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
사람들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했다. 정치도 아마 이야기의 주제였던 듯하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지지했던 아인슈타인은 괴델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표를 던지자 격분했다.) 물리학도 당연히 대화 주제였다. 괴델은 물리학에도 정통했다. 그는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양자론을 불신했지만, 결정론적인 체계에서 기존의 모든 힘을 아우르는 ‘통일장이론’으로 양자론을 대체하려는 그 노장 물리학자의 야심에도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둘은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진정한 중요성’을 지닌 문제들, 즉 실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에 관한 문제에 매력을 느꼈다. 괴델은 특히 시간의 본질에 심취했는데, 한 친구에게 말한대로 그것만이 유일한 본질적 질문이었다. 어떻게 그처럼 ‘불가사의하고 자기모순적인 듯한’ 것(시간)이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는가?’라고 괴델은 물었다.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전문 분야이기도 했다.
(36)
아인슈타인이 밝혀내기로, 보편적인 ‘지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건이 동시인지 여부는 관찰자에게 달려 있다. 일단 동시성이 무의미해져버린다. 한 관찰자가 과거에 있다고 판단한 사건이 다른 관찰자에게는 여전히 미래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분명히 과거와 현재는 마찬가지로 확정적이다. 즉 둘 다 ‘현실’인 것이다.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현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는 광대한 얼어붙은 시간풍경-4차원의 ‘블록 우주’-이 남았다. 여기서는 여러분이 태어나고 있고, 저기서는 밀레니엄의 도래를 축하하고 있고, 또 저기서는 잠시 죽어 있다. 어떤 것도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 수학자 헤르만 바일이 남긴 인상적인 말처럼, “객관적인 세계는 그냥 있지, 발생하지 않는다.”
(71)
수학자라면 거의 누구나 만장일치로 동의하듯이, 리만 제타 가설은 모든 수학 중에서 가장 위대한 미해결 문제다. 어쩌면 인간이 생각해 낸 것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리만은 19세기의 독일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1826~1866)이다. ‘제타’는 제타 함수를 가리키는데, 이는 소수의 비밀을 품고 있는 고등수학의 산물이다. 바로 리만이 그런 점을 알아차린 최초의 사람이다. 1859년에 간결하지만 매우 심오한 논문에서 리만은 제타 함수에 관한 가설을 하나 내놓았다. 만약 이 가설이 옳다면, 소수에는 매우 아름다운 숨겨진 조화로움이 있게 된다. 만약 틀리다면, 소수의 음악은 균형이 맞지 않는 관현악단이 내는 소리처럼 꽤 흉측해지고 만다.
(122)
해리스가 보기에는 약간 구시대적인 상황 인식이다. 1세기 남짓 전에는 매우 첨예했던 수학의 위기라는 인식은 퇴조했다. 오래된 난제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현대의 수학자들에게 어느 철학당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물어보면 평일에는 ‘플라톤주의당’, 일요일에는 ‘형식주의당’이라는 답이 나온다는 농담이 있다. 즉 수학을 일로 대할 때에는 마음과 무관한 실재에 관한 것이라고 간주하다가, 사색적인 분위기에 빠져 있을 때는 단지 형식적 기호들로 하는 무의미한 놀이라고 많이들 믿게 된다는 뜻이다.
(187)
마침내 무한 부활한 것은 1638년에 갈릴레오가 내놓은 또 다른 역설 때문이었다. 모든 정수 ‘1, 2, 3, 4……’를 살펴보자. 이제 각 수의 제곱인 ‘1, 4, 9, 16……’을 살펴보자. 분명 제곱수보다는 정수의 숫자가 더 많다. 왜냐하면 제곱수는 정수의 일부를 차지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주장에 의하면 제곱수를 정수와 짝을 짓는 방법이 존재한다. 가령 1을 1에, 2를 4에, 3을 9에, 4를 16에 등으로 말이다. 두 무한집합이 이런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면, 첫 번째 집합의 각 항은 두 번째 집합의 각 항과 정확히 짝을 맺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두 집합은 지루하게 셀 것도 없이 크기가 같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원리를 무한한 모음에 확장해 본 결과 갈릴레오는 정수의 개수와 제곱근의 개수가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건 종결. 달리 말해서, 부분이 전체와 같았다. 갈릴레오로서도 터무니없다고 여긴 결과였다.
(273)
조지 다이슨이 2012년에 출간한 <튜링의 대성당>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디지털 컴퓨터의 역사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눌 수 있다. 라이프니치가 이끈 구약의 선지자들은 논리를 제공했으며, 폰 노이만이 이끈 신약의 선지자들은 기계를 만들었다. 앨런 튜링은 그 둘 사이에 놓였다.” 튜링을 통해서 폰 노이만은 컴퓨터가 본질적으로 논리 기계라는 통찰을 얻었다. 이 통찰 덕분에 폰 노이만은 에니악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간파하여 보편 컴퓨터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폰 노이만은 그런 기계를 마음껏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의 지도부는 폰 노이만을 하버드나 IBM에 뺏길까봐 그에게 권한과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345)
왜 우리는 어떻게든 우주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랄까? 우주는 목적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만약 목적이 없다면, 터무니없다. 만약 있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목적이 결국 성취되거나 성취되지 않거나. 만약 성취되지 않으면, 우주는 헛되다. 하지만 만약 성취된다면, 더 이상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어떻게 구분하든지 간에 영원한 우주는 (a) 터무니없거나, (b) 헛되거나, (c)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