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1~35 / 야곱의 사랑
(창 29: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창 29: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창 29: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창 29: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창 29: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창 29: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창 29:7)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창 29:8)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은 살아가기 힘이 들고 고달픕니다.
현대인들은 염려와 불안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 문제, 직장 문제, 가정 문제, 취업 문제, 그리고 여기에 요즘 정치문제, 북핵 문제에 세계적인 전쟁, 기후 문제까지 겹쳐서 살기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야곱은 처가살이요. 나그네의 삶이요. 양치는 생활 7년을 수일같이 지냅니다. 그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우리 시간은 너무나 달콤하게 잘 갑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이 세상의 나그네 같은 삶을 수일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여행을 계속해서 동쪽 사람들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이 보니 들판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 근처에는 양 떼 세 무리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그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양들에게 먹였습니다. 우물 위에는 큰 돌이 덮여 있었습니다.
양 떼가 다 모이면, 목자들은 우물을 덮고 있는 돌을 굴려 낸 다음 양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양들이 물을 다 먹으면 다시 돌로 우물을 덮어서 우물에 먼지나 오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4~6절 야곱이 그곳에 있던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목자들이 대답했습니다. “하란에서 오는 길입니다.” 야곱이 또 물었습니다.
“혹시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십니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그분을 압니다.”
야곱이 또 물었습니다. “그분은 안녕하십니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안녕하십니다. 저기, 그분의 딸인 라헬이 양의 떼를 몰고 오고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야곱은 우물 곁에 있는 목자들이 외삼촌이 사는 하란에서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외삼촌 라반이 평안히 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외사촌인 라헬이 오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를 알고 난 야곱은 하란의 목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7~9절 “그런데 지금은 한낮이라 아직은 양 떼를 모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다시 풀을 뜯게 해야 하지 않나요?”
야곱은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으니 물을 먹이고 가서 다시 양에게 풀을 뜯기라고 합니다.
사실 야곱은 이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오지랖이 넓은 것 같다고 합니다.
목자들이 말했습니다. “양 떼가 다 모이기 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양 떼가 다 모여야 우물을 덮어둔 돌을 치운 다음, 양 떼에게 물을 먹입니다.”(8)
야곱이 목자들과 말하고 있을 때,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끌고 왔습니다.
이때 야곱은 어떻게 했나요?
10~11절 야곱은 지금 결혼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마침 라반의 딸인 라헬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보자 첫눈에 반했습니다. 첫눈에 반하면 대머리도 대머리로 안 보입니다.
라헬은 화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양 똥 냄새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라헬이 일을 하고 오는 건강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일하는 여성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야곱은 그런 감격을 곧바로 표현하지 않고 라헬이 몰고 온 양 떼를 보고, 우물로 가서 돌을 굴려 낸 다음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야곱은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야곱은 감정보다는 의무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랑의 감정을 참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을 마치고 나서 무사히 친족을 만난 것에 감격하여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야곱이 많은 고생 끝에 드디어 라헬과 감격적인 상봉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교훈을 받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먼저 인사하고 포옹하고 그리고 양에게 물을 먹일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사랑의 감정을 참고 일을 한 후에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는 정을 억제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행한 이 한 가지 행동은 야곱의 참을성 있는 성격을 보여 줍니다. 이후에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을 참고 기다립니다. 야곱은 감정적이지 않고 속이 깊습니다. 야곱의 이런 속이 깊은 모습은 요셉에게도 있습니다. 요셉은 십여 년 만에 헤어졌던 형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번이나 울면서도 형들이 변화되기까지 감정을 참아냅니다. 요셉은 속이 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12~13절 야곱이 외삼촌 라반을 만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이 라반이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라헬은 라반에게 뛰어가서 야곱의 소식을 전합니다. 라반은 생질 소식을 듣고 뛰어나와서 야곱과 입맞추어 환영합니다.
그는 야곱을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야곱은 부모님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합니다. 특별히 자신이 결혼하고자 하는 사명을 갖고 왔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14절 야곱의 말을 듣고 라반이 말했습니다.
“정말로 너는 내 뼈요, 내 살이구나.” 야곱은 그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물게 됩니다.
15절 어느 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조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품삯도 주지 않고 너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그는 야곱에게 일을 하면 보수를 줄 테니 조건을 말하라고 합니다.
16~18절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레아고 둘째는 라헬이었습니다.
언니는 시력이 안 좋았습니다. 그 당시는 안경도 없을 때이므로 민첩하게 활동할 수 없고 멀리 있는 것을 보려면 눈을 찌푸리고 보았을 것입니다. 몸매도 그리 예쁘지 않았습니다.
아마 살도 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몸매도 에스 라인으로 환상적이었습니다. 롱다리에 키도 컸습니다.
야곱은 그 내면이나 믿음을 보기보다는 외모를 보았습니다. 야곱은 예쁜 라헬을 연애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에게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봉사하며 일하겠다고 합니다.
19~20절 야곱은 라반과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봉사할 것을 계약하고 야곱은 7년 동안 성실하게 일을 합니다. 야곱의 사랑에서 우리는 사랑의 힘을 봅니다. 7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이 느낀 7년이란 시간은 70일도 아니고 수일같이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이렇게 시간이 잘 갑니다. 마치 신선놀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선은 동굴에서 3일을 지냈는데 나와보니 3십 년이라고 합니다.
현재 야곱의 처지가 이렇게 행복한 처지가 아닙니다. 형에게 쫓겨난 나그네 신세입니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양을 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똑같은 일은 지루하고 권태롭고 피곤한 일입니다. 더구나 자기 양도 아니고 남의 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을 치는 일이 그렇게 행복했던 것은 그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7년 일하면 라헬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 ***
이 말씀이 오늘 중심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야곱의 삶과 유사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 같은 삶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야곱처럼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퇴근 시간이 기다려지듯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가 기다려지고 수요일도 기다려지고 교회 가는 날이 기다려집니다. 저는 목회하기 전에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수, 금, 주일)
21~22절 야곱은 7년이 끝나고 나서 라반에게 말을 합니다 “약속한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곳 사람들을 다 모아서 혼인 잔치를 하였습니다. 혼인 잔치에는 술도 나왔을 것입니다. 야곱은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신부방에 들어갔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밤에 처음 만납니다. 이 밤은 7년을 참아온 극적인 순간입니다.
23~25절 야곱은 꿈 같은 첫날 밤을 잔 줄 알고 이튿날 보니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일어나자마자 라반에게 가서 항의합니다.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왜 나를 속이셨나요?”
이름하여 신부 바꿔치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화에서나 나올 만한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밤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거나하게 취하였습니다.
야곱은 이 순간만큼은 기다리고 참았던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호롱불이 은은하게 비칩니다.
신부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이런 것을 이용하여 신부 바꿔치기를 한 것입니다.
26~27절 야곱의 항의를 받은 라반이 말했습니다. “우리 지방에서는 큰딸보다 작은딸을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단다. 결혼식 기간 일주일을 채우라. 그러면 라헬도 자네에게 주겠다. 그 대신 나를 위해 7년 동안, 더 일해 주어야 된다.” 기가 찰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28~29절 하지만 야곱은 라반의 말대로 레아와의 결혼식 기간을 채웠습니다. 그러자 라반이 자기 딸 라헬도 야곱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라반은 자기의 여종 빌하를 라헬의 몸종으로 주었습니다. 야곱은 라헬과도 함께 잠을 잤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야곱은 라반을 위해 7년 동안, 외삼촌의 양치는 일을 더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받습니다. 라헬은 예쁜 여자였지만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레아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레아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여시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적으로 못생겨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취하여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외모가 못생겼다고 문제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얼굴이 예쁘다고 교만해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더 겸손해야 합니다.
레아는 자신이 당하는 모든 괴로움 때문에 사람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문제를 가지고 주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후손 가운데 유다가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다윗이 태어나며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레아의 아들 레위를 통해서 모세와 아론이 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제사장과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외모에 눈이 먼 야곱을 위해서 라헬 대신에 믿음과 내면성 있는 레아를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요, 믿음이 복입니다.
예수님도 외모가 마른 땅에서 나는 나뭇가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흠모할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택하여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모가 조금 못생겼다고 머리가 조금 안 좋다고 돈이 조금 없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우리를 택하여 자녀로 삼으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아멘.