하게 돈 벌었다던데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도착한 지 이틀 됐는데 신랑은 벌써부터 미국 음식이
그립다고 한다.
길거리에 KFC와 맥도날드 간판이 난무하는 것을 보더니 더 그런
것 같았다.
동생들이 피자헛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메뉴판에 미국에서는 못 보던 불고기 피자를 보더니 먹고 싶다고
해서 시켰다.
정말 맛없었다.
분명 피자헛이라구 써 있어서 들어왔는데 우리가 미국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그걸 피자라구....
(나중에 신랑은 Mr.피자에 가서도 먹어 보았는데 그 때는 맛있다고
한판을 혼자서 다 먹었다.
친척 동생은 그 얘기를 듣더니 한국 상표가 더 맛있다는 뜻이라면서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Mr. 피자에서는 안 먹었지만 송스 피자는 먹어보았는데 확실히
피자 헛보다 맛있었다.
여러분도 비싼 로열티 내지 말고 한국 상표 사 먹으세요......)
신랑은 괜히 미국 음식 먹으려다가 입맛만 버렸다고 투덜대며
피자헛을 나왔다.
피자헛에서 배부르게 먹지 못한 탓에 길거리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떡복기와 오뎅을 시켰다.
신랑이 기차게 잘 먹는다.
(도대체 못 먹는 한국 음식이 없다. 피자는 거부하고 떡복기만 먹으니, 원....)
포장 마차에서 나오니까 그새 날은 깜깜해져 있고 거리는 온통
네온사인으로 가득 차 있다.
신랑이 허걱! 하고 놀란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도시는 첨 봤다고 한다.
니나: 뉴욕에도 가봤다면서?
신랑: 뉴욕 다운타운도 이렇게까지 번화하진 않아.
니나: 리노에선 카지노 거리 가봤을 거 아냐?
신랑: 여기가 더 번쩍거려. 사람들도 넘치구.
서울이 얼마나 큰 국제 도시인지 다시 한번 일장연설을 했다.
신랑은 못 들은 척 하고 열심히 구경만 한다.
그래도 계속했다. (-_-)
신랑은 거리 구경에 정신이 없다.
후줄그레하게 껴입은 스웨터 차림으로 한 손에는 보자기에 싼
보따리를 들고 연신 우와~ 하고 감탄하며 종로를 돌아다니는 저 청년!
누가 저 모습을 보고 미국에서 신혼 여행 온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첩첩 산골에서 태어나 인삼 한 보따리 싸 가지고 생전 첨 서울에
올라온 촌놈 같았다.
친척 동생이 보더니 만약 강남에 데려갔으면 기절했겠다고 했다. (-_-)
종로 거리에 음악이 쿵쾅거리는 것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나도 10년 만에 한국에 나오니 거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귀가 왕왕거렸다.
신랑이 갑자기 멈춰 서서 넋이 빠진 듯 오락실을 들여다 본다.
오락실 안에서 미친 듯이 껑충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친척 동생이 펌프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나도 펌프랑 디디알을 그 때 처음 보았다.
한번 해볼까, 하고 구경하다가 그만 질려버렸다.
신랑은 귀신 같이 발판을 찍는 아이들을 보면서 새삼 한국인의
운동신경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한국이 스포츠 강국임을 알리기 위해 다시 한번 일장연설을......
신랑이 째려보았다. (-_-)
그러더니 곧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수영도 못하고 달리기도 맨날 꼴찌일 뿐 아니라 툭하면 넘어져서 다치고
접시며 유리컵은 주기적으로 깨뜨리는 나......
조상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지 못한 열성인자라고 불쌍해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_-)
오늘은 어제보다 재미있었다며 신랑이 훨씬 즐거운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지하철 안에서는 지하철 첨 타 본다며 손잡이 잡고 서 있는 장면을
찍어달라구 해서 좀 쪽팔렸지만.... 정말 갈수록 촌놈이다.
내일은 기차를 타고 경주로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는 날.
신랑은 기차도 처음 타보는 거라고 들떠 있다.
하여간 한국 와서 첨 해보는 게 무지 많기도 하다. (-_-)
한국의 우수한 철도 시스템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려다 참았다.
하루만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는지 오늘은 할머니 수건으로 군말
없이 샤워도 하고 등이 배긴 다는 소리도 안하고 착하게 잠이 들었다.
자는 모습이 더 이쁜 우리 신랑, 미국 촌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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