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으로 연중 한번은 캠핑카들의 행렬이 지나간다. ‘어니’는 그 행렬을 보는 것을 즐거워한다. 어니를 돌보는 형 ‘길버트’도 그 길가에서 기다리다 함께 긴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함성을 지르면 쫓아가는 어니를 바라보며 길버트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어쩌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뭘 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게 뭔데?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 길버트의 현실입니다. 왜요? 어머니를 지켜야 하고 동생 어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당부로 길버트는 어니의 담당입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낮에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합니다. 그래도 일 났다 하면 뛰쳐나가야 합니다. 어니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대체로 데리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늘 붙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일을 해야 하니까요. 그 사이 종종 동네 물탱크 탑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경찰이 출동하여 확성기로 주의를 주며 내려오기를 종용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오르며 장난질하는 어니를 동네사람들은 다 압니다. 당연히 집안도 알지요. 길버트가 그 집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압니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엄청 비둔한 어머니와 4 남매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큰 누나와 길버트가 동네에 나가 일하고 어니와 여동생 하나가 집에 있습니다.
가족 중 환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온 가족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주로 담당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은 어머니가 맡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환자라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도 남편 그리고 큰 자식이 맡게 되겠지요. 아무튼 사랑과 의무로 그 짐을 집니다. 그렇게 일상이 된다 해도 때로는 힘든 싸움을 하면서 이겨내야 합니다. 더구나 한창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면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동네 또래들이 맘껏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그 아픔을 눌러야 할 때도 있습니다. 행여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것으로 인해 다른 가족에게 또 다른 아픔을 끼칠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것이 때로는 인생의 놀라운 반전을 가져다줍니다. 우선은 생각을 깊게 또는 넓게 확장시켜줍니다. 생각을 하다보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그려보게 됩니다. 어쩌면 포기된 인생일지 모르지만 새로운 길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을 보지 못하였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생각이 확장되면서 그 길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인생이 생각을 따라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이 따라옵니다. 아니면 현실을 생각을 따라 변화시켜 가는지도 모릅니다. 무심한 하루하루, 나이만 먹으며 까먹는 시간들이 어느 날부터 마치 새싹 돋아나듯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면 여태 보아왔던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하지 못했던 것들이 어쩌면 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두 여자가 있습니다. 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가정주부, 남편은 동네 보험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나이 차가 있는지 아내에게는 그다지 충실(?)하지는 못하나봅니다. 여자는 동네 착한 청년에 눈이 갔습니다. 묵묵히 자기 일이나 하면서 동생과 엄마를 돌보는 착한 청년입니다. 그러니 눈만 피한다면 맘껏 데리고 놀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캠핑카 한 대가 길버트 사는 집 근처에 주차합니다. 할머니와 젊은 처녀가 타고 있습니다. 차가 고장이 나서 부품을 챙겨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지요. 주문한 부품이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지냅니다. 그리고 길버트를 알게 됩니다. 나이도 비슷한 또래 같습니다.
가정주부 ‘베티’에게 길버트는 현재입니다. 사랑한다기보다는 욕망의 도구입니다. 두 아이의 엄마로 남편 버리고 길버트와 살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럴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여자가 그 형편을 인지하지 못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니 현재를 충족시키면 그뿐입니다. 캠핑카로 온 ‘베키’는 생각도 삶도 자유분방한 아가씨입니다. 이혼한 부모와 따로 떨어져 할머니와 여기저기 다니면 생활합니다. 길버트에게 베키는 여태 생각해보지 않은 미래입니다. 베키를 좋아하지만 함께 떠날 수는 없습니다. 단,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엄마로 인해, 어니로 인해 눌렸던 아픔들이 현실에서 풀어져 미래로 날아가는 기분입니다.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겨낼 수는 있을 듯합니다.
또 사고 치더니 이번에는 경찰에 잡혀갑니다. 수 년 동안 집밖을 나서지 않은 엄마가 어렵게 일어나 길버트를 종용하여 경찰서로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어니를 찾아옵니다. 열여덟의 성인이 되었어도 어니는 어린아이입니다. 엄마는 다시 한 번 길버트에게 어니를 부탁합니다. 이제는 엄마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구경하거나 말거나 밀어붙여 어니를 찾아오는 엄마가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4남매가 모두 엄마와 함께 한 가족임을 새삼 느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족.
남편 사후 베티는 길버트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베키도 차 수리 후 떠납니다. 그러나 베티는 떠난 현실이고 베키는 돌아올 미래입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What's Eating Gilbert Grape)를 보았습니다. 아주 젊은 죠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만납니다. 야, 이 배우들 어릴 때도 연기가 대단했구나,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